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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기억 안 난다는 ‘진짜 미치노미야’

오주한

전범(戰犯) 히로히토, ‘안면몰수’ 끝 실체 드러나 망신

이재명, 기억 되찾거나 “깜 안돼” 여론 양자택일 해야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야망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ゆきゆき 神軍‧또는 나아가자 신군)’는 다큐멘터리영화가 있다. 하라 카즈오(原一男) 감독이 1982년 촬영 시작해 1987년 공개한 작품이다. 제목만 보면 일제(日帝) 군국주의(軍國主義)를 미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허나 실상은 일제 수뇌부, 특히 쇼와천황(昭和天皇‧생몰연도 1901~1989)의 두꺼운 낯짝‧위선을 폭로하는 영화다.

 

쇼와천황 즉 미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裕仁)는 태평양전쟁(Pacific War‧1941~1945) 당시 일본군에 대한 통수권(統帥權) 행사한 이다. 대본영(大本營)은 전쟁 당시 히로히토 명을 각 전선(戰線)에 전달하는 역할 하던 기구다.

 

알려지는 바에 의하면, 히로히토는 세세한 전략입안은 군부(軍部)에 맡겼으나, 보고를 받은 후엔 “이리이리 하면 이것이 우리에게 불리하지 않겠나”는 식으로 전쟁에 깊숙이 관여했다. 국가원수로서의 최종 재가(裁可) 의사는 ‘침묵’으로 나타냈다고 한다.

 

그러나 종전(終戰) 후 히로히토는 제 책임을 철저히 벗어던지려 했다. “군부가 총칼로 겁박해 어쩔 수 없이 따랐을 뿐이다” 혹은 “군부가 전부 결재했다”는 식으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 공범(共犯)에게 책임을 전부 미뤘다. 일선 장교‧병사들에 대해선 아예 “난 저들을 모른다”는 태도로 발뺌했다. 자신은 그저 항복방송인 옥음방송(玉音放送)만 했다는 주장이었다.

 

가미카제(神風) 등 전장(戰場)에서 구르고 싸우는 장병들에겐, 수시로 ‘천황폐하의 말씀(天皇陛下のおことば)’이라며 어명(御命)이 전달됐는데도 말이다. 이에 끝내 폭발해 ‘행동’으로 항의에 나선 이의 이야기를 담은 게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이다. 주인공은 전후(戰後) 자신을 신군‘평등’병(神軍平等兵)이라 칭한 오쿠자키 겐조(奥崎謙三‧1920~2006)다.

 

일회용 장기말로 쓰곤 불리해지자 “아몰랑”

 

겐조는 효고현(兵庫縣) 미키시(三木市)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소학교(小學校‧초등학교) 졸업 후 도매상 점원으로 근무했다. 태평양전쟁으로의 확전(擴戰) 기미 보이던 1940년 징병검사에선 갑종합격(甲種合格)했다. 이듬해 3월 오카야마(岡山)연대에 이등병(공병)으로 배속돼 중일(中日)전쟁 한창이던 장시성(江西省) 주장(九江)으로 향했다.

 

그렇게 히로히토의 장기말로 철저히 이용당하던 겐조의 악몽은, 일제 패색이 짙어지던 1943년 무렵부터 시작됐다. 겐조는 그해 1월 독립공병(獨立工兵) 36연대에 배치돼 대미(對美) 격전지였던 뉴기니(New Guinea)로 파병됐다. 겐조가 도착하기 전부터 뉴기니 주둔군은, 장병들을 하루살이로 여기는 무능한 히로히토 등에 의해 굶주리고 있었다.

 

일본해군은 1942년 5월 4~8일 산호해해전(Battle of the Coral Sea)에서 전략목표 달성에 실패해, 뉴기니 남단 포트모르즈비(Port Moresby)를 확보하지 못했다.

 

이 항공전에는 미일(美日) 정규항공모함이 각 두 척씩 투입됐다. 이노우에 시게요시(井上成美) 일본제독은 미 정규항모 한 척을 격침하고 자신은 경미한 피해 입는 성과 올렸으나, 남은 화력(火力)만으론 해군육전대(海軍陸戰隊‧해병대) 지원은 무리라 판단하고 상륙조차 않은 채 퇴각했다. 시게요시 판단을 두고 설왕설래가 오가지만, 대체로 충분한 전력(戰力) 지원해주지 않은 히로히토 등의 무능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뉴기니 최대항구 확보에 실패하고 해군마저 철수했으니, 남은 건 다시 몰려올 미 해군에 의한 봉쇄(封鎖) 다시 말해 보급차단이었다. 당시 미국은 특유의 경제력‧기술력 바탕으로 진주만공습(Attack on Pearl Harbor)에서 잃은 해군력을 급속도로 복구 중이었다. 이에 섬에 고립된 일본육군 등은 1942년 7~11월 자체적으로 항구공략에 나섰다.

 

일본군은 최고봉 4천여m, 평균 해발(海拔)고도 수천m이면서 정글 투성이인 오언스탠리 산맥(Owen Stanley Range)을 걸어서 진군(進軍)했다. 이곳은 그 살인적 험준함 때문에 원주민들도 좀처럼 드나들지 않던 곳이었다. 자연히 1만3000~1만6000여 일본군은 산맥을 넘는 과정에서 태반이 사망했다. 겨우 도착한 포트모르즈비~산맥 사이 코코다트랙(Kokoda Track)에선 미리 매복 중이던 연합군 게릴라 총구가 불을 뿜었다. 일본군 최종 생존자는 약 ‘700명’에 불과했다.

 

이러한 지옥도(地獄道)가 펼쳐진 직후 뉴기니에 도착했으니 겐조라 해서 배부를 리 없었다. 그에 따르면 셀 수 없이 많은 동료들이 따뜻한 밥 한 끼, 국수 한 사발, 빵 한 조각 먹지 못해 굶어죽었다.

 

다큐에서 히로히토를 찾아가다 경찰에게 저지된 겐조는 확성기를 통해, “내가 속했던 독립공병 제36연대는 뉴기니에서 연대장 이하 거의 모두 굶어죽었다”며 한(恨) 맺힌 분노를 토했다. 동료들 묘에선 반합(飯盒)에 쌀밥 지어 올린 뒤 구수하게 피어나는 김 사이로 말없이 상념(想念)에 잠겼다. 노년(老年)에 접어들어선 한국 모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인간은 틀릴 수도 있다. 틀리기도 하고 실수하면 머리 숙여 사죄하면 된다”며 “(히로히토) 그놈은 죽을 때까지 한마디도 잘못했다고 안 했다”고 일갈(一喝)했다.

 

참고로 과거 필자가 고난의행군(1994~2000) 경험한 다수 탈북민들 이야기를 들은 바에 의하면, 아사(餓死)는 그 무엇보다도 비참한 죽음이다. 사망 직전엔 신체가 크게 부어오른 채 말도 몸짓도 하지 못하면서 “끽끽” 소리만 내다가 숨을 거둔다고 한다.

 

金 기억 못할 시 “저런 상태로 어떻게 대통령을” 불가피

 

이렇듯 ‘싹수 노란’ 히로히토 본색(本色)은, 비록 옥음방송 이전엔 한일국민 모두 그의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지만, 일제치하 한반도에서도 알음알음 소문 통해 유명했던 모양이다.

 

일설에 의하면 창씨개명(創氏改名) 강요당한 한 고교생은 미치노미야 히로히토로 개명하려다가 순사(巡査)에게 끌려갔다고 한다. 쇼와천황 이름을 순전히 한국어로 읽으면 “미친놈이야 히로히토”와 흡사하게 된다. 전병하(田炳夏)라는 사람은 전농병하(田農炳夏)로 당국에 신고했다가 마찬가지로 처벌받았다. 전농병하는 일본식 독음(讀音)으론 덴노헤이카 즉 천황폐하와 비슷하다. 혹자(或者)는 이누쿠소 쿠라에(犬糞倉衛‧견분창위) 즉 “개X이나 먹어라”로 바꾸려 했다고 한다.

 

1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4부(부장 강규태) 심리로 열린 공직선거법 위반 의혹 관련 공판(公判)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귀를 의심케 하는 주장을 내놨다. 그는 증인으로 출석한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을 직접 신문하면서 “행사에서 보거나 밥을 같이 먹었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기억이 안 나 (내가) ‘안면인식장애’라고 비난받기도 한다”고 했다.

 

이는 고(故) 김문기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개발1처장이 이 대표를 안다고 생전(生前)에 말했을 순 있지만, 이 대표 자신은 김 전 처장을 안다고 볼 수 없다는 기존입장을 재확인한 것으로 해석됐다. 이 대표는 지난 대선 과정에서 김 전 처장을 성남시장 시절 몰랐다고 주장했다가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등 혐의로 기소됐다. 이후 이 대표, 김 전 처장이 성남시 재직 시절 함께 찍은 사진 등이 김 전 처장 유족(遺族) 등에 의해 공개됐다.

 

이 대표가 정말 ‘안면인식장애’일 수도 있다. 인해(人海)에서 헤엄쳐야 하는 거물급 정치인 특성상 잠깐 만난 사람은 기억 못할 수도 있다.

 

허나 김 전 처장은 하루이틀 만난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대표 주장 설득력은 낮다는 지적이 있다. 여당에선 ‘선택적 기억상실’이란 조롱도 나온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Joe Biden)이 그러하듯, “그 기억력으로 어떻게 대통령하려 하나”란 우려도 있다. 더구나 바이든 대통령은 팔십고령(高齡)이지만, 이 대표는 이제 막 환갑(還甲)이다. ‘잠깐 만난’ 외국원수‧정부요인(要人) 기억 못하면 국가업무는 마비된다.

 

천인공노(天人共怒)할 태평양전쟁 중엔 활발한 두뇌활동‧기억력으로 이를 지휘하다가 정작 패망하자 “늬들 누구세요” 했던 히로히토처럼, 시장‧도지사‧대선후보‧거야(巨野)대표까지 역임할 정도로 명석(明晳)한 이 대표가 적잖은 시간 동(同)기관에서 근무한 사람 얼굴 하나 기억 못 할 정도라는 주장에 의혹 품는 국민이 많다.

 

‘미치노미야’란 원색적 조롱까지 받았던 히로히토의 전철(前轍) 밟는 대신, 이러한 오명(汚名) 뒤집어쓰지 않도록 이 대표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기억을 쥐어짜내 보길 바란다. 만에 하나 수사당국이 먼저 결정적 증거 제시하면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다. 증거를 못 내놓는다 해도, 이 대표 대망론(大望論)에 회의를 품는 여론은 더욱 늘어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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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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