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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진보당, 정체성 분명히 하라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 담은 담론

野 비례 위성정당 통해 국회 진출로 확보

‘한미관계 해체’ 같은 당 강령에 우려 고조

 

황건적(黃巾賊)은 삼국지(三國志)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후한(後漢) 말 반란세력이다.

 

황건적 자체는 한나라 조정에 의해 토벌됐다. 그러나 이후에도 창천이사 황천당립(蒼天已死 黃天當立‧푸른 하늘은 이미 죽었으니 누른 하늘이 일어서리라) 이념을 추종하는 이적단체(利敵團體)들이 활개쳤다. 그들 중에는 나라에 진심으로 전향(轉向)하는 이도 있었으나 아닌 이들이 더 많았다. 전자(前者)의 대표적 인물은 한나라 대장군 자리에까지 오르는 한섬(韓暹‧생몰연도 ?~서기 197), 후자(後者)의 대표적 집단은 청주병(淸州兵)이다.

 

한섬은 본래 백파적(白波賊)의 두령이었다. 백파적은 곽태(郭泰)라는 자가 조직한 황건적의 잔당 세력이다. 한섬은 주로 수도권인 사예교위부(司隸校尉部) 일대에서 활동했다.

 

그러던 어느날인 195년 11월, 이각(李傕)‧곽사(郭汜)의 등쌀에 못이긴 헌제(獻帝)가 수도 장안(長安)을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권신(權臣) 동탁(董卓)의 두 졸개였던 이각‧곽사는 옛 주인처럼 조정을 장악하고서 패악질 벌이던 터였다. 신나게 가렴주구(苛斂誅求) 일삼다가 황제가 사라진 걸 뒤늦게 깨달은 이‧곽 브라더스는 졸개들 이끌고 추격했다. 황제를 모시는 척해야 조정대신으로서의 지위도 보장됐기 때문이다. 황제가 없으면 이‧곽은 그저 여러 제후(諸侯)들의 토벌 대상일 뿐이었다.

 

이‧곽이 병권(兵權)을 꽉 움켜쥔 상황에서 도망가는 처지이니 헌제에게 큰 무력이 있을 리 없었다. 황제를 따르던 많은 이들이 창칼 아래 처참히 목숨 잃었다. 헌제는 급기야 이적단체 우두머리 한섬에게 도움을 청하는 상황에까지 내몰렸다.

 

한 때 한나라를 뒤집어 엎으려했다가 철저히 토벌당한 황건적의 후예이니 한섬으로선 이‧곽과 손잡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그러나 한섬은 진심으로 전향하듯 조칙(詔勅)을 받들어 산채를 접고 하산했다. 그리고는 백파적 동료 이락(李樂)‧호재(胡才) 등과 함께 이‧곽의 추격군을 물리치고 그 수급(首級) 수천 개를 베는 공을 세웠다.

 

비록 문무백관들과 권력다툼 벌이고 사고도 치긴 했으나 한섬은 한나라에만큼은 진심이었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노한 이‧곽은 다시 사나운 졸개들을 보냈다. 싸움에서 패한 한섬은 따끈한 모닥불‧만화고기가 기다리는 산채로 저 혼자 달아나거나 이‧곽과 결탁하는 대신 끝까지 황제를 보필했다. 그 과정은 천길 낭떠러지를 구르고 또 구르고 일엽편주(一葉片舟)로 황하(黃河)를 건너는 등 고난의 연속이었다.

 

한섬의 호위 아래 이‧곽의 나와바리에서 벗어난 헌제는 196년 7월 마침내 옛 수도 낙양(洛陽)에 입성했다. 하내태수(河內太守) 장양(張楊), 하동태수(河東太守) 왕읍(王邑)은 각각 쌀‧비단을 올려 귀환한 황제를 영접했다. 진정으로 한나라에 전향해 충성을 다했던 한섬은 대장군 겸 사례교위에 봉해졌다.

 

청주병은 정반대의 케이스였다. 이들은 큰 처벌이나 전향서 없이 사면(赦免)되자마자 나라의 안녕(安寧)은 뒷전인 채 다시금 황건적의 본성, 이적의 본능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본래 청주병은 후한 13주(州) 중 하나인 청주에서 봉기한 황건적이었다. 이들은 192년 무렵 다시금 재결집해 여러 군현(郡縣)을 노략질했다. 이를 진압한 조조(曹操)는 무리 중에서 젊고 건강한 자들을 가려 뽑아 청주병을 창설했다. 밥 먹고 한 일이 사람 죽이는 것이었으니 청주병의 싸움실력 하나만큼은 끝내줬다고 한다.

 

그러나 청주병들은 진심으로 개심(改心)해 한나라 산천을 위하는 대신 수시로 노략질 일삼았다. 당시 시대상 병사들의 대민(對民)약탈이 보기 드문 일은 아니었다곤 하나 청주병의 수준은 정도를 넘는 것이었다. 이들은 마치 그 옛날 황건적 시절처럼 나라를 기둥뿌리부터 결딴내려는 듯 작정하고서 가는 곳마다 양민학살을 일삼았다.

 

얼마나 패악질이 지독했냐면 대쪽 같은 성품이었던 조조의 부장 우금(于禁)이 마치 ‘적을 토벌하듯’ 청주병들을 벌할 정도였다.

 

197년 조조는 완성(宛城)에 할거하던 군벌 장수(張繡)의 항복을 받아내고 현지에 주둔했다. 변심한 장수가 반란 일으키자 조조는 겨우 달아났다. 우금도 휘하를 수습해 조조에게로 향했는데 많은 백성들이 창칼에 찔리고 베인 상태로 알몸이 돼 도망가는 것을 목격했다.

 

우금이 묻자 백성들은 청주병 소행이라고 입을 모았다. 주군(主君)이 패주했음에도 청주병들은 마치 “지휘체계가 공백인 이때가 기회다” 노린 듯 반역질에 나선 것이었다. 출병(出兵) 전 조조는 “천자(天子)의 명을 받들어 한나라를 위해 출정한다. 백성의 신체‧재산을 범하는 자는 이유 불문하고 참한다” 공포한 바 있었다.

 

대로(大怒)한 우금은 “지금 이 순간부터 청주병은 국가의 적이다. 그놈들 보거든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여라” 좌우에 명했다. “창천이사 황천당립” “위수김동 친지김동” 주문 외며 아수라장 만들던 청주병 상당수는 우금의 참교육 앞에 목 없는 귀신이 됐다.

 

겨우 어깨에 목이 남겨진 청주병 잔당은 조조에게 달려가 “우금이 모반했습니다. 죄 없는 저희들을 괴롭혔습니다” 거짓 고변(告變)했다. 허나 진실을 알게 된 조조는 “네놈들은 죽어도 싸다” 우금을 크게 칭찬하며 그를 익수정후(益壽亭侯) 즉 무려 제후로 추천했다.

 

더불어민주당 비례위성정당이 논란이다. 종북(從北) 논란으로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된 통합진보당 후신(後身) 진보당에 비례의석 3석이 배분되고 지역구(울산 북구) 후보가 진보당 쪽으로 단일화 된 점이 특히 문제시된다.

 

물론 지금의 진보당이 북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미(韓美)관계 해체’ 등 북한의 대남(對南)노선을 연상케 하는 강령을 두고 각계의 우려가 가시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과거를 뉘우치고 진심으로 대한민국에 전향하신 분들은 존중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무늬만 전향한 자,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여전히 조국으로 여기는 자라면 스스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걷어찬 셈이 되기에 국민의 대표가 될 자격이 없다.

 

진보당이 진정 대한민국을 위해 봉사할 생각이라면 남한이 주적(主敵)이라 하고 김치가 자기네 꺼라 우기는 핵정은‧찌질핑에 대한 시원한 대갈일성(大喝一聲), 연평도‧천안함 등 북한 도발을 신랄하게 규탄하는 진정성 있는 행동으로 국민 불신을 불식시켜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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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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