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의 담론
조언 귀담아 듣고 후사 치밀히 챙기길
인상여(藺相如‧생몰연도 미상)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조(趙)나라의 현자(賢者)였다. 그는 본시 식객(食客)으로서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화씨지벽(和氏之璧)을 둘러싼 분쟁을 슬기롭게 해결하는 등 두각을 보여 조나라에 중용됐다.
그의 재능‧기개를 보여주는 일화. 사기(史記)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에 의하면 행방이 묘연했던 화씨지벽이 조나라에서 발견됐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천하 각지에 퍼졌다. 진(秦)나라 소양왕(昭壤王)은 조나라 혜문왕(惠文王)에게 사람을 보내 딜을 청했다. 성지(城地) 15곳을 줄 테니 화씨지벽과 맞바꾸자는 제안이었다.
소양왕의 약속을 믿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강대한 진나라에 맞서기도 힘들었던 조나라는 머리를 싸맸다. 그리곤 고민 끝에 인상여에게 화씨지벽을 들려 진나라로 보냈다.
소양왕을 알현한 인상여는 화씨지벽을 바쳤다. 예상대로 소양왕은 크게 기뻐하며 굴러들어온 보물만 살필 뿐 성지의 시옷자도 꺼내지 않았다. 인상여는 대뜸 “실은 그 옥에도 작은 흠이 있습니다. 제가 알려드리지요”라며 화씨지벽을 슬쩍 받아들었다. 그리곤 갑자기 ‘버럭’하면서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으신 듯하니 이 돌덩이를 깨부숴버리고 나도 기둥에 머리 박고 죽어버리겠소!” 일갈(一喝)했다.
인상여는 공갈이 아닌 정말로 행동에 착수하려는 듯 화씨지벽을 번쩍 쳐들었다. 귀한 보물도 잃고 ‘사기 치는 것도 모자라 사신 목숨도 막 해친다’는 오명(汚名)도 쓸 판인 소양왕은 화들짝 놀랐다. 그가 식은땀 흘리며 만류하자 인상여는 “3일 기한을 주겠다. 어찌할지 잘 생각해라” 경고했다.
그러나 소양왕이 제 땅을 떼어 주기 싫듯 천하의 보배를 타국에 뺏기는 게 싫은 건 인상여도 마찬가지였다. 숙소에 돌아간 인상여는 화씨지벽을 본국(本國)에 몰래 돌려보냈다. 그리곤 이튿날 소양왕 앞에 나타나 “너희 진나라는 약속을 제대로 지킨 역사가 없으니 믿지를 못하겠다. 화씨지벽은 일단 우리나라로 되돌아갔으니 성지부터 먼저 내놔라” 폭탄발언을 했다.
인상여의 지혜‧담력에 눌린 진나라는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서 오히려 인상여를 융숭히 대접한 뒤 귀국을 배웅했다. 이 사건에서 완벽(完璧)이라는 말이 유래됐다.
일화2. 아무래도 화를 참을 수 없었던 소양왕은 어느 날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침범했다. 그리곤 민지(澠池)라는 곳에서 정상회담을 갖자고 혜문왕에게 제의했다. 인상여는 회담에 참석하되 명장 염파(廉頗)가 수도에 남아 세자를 지키고 자신은 혜문왕을 수행하며 또 다른 명장 조사(趙奢)가 수천 병마(兵馬)를 이끌고 어가(御駕)의 뒤를 몰래 따르도록 했다.
회담 장소에 앉은 소양왕은 화씨지벽 사건의 울분도 풀 겸 혜문왕에게 “당신이 그렇게 비파(琵琶)를 잘 탄다던데 한 번 들려주쇼” 요구했다. 일국(一國)의 군주에게 마치 하인 대하듯 이래라저래라 명령 내린 것이었다. 그러나 국력이 약했던 혜문왕은 울며 겨자 먹기로 비파를 연주해줬다. 소양왕은 낄낄거리며 박수치고 나동그라졌다.
이에 인상여는 대뜸 소양왕에게 다가가 “대왕(大王)께선 분부(盆缻)라는 악기를 잘 다루신다는데 저희 대왕께서 한 번 들려 달라 하십니다” 청했다. 소양왕은 정색하고서 “어허, 어찌 지존(至尊)의 몸으로 악사(樂士)가 할 일을 하겠나” 거부했다.
술을 따르는 척 소양왕에게 근접한 인상여는 돌연 검을 뽑고서 “지금 나와 당신의 거리는 다섯 걸음에 불과하다. 이 자리에서 내 목을 찌른다면 당신 얼굴을 내 피로 적실 수도 있다!” 경고했다. 이는 곧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죽을 줄 알라”는 의미였다. 임금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으니 진나라 백관(百官)들은 까무러쳤다. 그렇다고 달려들었다간 소양왕은 회담일이 곧 장례일이 될 테니 손도 쓰지 못했다.
악에 받친 진나라인들은 대신 “혜문왕께선 조나라의 15개 성지를 우리에게 바쳐 저희 대왕의 만수무강(萬壽無疆)을 축원해주시오” 협박했다. 소양왕 앞에서 칼춤을 추던 인상여는 “오냐 주마. 그런데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게 있어야 예의인 법. 너희는 함양(咸陽)땅을 바쳐 우리 대왕의 만수무강x알파(α)를 축수(祝手)하라” 응수했다. 함양은 진나라 ‘도읍’이었다.
갈 데까지 갔다 여긴 소양왕은 이를 갈면서 몰래 끌고 온 군사들을 불러 인상여‧혜문왕을 사로잡으려 했다. 하지만 지평선 너머로 먼지구름 피우며 조나라 대군(大軍)이 몰려오자 자신이 지금 적진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결국 인상여의 기지 앞에 민지의 회담마저도 조나라 측 KO승으로 끝났다.
이렇듯 큰 공을 연달아 세운 인상여는 단숨에 최고 관직인 상방(相國)에 제수(除授)됐다. 이를 바라본 염파는 “저까짓 게 감히” 분노하며 수시로 인상여 뒷담화를 하고 다녔다. 또 “인상여는 천한 출신인데 사내대장부로서 그 밑에 있을 수 없다. 내 언젠가는 반드시 인상여를 욕보이리라” 별렀다.
반면 인상여는 염파를 피해 다니는 것도 모자라 가솔들에게도 경거망동(輕擧妄動) 말라 단속했다. 급기야 염파의 말단 하인들마저 인상여 패밀리를 우습게 아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참다못한 인상여의 가족은 “어떻게든 조치 취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 집단 가출하겠소” 화를 내며 짐을 꾸렸다.
인상여는 가솔들을 진정시킨 뒤 차분히 물었다. “진왕(秦王)과 염파 중 누가 더 무섭나?” “당연히 진왕이지요” “그 진왕을 면전에서 망신 준 게 나다. 내가 어찌 염파 하나를 두려워하겠나? 내가 염파를 피하는 까닭은 진나라는 인상여‧염파가 모두 있는 조나라를 무서워하기 때문이네. 내가 염파와 다투게 되면 곧 진나라만 이로워질 뿐이네”
이러한 인상여의 깊은 뜻을 알아챈 염파는 자신이 소인배처럼 굴었다는 점에 매우 부끄러워했다. 염파는 웃통을 벗고 가시나무 회초리를 짊어진 채 인상여 집 마당에 무릎 꿇어 “나를 꾸짖어주시오” 빌었다.
황급히 달려온 인상여는 마주 무릎 꿇은 채 “아닙니다. 모든 게 제 잘못입니다” 달랬다. 염파는 눈물 흘리며 “비록 목에 칼이 들어와도 대인(大人)에 대한 존경은 변치 않을 것이오” 다짐했다. 염파의 이 부형청죄(負荊請罪)로 맺어진 인상여‧염파의 우정은 후대에 문경지교(刎頸之交)로 명명됐다. 기록에는 명확치 않으나 인상여는 처세술‧정치력에서 빵점이다시피 했던 염파에게 많은 조언을 해줬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후에도 조언 따위 쌈 싸먹은 채 좌충우돌한 염파의 말로는 좋지 않았다. 전쟁을 글로 배운 조괄(趙括)은 염파 대신 조군(趙軍) 대장이 됐다가 진나라와의 전쟁에서 대패했다. 다시 기용된 염파는 빈집털이에 나선 연(燕)나라 군대를 대파(大破)하는 등 녹슬지 않는 무재(武才)를 과시했다.
허나 새롭게 조나라 임금이 된 도양왕(悼襄王)은 염파가 늙었다며 해임하고 그의 부장 악승(樂乘)에게 병권(兵權)을 줬다. 염파는 도양왕의 사람이 방문하자 일부러 한 말의 밥과 열 근의 고기를 먹고 장창(長槍) 휘두르며 말(馬) 타고 내달렸다. 하지만 임금이 직접 이 장면을 목격하지 않는 한 부질없는 짓이었다. 객손은 돌아가자마자 도양왕에게 “염파는 지금 매우 위독합니다” 허위보고했다.
인상여의 조언 따위는 이미 까마득히 잊은 염파는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말았다. 그는 후임 ‘악승’의 부대를 ‘공격’한 뒤 위(魏)나라로 달아났다. 칼자루 거꾸로 쥐었던 사람을 신뢰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위나라에서도 찬밥신세가 된 염파는 야인(野人)으로 살다가 “나는 조나라 병사를 지휘하고 싶다”는 유언을 남긴 채 쓸쓸히 눈 감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최근 홍준표 대구시장과 만났다고 한다. 홍 시장은 윤 대통령에게 여러 시간에 걸쳐 적잖은 조언을 건넨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제 아무리 철인(哲人)으로부터 일자천금(一字千金)을 얻었다 해도 이를 실행하지 않거나 치밀히 관리하지 않으면 염파와 같은 말로를 피할 수 없다. 그 책임은 오롯이 조언을 대충 듣고 후사(後事)를 소홀히 한 이의 것이 된다. 윤 대통령의 향후 행보에 많은 시선이 쏠리는 까닭이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오호라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홍카 조언 새기고 국민 뜻 따르는
대통령이 이제라도 되시길
글 잘 읽었습니다. 재밌네요!
vip께선 후일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오롯이 본인이 책임지는 자세 가지시길 바랍니다. 조언을 '오역'한 본인 탓이라.. '누구 탓하지' 마시고.. 물귀신 안 통합니다. 물론 그런 일 없게 잘 하시리라 여깁니다. 선웅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