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풍파에도 진정 민생만 우선시한 현자들
전례 깨는 李 행보에 한숨만…발목잡기 안돼
우국충정(憂國衷情)의 화신 개자추
개자추(介子推‧생몰연도 ?~기원전 636)는 춘추시대(春秋時代) 진(晉)나라 사람이다.
그가 살았던 진헌공(晉獻公) 시대는 어지럽기 그지없었다. 헌공의 부인 여희(驪姬)는 의붓아들이었던 세자(世子) 신생(申生)이 공을 세우자 헌공‧신생 사이를 이간질했다. 심지어 “신생이 나를 희롱했다”는 거짓누명도 씌웠다.
가도멸괵(假道滅虢) 고사 주인공으로서 현명했던 헌공은 당초 믿지 않았다. 그러자 여희는 신생이 바친 고기에 독약 뿌린 뒤 헌공이 보는 앞에서 개에게 던져줬다. 개가 선 채로 죽자 헌공은 의심을 품다가 급기야 신생에게 자결(自決)을 명했다. 새로운 세자가 된 여희의 친아들 해제(奚齊)는 헌공 사후 국군(國君‧임금) 자리를 물려받았다.
중이(重耳)‧이오(夷吾) 등 신생의 동생들은 여희‧해제 모자(母子) 비수를 피해 각각 적(狄)나라‧양(梁)나라로 달아났다. 이 때 중이는 자객에게 옷소매가 잘리는 등 절체절명 순간까지 갔으나 극적으로 도주했다.
개자추도 중이를 따른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개자추 등의 목표는 국정(國政)정상화와 민생(民生)정상화였다. 그런데 일행이 어떤 나라 국경에 머물 무렵 중이를 따르던 5인 중 두수(頭須)란 자가 변심해 식량‧돈을 모조리 챙겨 망야도주(罔夜逃走)했다.
일행은 졸지에 풍찬노숙(風餐露宿)‧문전걸식(門前乞食) 하는 신세가 됐다. 특히 온실 속 화초로서 곱게 자란 공자(公子) 중이의 고생이 컸다. 이에 개자추는 나라와 백성을 위해 놀라운 결심을 했다. 바로 할고봉군(割股奉君) 즉 제 넓적다리를 베어 중이를 먹인 것이었다.
현대사회에선 카니발리즘(Cannibalism) 즉 식인(食人)이 절대 금기시되지만 주(周)나라 이후 고대에는 달랐다. 그 때에도 인육(人肉)은 공식적으론 금기였으나 충의(忠義)‧효심(孝心)을 위해서라면 용납됐다. 당장 중세에 집필된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만 해도 떠돌이 황숙(皇叔) 유비(劉備)에게 사람고기 바친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 역사에도 비슷한 사례는 있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는 상덕(尙德)이라는 신라 때 사람이 흉년‧전염병에 고생하는 양친(兩親)에게 제 살로 국을 끓여 올리고 종기를 입으로 빨아 낫게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상덕은 혹 부모님이 근심하실까봐 돼지고기‧소고기라 속였다고 한다. 임금은 정려문(旌閭門)을 세워 이 효자를 기리게 했다.
물론 오늘날엔 절대 권장되지 않고 법적으로 문제 될 수도 있다. 아무리 쌀독이 비었다 해도 당장의 끼니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등으로 해결 가능하므로,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라도 그릇된 생각 품는 독자는 없으시길 바란다.
모진 풍파(風波)에도 제 역할만 충실
개자추의 지극정성에 기력 차린 중이는 20년 가까운 방랑 끝에 귀국했다. 그리고는 이오를 혜공(惠公)으로 추대한 뒤 이오가 사망하자 그 아들 회공(懷公) 후임으로 새 임금 즉 문공(文公)에 올랐다. 이오가 즉위할 때 문제의 인물 해제는 이극(里克)이란 신하에게 이미 암살된 뒤였다.
중이를 따른 5인은 뛸 듯이 기뻐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상당수가 초심(初心) 잃고서 “내가 일등공신” 권력다툼에 나섰다. 이 탐천지공(贪天之功) 과정에서 4명 심지어 두수까지도 큰 벼슬을 얻었으나 오직 개자추만 잊혀졌다. 공으로 따지자면 개자추의 공적(功績)이 가장 컸는데도 말이다. 실제로도 적잖은 이들이 개자추를 따랐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중이‧개자추 간에 모종(某種)의 갈등이 있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개자추는 바락바락 대드는 대신 “내 할 일은 다 했다”며 노모(老母)와 함께 초연히 면산(緜山)에 올라 소박하게 살았다. 중이는 뒤늦게야 “뭔가 이상하다. 한 사람이 없는 것 같은데” 머리 긁적였다. 소설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는 맛깔나게 고깃국 먹던 중이가 “캬 죽인다. 그 옛날 떠돌이시절에 개자추가 끓였던 바로 그 맛이로군. 자추야 안 그렇니? 앗 우리 자추 어디 갔냐. 화장실 갔냐” 도리도리하는 것으로 묘사됐다.
중이는 그 길로 수소문한 끝에 면산에 개자추가 산다는 소식 접하고 호출했다. 개자추 모자가 거부하자 중이는, 후일엔 춘추오패(春秋五霸)에 오르는 명군(明君)이 되지만, 무슨 원수가 졌는지 “감히 내 말 안 들어?” 날뛰며 산에 ‘불’을 질러버렸다.
자다가 날벼락 맞은 개자추와 늙은 어머니는 “너 망할 놈 얼굴 좀 보자” 중이에게 영수회담(領袖會談) 제안하는 대신 희생을 택했다. 자신이 반항할 경우엔 겨우 안정된 국정‧민생이 또 혼란의 도가니에 빠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겨우 불길이 잡히고 개자추 모자의 시신 발견한 중이는 그제야 넋 놓고 울었다. 또 개자추의 기일(忌日)에는 고통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고통인 소사(燒死) 당한 그들의 희생 기려 찬 음식만 먹을 것을 전국에 명했다. 교육부 산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향토(鄕土)문화전자대전,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세시풍속(歲時風俗)사전 등에 의하면 이 날이 한식(寒食)‧청명(淸明)절 유래가 됐다는 설(說)이 있다.
이 사건에서 족하(足下)라는 표현도 생겨났다. 중이는 죽는 날까지 개자추를 그리워하고 미안해하며 그가 사망 당시 붙잡았던 나무로 나막신을 만들었다. 이를 신은 중이는 언제나 “발아래 있는 그대를 생각하니 슬플 따름이로다” 내려다보며 한탄했다.
개자추‧굴원 고사에 역주행하는 이재명
개자추 같은 인물은 또 있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나라 인물인 굴원(屈原‧기원전 343?~기원전 278?)이다.
굴원은 회왕(懷王) 시절 좌도(左徒‧입법부) 그리고 굴씨(屈氏)‧소씨(昭氏)‧경씨(景氏) 세 가문을 관리하는 삼려대부(三閭大夫) 등 직책을 지냈다. 그런데 누군가 그를 시기한 한 인사가 “새 법령이 나올 때마다 굴원은 ‘나 아니면 또 누가 이런 정법(正法) 만들겠나’ 자화자찬(自畫自讚)한다” 거짓으로 임금에게 간했다. 이 일로 굴원은 회왕 눈 밖에 났다.
진(秦)나라의 전설적 종횡가(縱橫家) 장의(張儀)에게 신나게 굴욕 당하던 회왕은 나라를 시원하게 말아먹고 진나라에게 처형됐다. 새로 즉위한 경양왕(頃襄王)도 간신 자란(子蘭)을 중용하는 등 눈알 뒤집어졌다. 굴원은 “정신 차리시오” 경양왕에게 누차 고언(苦言)하다가 자란의 참소(讒訴) 앞에 끝내 길거리로 쫓겨났다.
초라한 몰골로 하염없이 멱라강(汨罗江) 누비던 굴원은 한 늙은 어부를 만났다. 놀란 어부가 “어쩌다 이 꼴이 되셨소?” 묻자 굴원은 “세상이 혼탁한데 나 혼자 맑으며, 뭇 사람들 모두 취했는데 나만 깨어 있다가 추방당했소” 처량히 답했다. 이 어부사(漁父辭)를 끝으로 굴원은 멱라수에 몸을 던졌다. 구슬피 운 초나라 백성들이 상징적이나마 배를 몰아 굴원을 구하는 행사가 지금의 단오절(端午節)이 됐다고 한다.
구속위기 면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영수회담 요청이 도마에 올랐다. 민주당은 국정‧민생 논의 차원이라는 입장이지만 여당 등은 정략(政略) 차원이라고 반박 중이다. 사실 필자 생각도 후자(後者)로 기우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대표가 정말 국정‧민생을 위한다면 분풀이‧발목잡기식 회담제안 대신 제1야당 대표로서의 역할에 충실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건국 후 역대 대선에서 패자(敗者)들 상당수가 상당기간 자중했던 이유 중 하나는, 신생정부 정책 및 국론일치(國論一致)에 자신이 혹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허나 이 대표는 이러한 선례(先例)마저도 깬 바 있다. 더 이상의 발목잡기식 태도는 안 된다. 때로는 죽은 듯이 있어야 사는 법이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취재거리도 많고 먹고도 살아야 하니 제가 조만간 다시 언론계 일간지 정치전문기자로 복귀할 듯 싶습니다. 활에 얹힌 화살은 궁수가 겨누는 데로 날아갈 수밖에 없는 것, 저는 물론 늘 한결같습니다만 만약 향후 제 논조가 그간과는 다소 다르더라도 모쪼록 양해와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 다시 제 원래 논조로 돌아갈 듯 싶습니다. 내외 몇몇 분들껜실망스런 소식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그렇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