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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이새퀴 귀순사건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 담은 담론

두신리 등 사건과 오버랩되는 이새퀴 사태

 

<한국서 내쫓긴 두신리‧왕중룽>

 

1985년 3월22일, 한 척의 중국 인민해방군 해군 어뢰정(魚雷艇)이 대한민국 영해를 침범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해당 어뢰정 3213호 승조원들은 회항(回航)하거나 위력시위하는 대신 “연료가 없다”며 서해 대흑산도 근해에서 우리 어선 제6어성호에 조난신호(SOS)를 보냈다.

 

이튿날인 23일엔 중국 함대가 3213호를 찾기 위해 우리 영해로 무단침입하는 일촉즉발(一觸卽發) 사태가 전개됐다. 사건 윤곽은 뚜렷해졌다. 이미 3213호를 인양했던 우리 정부는 즉각 해‧공군을 투입해 중국군 퇴거작전을 벌였다. 또 목포에서 중국집을 운영하던 화교(華僑) A씨를 통역으로 현장에 급파했다.

 

예상대로 3213호는 선상(船上)반란으로 표류한 것이었다. 조사 결과 3213호 통신사 두신리(杜新立‧당시 20세)와 왕중룽(王中荣‧19세)이 중화민국(대만) 망명을 기도하며 56식 자동소총(56式自动步枪)을 난사해 동료 6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중상 입힌 뒤 편대를 이탈해 동쪽으로 무작정 항해하다 한국 영해에 진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바야흐로 3차 세계대전 도화선(導火線)이 될 수 있는 이 사건에 국제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우리 정부는 중국 해군과의 대치를 유지하면서 홍콩 주재 총영사관을 통해 중국 국영 신화사(新華社) 홍콩지사에 무단침범 항의각서를 전달했다. 그 땐 아직 한중수교(韓中修交‧1992년 8월24일) 이전이라 한중 사이에 외교라인이 없었다.

 

숨 막히던 대치사태는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이 한 발 물러섬에 따라 가까스로 종결됐다. 3일 동안의 치열한 협상 끝에 중국은 △유감표명 △관련자 문책 △잘못시인(apology) 등 세 가지 내용이 담긴 ‘중공(中共) 외교부 위임’ 명시 홍콩 주재 신화사 서한에 서명했다. 대한민국‧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중공이 한국에 사과를 표한 건 처음이었다.

 

남은 건 두신리‧왕중룽 처분이었다. 3월28일 오전 11시께 우리 정부는 한중 중간수역인 위도(緯度) 36N, 경도(經度) 124E에서 해경 경비정 258호를 통해 3213호 사망자 시신과 생존자 전원을 중국에 인계했다. 두신리‧왕중룽은 귀국 즉시 반역죄‧살인죄로 기소돼 총살형에 처해졌다. 중국인 망명자는 대만으로 보낸다는 전례를 깬 조치였으나 미국‧일본도 두신리 등 송환에 찬성했다.

 

<美 평안히 정착한 벨렌코>

 

중국 잠수정 침범 사건 몇 년 전인 1976년 9월6일, 일본 홋카이도(北海道) 하코다테(函館)공항에 한 대의 소련 전투기가 착륙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당시로서는 최신예였던 미그(MiG)-25를 몰고 온 사람은 소련 공군 중위 빅토르 벨렌코(Viktor Belenko‧생몰연도 1947~2023)였다.

 

자유진영에 몸담고자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탈주에 성공한 벨렌코는 일본 영공(領空) 진입 시 항공자위대가 스크램블(scramble‧긴급출격)에 나설 것으로 기대했다. 항자대 전투기가 다가오면 주익(主翼)을 흔드는 등 귀순의사 밝힌 뒤 혹 뒤쫓아 올지 모르는 소련기들로부터 보호받으며 활주로에 무사히 안착한다는 게 벨렌코의 생각이었다.

 

자위대는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인근 소련기지에서 이륙한 뒤 돌연 대열을 이탈해 전속(全速)으로 일본을 향해 달려오는 MiG-25를 6일 오후 1시30분께 탐지했다. 그러나 벨렌코가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동료‧조국이었다가 지금은 적이 된 소련기들 추적을 피해 저공비행 실시하자 그의 기체(機體)는 이내 자위대 레이더 화면에서 사라졌다. 일본은 자위대는 물론 총리실‧일반시민들까지도 발칵 뒤집혔다.

 

오후 1시50분께에야 다시 고도를 높인 벨렌코는 홋카이도 상공을 세 바퀴나 휘젓고 다녀도 자위대의 지읒자도 보이지 않자 어이를 상실했다. 그는 자위대 대공(對空)미사일에 격추될 위험을 감수하면서 스스로 활주로를 찾아 착륙했다. 벨렌코가 육지에 발 딛은 뒤에도 “우리가 이 사건 관할한다” 서로 싸우는 자위대‧경찰 간 알력 등 일본은 우왕좌왕했다.

 

최신예 소련기의 스텔스(stealth) 능력에 서방(西方)이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현장에 급파된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일본정부는 MiG-25를 분해해 그 기술을 확인했다. 소련 특작부대 스페츠나츠(Spetsnaz)가 기체를 파괴하러 온다는 소문 퍼지자 육상자위대는 완전무장 병력 수백 명을 투입해 방어했다. 항자대‧해상자위대도 각각 F-4EJ와 구축함 등을 태평양‧동해 등지에 산개(散開)했다.

 

미일은 이후 기체 잔해를 C-5 대형수송기에 실어 항자대 엄중호위 속에 도쿄(東京) 인근 이바라키(茨城)공항에 이송했다. 일본정부는 그 긴박함 와중에도 ‘일본스럽게’ 현수막 걸어 “하코다테 시민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대단히 큰 폐를 끼쳤습니다” 90도로 사과했다. 감쪽같이 재조립 된 MiG-25는 동년 11월15일 레오니트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에게 반환됐다.

 

송환 목록에서 벨렌코는 빠졌다. 그는 그의 희망대로 미국에 무사히 망명했다. 벨렌코는 소련의 ‘방사능홍차’ 등이 두려워 거주지‧이름을 수시로 바꾸면서 미 행정부, CIA에 협력했다. 하지만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아이오와주(州)에 정착해 가정도 꾸리고 항공엔지니어로 일하며 평안히 살다가 올해 노환(老患)으로 사망했다.

 

<李, 지피지기(知彼知己) 의미 고찰해보길>

 

똑같은 망명객임에도 두신리‧왕중룽과 벨렌코의 운명은 판이하게 달랐다. 결정적 원인은 “인성(人性)이 어떠한가” 그리고 “저들을 받아들여서 얻을 게 뭔가”였다.

 

두신리‧왕중룽의 경우 우선 ‘살인’이라는 용납될 수 없는 극악무도 범죄 저질러 온 세상에 소문난 이력이 있었다. 이미 인간의 정도(正道)를 벗어난 인물들이기에 포용할 경우 우리나라만 국제사회에서 욕먹게 되고 실제로 사회에 풀려난 이들이 재차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그렇다고 두 사람이 무슨 공산권 인맥(人脈) 지닌 중공의 중요인사인 것도 아니었다. 대한민국이 마땅히 품어 우리 법(法)으로 상 줄 것은 주고 벌 줄 것은 줘야 하는 탈북민인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두 사람을 용납할 경우 돌아오는 건 서방과의 친선을 진행 중이던 중국정부와의 마찰‧균열뿐이었다.

 

즉 우리나라로서는 두신리‧왕중룽을 받아들일 명분도 없을뿐더러 받아줘 봐야 얻을 건 없고 잃을 것만 많았다. 미일이 두 사람 송환에 찬성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반면 벨렌코는 저 혼자 달아났기에 미국으로선 그를 받아들인다 해도 국제사회에 명분이 섰고 범죄를 우려할 필요도 없었다. 난민협약(Refugee Convention) 1조는 “정치적 의견 등을 이유로 박해 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분한 공포로 인해 그 국적국(國籍國) 보호를 받지 않길 원하는 자”를 난민으로 정의한다.

 

게다가 벨렌코는 소련 내에 원만한 인간관계와 이에 따른 정보 수집망을 가진 중요인물이었다. 실제로 벨렌코 사건 후 소련공산당은 부랴부랴 아군기 식별암호를 변경하는 한편 열악한 조종사들 처우를 개선해 달래는 등 수습에 애를 먹었다.

 

최근 많은 시청자가 보는 생방송에서 환갑이 넘은 자당(自黨) 의원을 향해 “이 X끼”라고 욕설 퍼부은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그간 숨겨왔던 인성이 드러난 것 아니냐는 논란에 휩싸였다.

 

공교롭게도 직후 이 전 대표 측근그룹 천아용인 중 한 사람인 김용태 전 최고위원은 ‘신당 합류는 없다’고 못 박았다. 앞서 천하람 전남 순천·광양·곡성·구례갑 당협위원장도 국민의힘 도당위원회 행사에 모습 드러내는 의미심장한 행보 보였다.

 

이 전 대표는 오는 27일 국민의힘 탈당 후 신당 창당을 선언했음에도 고립무원(孤立無援) 형국이다. 금태섭‧류호정 신당, 이낙연신당 등 창당 선언이 우후죽순(雨後竹筍) 쏟아지는 제3지대는 이 전 대표에게 그리 적극적이지 않다. 이 전 대표는 급기야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과의 회동을 언급했으나 한 위원장이나 국민의힘 누구도 무(無)반응이다. 도리어 “또 집 나갔다 들어오려 하기만 해봐라” 벼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때문에 내년 4월 총선 후 국민의힘 성적이 기대에 못 미친다 해도 이 전 대표 복당(復黨) 목소리는 아마도 거의 없지 않을까 싶다. 제3지대 어디에도 발붙일 곳 있을지 의문이다. 적절한 표현일지 모르겠으나 이를 두고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 전 대표에게 지금 필요한 건 지피지기(知彼知己) 의미 고찰과 ‘당분간 잊힘’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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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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