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가르는 우연..."첫 눈에 반하다"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의 시인 모윤숙(毛允淑, 1910 ~ 1990)은 이승만의 건국사에서 결정적 순간에 결정적 역할을 맡도록 이승만이 선택한 적역(適役)의 히로인(heroine)이다. 우연인가, 운명인가. 인간의 운명과 역사의 수레바퀴를 이리저리 돌리는 우연이 얼마나 많았던가. 한국에 처음 온 인도 외교관 메논이 모윤숙을 만난 우연은 대한민국 건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역사가 되었다.1948년 1월 12일 유엔한국위원단이 인도 대표 메논(K.P.S. Menon, 1898~1982)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한 날 저녁,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에서 열린 유엔위원단 연회에 참석한 모윤숙은 조병옥이 “한국의 유명한 여류시인”이라는 소개로 메논을 처음 만나 악수한다.
메논은 모윤숙을 보자 첫 눈에 반해버렸다.(최종고 [이승만과 메논, 그리고 모윤숙] 기파랑,2012). ‘첫 눈에 반한다’는 일은 남녀관계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심장의 마법이다.그날 연회가 끝나기까지 메논은 모윤숙이 중학교 때 인도 시인 사로지니 나이두의 ‘부러진 날개’와 ‘등산지기’를 읽었다는 말을 듣자 한국을 노래한 타고르의 ‘동방의 등불’을 비롯, 간디까지 시와 명언들은 나누며 시간을 잊었다. 연회가 끝나자 메논은 모윤숙을 집에 데려다주고 나서 그래도 아쉬운 듯 밤에 비서를 시켜 호텔로 모윤숙을 초대하였다. 유엔위원단 일행 60여명이 묵고 있는 국제호텔은 바로 모윤숙의 집 옆이었다. 이것도 우연이 아니랴.다시 만난 남녀는 밤12시 통행금지 시간까지 라운지에서 와인을 마시며 타고르의 ‘동방의 등불’을 외우며 양국의 문화 이야기에 젖었다. 모윤숙은 메논의 잇따른 시낭송을 들으며 조바심이 났다. “제발 정치이야기가 나와 주었으면...나에겐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윤숙 [영운 모윤숙문학전집] 풍성한출판사, 1986)
★안호상과 헤어진 모윤숙, 가정을 버리기로 작정해방이 되자 35세 모윤숙은 ‘가정을 버리기로 작정’하고 문학과 사회활동에 나선다. 한일병탄 직전 1910년 3월5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모윤숙은 원산과 함흥의 보통학교를 거쳐 개성 호수돈여고를 졸업, 서울 이화여전(女專, 이화대학 전신) 영문과에 입학, 학생회장이 되어 3학년 때 독립비밀결사에 참여하였다. 1931년 용정 명신여학교 교사, 서울로 옮겨 경성방송국 기자, 잡지 [동광]에 시 ‘검은 머리 풀어’로 등단,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춘원 이광수가 불러 문단의 대선배로 가까이 지내면서 춘원이 모윤숙의 호 ‘영운(嶺雲)’을 지어준다. 1934년 7월20일, 춘원이 소개한 보성전문 교수이자 철학박사인 안호상(安浩相, 1902~1999, 초대 문교부장관)과 결혼, 다음해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하여 국문학을 전공하고 딸을 낳은 뒤 결혼 2년 만에 남편과 별거한다. 잡지 [삼천리] 기자를 거쳐 경성방송국 여성교양강좌를 맡은 모윤숙은 ‘빛나는 지역’(1933), ‘렌의 애가’(1937)를 펴내 장안의 인기를 한 몸에 모은다.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독립 활동이 문제되어 일본 경찰에서 구류도 살았던 모윤숙은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일본총독부의 ‘명사동원 작전’에 휘말려 전쟁독려에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뒷날 ‘친일’ 공격을 받는 부분이다.
◆“믿고 따를 지도자는 이승만 뿐” 모윤숙, 이승만과 ‘동지’ 관계로1945년 11월 이승만이 소집한 민족대표자대회에 참석해달라는 비서 이기붕의 연락이 왔다.마지막 연사 이승만의 연설을 들은 모윤숙이 일어나 말했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여성입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지도자 어른들께 한마디 하겠습니다. 해외에서 생각하셨던 우리 국민은 모두가 믿을 수도 없고 약해 빠져서 무슨 일을 시킬 수도 없으려니 여기셨을 줄 압니다만 36년간 고초를 겪느라고 죽고 감옥에 간 사람도 허다하오며, 지금도 많은 지도자 어른들이 마음은 살아있어 할 일을 많이 하고 계십니다. 국내에 계신 여러 어른께도 똑같은 기회와 일을 주시고 직위나 명예보다 누가 더 잘 희생하여 이 난국을 바로잡나 하는 데 주력을 두시기 바랍니다” (모윤숙 [회상의 창가에서] 중앙출판공사, 1968).대회가 끝난 뒤 이승만은 모윤숙을 돈암장으로 불러 당부한다. “해외에서 온 사람이나 나라 안에 있던 사람들이나 다 뭉쳐야 해. 나라를 생각해서 자주 와서 나에게 좋은 의견을 말해 주기 원하오” 모윤숙은 이승만을 지지하기로 결심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미소공동위원회가 깨지고 반탁의 기운찬 소리가 온 남한을 휘몰았을 때, 유엔 총회에선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유엔위원단을 한국에 보냈다. 이승만 박사의 고집은 그때 정세를 수습하는데 약이 될만한 것이었다. 소련의 야욕이 무엇인 것도 알아차린 것 같고, 미국의 너그러운 듯 하나 속이 비어 있는 민주주의의 협조자로서의 뜻도 잘 알아차린 듯하였다. 나는 김구, 김규식 두 분을 다 숭배했다. 그러나 더욱 이유있게 숭배한 분은 이 박사였다,하지 중장은 한국의 왕이나 다름없이 세도가 높았다...그를 호되게 비판하고 배격까지 한 사람은 이 박사였다. 모든 혼란을 주재하지 못하는 책임이 하지 중장의 얼떨떨한 통일론이라는 것이었다. 물과 기름을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남북한을 통일하겠다는 것이냐는 것이 이 박사의 논지였다. 어딘지 여성 같은 김규식 씨의 이북(以北)론은 서로 의논해서 하자는 선의의 학자식 정치관을 늘 내놓아 이 박사와의 충돌을 면치 못하였다. 이 박사는 현실과 정치를 분리하지 않았다. 나는 이 박사가 하지 중장을 떳떳이 상대하여 비판하는 개성미가 좋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때의 이 박사의 결의에 도움을 드리고 싶었다” (모윤숙, 앞의 책).
모윤숙은 날마다 이승만의 돈암장에 갔고, 메논은 날마다 모윤숙의 집에 들렀다. 아침에 덕수궁 회의에 나가면서 메논은 대형 세단을 문앞에 세워놓고 문간방에서 놀고있는 딸 일선이를 껴안고 볼에 굿모닝 키스를 해주곤 했다. 저녁에는 비서를 시켜 초콜렛 등 과자를 보내주었다. 동네 사람들은 이상한 눈초리로 수군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메논 박사의 마음을 이승만에게로 돌리게 하기로 작정”하였다. (모윤숙 [영운모윤숙문학전집] 앞의 책)
★“나라에는 자유가 없어도 요정에는 자유가 있었다”모윤숙이 전하는 당시 서울 외교가의 풍경을 돌아보자.「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리는 유엔위원단 회의장 방청석에 갔다. 메논이 방청하러 오라고 해서 간 모윤숙이다. 유엔 대표들 중에는 좌경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미국 제안, 소련 제안, 중립노선 제안을 놓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논쟁을 끝없이 되풀이 하는 것이었다.국내 정치인들은 방청석에서 외국인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나와서는 누가 대통령이 되며 누구 편을 들어야 이로운지 기막힌 이야기들을 하기도 했다. 나는 한국의 일을 외국인들이 이러고저러고 하는 일도 걱정인데 우리 정치인들이 아직도 정신이 안들었구나 싶어 한심스러웠다. 그들에 비하면 이승만 박사는 미국무성이나 외국인이 넘보지 못할 그 자신의 혼이 있었고 주장이 있었다. 또 비굴하지도 않을뿐더러 미국이나 소련의 눈치나 보면서 자기 주장을 굽히지도 않았다. 한국의 절대권력자 하지 사령관은 김규식에 동조하고 그를 밀고 있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이승만 진영의 조병옥씨나 장택상씨 등은 메논과 하지의 접촉을 줄이려 노력했다. 거의 매일 밤처럼 충무로 ‘천향각’등으로 메논 박사를 초청하여 기생파티를 열었다. 매논이 기생파티를 싫어하는데도 말이다. 당시는 요정이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사교장이요 무도장이다. 평소 싸우던 정치인들도 요정에만 가면 희희낙락 의기투합하는 듯, 기생을 안고 국사를 논하다니...나라에는 자유가 없는데 요정엔 자유가 있었다. 36년동안 말 못하고 살아서 그랬는지 생각도 하기 전에 말부터 해대는 것이었다...」 (모윤숙, 앞의 책).
문제는 그런 자리에도 메논이 모윤숙을 꼭 초청하여 문학이야기나 한국 풍속 이야기만 하는데 있었다. 시간은 자꾸 흐르는데 도통 정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중립국 외교관 메논, 어느 날 모윤숙이 참다못해 화제를 돌렸다.“박사님은 문학토론이나 하려고 한국에 오신 것 같군요. 덕수궁 회의에서도 문화토의를 하시나요?” 메논이 금방 웃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사실 문학 토론이나 했으면 좋겠죠. 그런데 머리가 터질 듯 골치 아픕니다. 한국의 길잡이가 누가 되면 좋겠습니까? 김규식 같은 이는 학자 정치가입니다. 남북한 한국인의 의사도 조화실킬 수완도 있어 보이고...”“이승만 박사는요?” 모윤숙이 다급하게 되물었다.“훌륭한 분이지요. 그런데 하지 장군과 잘 어울리지 않는 모양이더군요. 나는 이 나라 국민을 진심으로 대변하는 지도자를 모두 만나고 싶습니다.”“대다수 국민이 이승만 박사의 주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저도 그중의 한사람이구요.”기다렸다는 듯 다짐하는 모윤숙의 말에 메논의 표정이 종잡을 수 없이 변하였다.
◆이승만의 건국전쟁 막판 초읽기 위기...“메논을 잡아라”
북한에 단독정권을 세운 소련의 남한 공산화 공세를 유엔의 힘으로 막아내려는 이승만의 건국전쟁은 이제 마지막 무대에서 초읽기에 몰렸다. 예상대로 소련이 북한 선거를 거부하였고, 철석같이 맹세하였던 김구가 하루아침에 소련 편으로 돌아섰다. 유엔한국위원단은 남북한총선거를 포기하느냐 마느냐, 남한만이라도 총선거를 하느냐 마느냐 갑론을박으로 우왕좌왕을 거듭하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잠 못 이루는 이승만은 ‘묘수’를 찾는다. 메논을 잡아야 한다. , ★모윤숙의 ‘메논 잡기’ 제1라운드메논이 유엔총회에 한국문제를 보고하기 위해 뉴욕으로 떠나기 며칠 전 일이다.“이봐, 미스 모, 메논 박사와 저녁 먹으러 오지. 그 사람이 하지 말만 줄곧 듣고있으면 큰 결단 나겠어. 이승만은 손가락을 훅훅 불어댔다. 20대 시절 한성감옥서 받은 참혹한 고문 후유증으로 흥분할 때면 화끈거리는 손가락들에 이승만이 입김을 불곤 하였다.하지와 김규식의 좌우합작론과 남북협상론에 메논이 솔깃해 있음을 알고 있는 모윤숙은 그것이 얼마나 무섭고 겁나는 일인지 깨닫고, 이승만의 남한 총선거론이 당시로는 가장 현실적 해결책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모윤숙은 ”차나 한잔 하면 된다“는 메논을 데리고 이화장에 달려왔다. 메논은 하지장군과 저녁 약속이 있다고 했다. 프란체스카는 모윤숙을 주방으로 끌더니 황급히 속삭였다. ”이 박사께서 하지와 메논이 마지막 방안을 합의할 것이라며 안절부절 못하시니 어쩌면 좋으냐“고 애원하는 것이었다.”그럼 하지 장군 전화번호 좀 가르쳐 주세요“ 모윤숙이 결심을 한 듯 전화기를 들었다.전화는 비서가 받았다.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는 모윤숙은 거침없이 거짓말을 한다.”저는 메논 의장님 대신 전화를 거는데요. 그분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 저넉 디너를 다른 날로 미뤄달라고 합니다. 미안합니다“ ”오, 정말 그렇습니까?“ 상대방의 응답을 들으며 모윤숙은 다음 말이 겁나서 얼른 전화를 끊는다. 달아오른 얼굴로 메논에게 돌아와 방금 저지른 일을 고백한 모윤숙은 ”무례한 일을 처음 해봤습니다. 부디 오늘 저녁은 이박사와 하시지요“ 애원하는 눈길로 메논을 사로잡는다.”왜 내 말도 안듣고 그런 전화를...“ 메논은 놀란 것도 잠시, 이승만과 만찬에 응할 수 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메논이 좋아하는 한식을 차리도록 이미 준비해놓았다.밤 늦게까지 이승만은 한국의 공산화 위기와 남한단독선거의 불가피성을 간절히 설명하였다.메논은 충분히 이해하였다며 헤어졌는데 그의 결심은 뉴욕으로 떠나기기까지 ”무너지지 않았다“고 모윤숙을 써놓았다. (모윤숙, 앞의 책).
★모윤숙의 ‘메논 잡기’ 제2라운드
2월13일, 유엔위원단은 결국 의장 메논이 유엔에 가서 결론을 얻어오도록 일임하기로 결정한다. 그날 밤, 이승만은 또 다시 모윤숙에게 전화를 건다. 내일이면 메논이 뉴욕으로 떠난다. ”이봐, 윤숙이. 밤이 늦었지만 메논씨를 좀 데려와야겠어. 아주 중요한 일이야“”박사님도...지금 몇신데 여자가 그런 청을 할수 있어요“ 모윤숙은 거절한다.”나라가 흥하느냐 망하느냐 고비에 밤이고 아침이고가 있나. 전화좀 걸어봐, 제발 마지막 청이야“ 이승만의 너무도 간곡한 목소리에 모윤숙이 일어났다.며칠전 메논과의 대화를 떠올린 모윤숙은 메논에게 전화를 걸었다.인도의 타지마할 얘기가 나왔을 때 메논이 달밤에 타지마할을 봐야 그 낭만을 맛볼 수 있다던 말, 모윤숙은 한국의 왕릉들도 달밤에 안내하겠다고 말했었다. ”달빛이 좋은데 금곡릉 산책 어떠세요?“ 메논은 뉴욕 다녀와서 가자고 거절했다. 모윤숙은 뉴욕 가시기 전에 꼭 드릴 말씀이 있다며 졸랐다. 역시나 메논은 차를 몰고 집에 왔다.동대문 쪽으로 가다가 ”추운데 인삼차 한잔 마시고 가지요“ 이화장 마당에 차를 세웠을 때 메논은 따라 내리면서 ”짖궂은 여자(Naughty girl)“라고 외쳤다. 그때, 바지 저고리를 입은 이승만이 기다렸다는 듯 뛰어나와 메논을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달구경 가자는 바람에 나왔지요. 여기가 목적지 아닙니다“ 겸연쩍게 웃는 메논은 이승만에게 끌려 인삼차 테이블에 앉았다.그 사이 프란체스카는 모윤숙을 주방으로 끌고 가서 한지(韓紙) 두루마리를 주었다. 그것은 이승만 지지자 60여명의 명단, 붓글씨로 이름을 쓰고 날인한 것이다. 김구와 김규식은 이미 지지자 명단을 메논에게 전달하였는데 비서 이기붕이 깜빡 잊어버려 뒤늦게 비서 윤치영이 급조한 것이었다. 모윤숙은 이화장을 나온 메논에게 두루마리를 코트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이승만은 포기한 줄 알았는데...왜 미스 모에게 이런 일을 시킬까요“ 중얼거리는 메논에게 모윤숙은 다짐을 두었다.”모든 이유는 훗날 역사가 의장님께 알려 주겠지요. 만약 의장님이 이 서류로 성공시켜주신다면...저는 의장님만 믿습니다. 온 국민이 이 서류에 쓰인 대로 이런 지도자를 지금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그때 메논이 손을 잡았다. 약속의 암시 같았다. (모윤숙, 앞의 책)
★이승만의 집념...날마다 메논에게 전보 치게 하다메논이 떠난 날부터 이승만은 날마다 모윤숙에거 전화를 건다.”전보를 쳐야해. 윤숙이, 우리의 원하는 바를 그가 잊어버리지 않도록 전보를 쳐야 해.“”그럼, 전보를 치시면 되자나요“ 모윤숙은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아니야, 윤숙이 이름으로 쳐야 받아보고 참고 해 줄 거야“이 박사는 타치프로 문안을 치고 끝에 ‘매리언 모’(Marian Moh)란 이름을 치고는 모윤숙에게 사인을 하라고 시켰다. 그렇게 보낸 전보가 단 1주일간 10통이 넘었다.”메논씨는 내가 그렇게 유창한 영어문장을 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회현동 내 집으로 꼬박꼬박 답장을 보내주었다.“ ”한국민이 원하는 대로 힘쓰고 있소. 선이에게 초콜릿을 보내오“ (모윤숙, 앞의 책)
◆ 메논의 연설 ”이승만은 남한에서 마력을 가진 이름이다“
당시 뉴욕 롱아일랜드의 레이크 석세스(Lake Success)에 위치한 유엔에서 유엔소총회가 2월19일 열렸다. 개회 벽두에 연단에 오른 메논은 한국문제 전반을 보고하는 연설을 했다.메논은 소련의 입북거부로 난관에 빠진 위원단이 격론 끝에 유엔이 위임한 사항을 총회에 반납하는 선택은 만장일치로 폐기하였음을 보고하였다. 그리고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는 등 3개의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현재 남한의 대표적인 우익 3개정당(독촉국민회, 한국민주당, 한국독립당)과 좌익4개정당(남조선로동당, 민주주의민족전선, 인민공화당, 근로인민당)을 설명하고, ”유엔에 의하여 한국의 국민정부로서 승인 될 정부를 즉시 수립할 것을 주장하는 정당은 2개“라고 밝혔다. 그 정당들은 이승만 박사가 영도하는 독촉국민회와 김성수가 영도하는 한국민주당이며 ”이들이 남한에서 여론의 대부분을 대표한다는 것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고 했다.이 대목에서 이승만에 대한 언급이 두드러진다.”즉시 총선을 주장하는 우익 2개정당은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 그 재산이란 곧 이승만 박사의 성가이다. 이승만 박사의 이름은 남한에서 마술의 위력을 가진 이름이다. 그의 연륜과 학식과 사교적 매력과 윌슨 대통령과의 친분과 한국의 자유에 대한 평생의 일관된 옹호로 말미암아 판디트 자와하랄 네루(Pandit Jawaharlal Nehru)가 인도의 국민적 지도자인 것과 같은 의미에서 그는 이미 한국의 국민적 지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이 박사는 돌연히 38선이 표징하는 좌우대립이 들이닥침으로써 극우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영구적 분단을 옹호하거나 또는 고려하기에는 너무도 위대한 애국자이다.“(Yoon Sook Mo, [Speeches of Dr. Menon] Mun Hwa Dang, 1948. [동아일보] 1948.2.22.). 메논의 보고를 청취한 각국대표들이 자국입장을 밝힌 뒤, 유엔소총회는 4일간 휴회에 들어갔다.
★ 체코슬로바키아 공산화...스탈린 지시로 공산당이 쿠데타메논의 연설이 진행될 무렵, 동유럽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미국과 유럽에 충격을 주었다. 스탈린이 지시한 쿠데타였다. 연립정부에서 경찰력을 장악한 공산당 내무장관이 우파세력을 숙청하고 공권력을 동원하여 2월21일 정권을 전복시킨 것. 독일 패망후 귀국한 망명정부 인사들이 세운 체코 제3공화국은 사라지고 스탈린이 지도하는 공산정권이 들어선 것이었다.동유럽을 점령한 스탈린은 2차대전이 끝나자 점령국들의 공산화 시나리오를 진행하였는데,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민주주의민족해방전선 등을 만들어 ”선거를 통한 민주정부 수립“이란 전형적 적화수법을 총동원한다. 선거결과는 공산당 제1당이다. 그렇게 좌우연립정부를 세우고 나서 기회를 노리다가 미국의 마셜 플랜에 참여하자는 움직임이 나오자 즉각 행동을 개시했다. 즉, 스탈린은 마셜 플랜에 맞서 코민포름을 창설해 대응하던 중, 우파세력의 마셜플랜 지지 움직임에 이를 ‘계기’ 삼아 쿠데타를 지령하였던 것이다. 연립정부 대통령 베네시는 공산당의 협박으로 사임하고 공산주의 정권을 인정해야 하였으며, 반공주의자 외무장관 마사리크는 호화로운 궁정에 있는 관저3층에서 투신자살하였다. 미국의 마셜 국무장관은 뒤늦게 성명을 발표, 체코사태를 ‘폭력정치시대’로 규정하고 전세계에 초비상적 중대상황이 전개될 것이라며 ”체코 정권은 인민이 승인한 것이 결코 아니오 ‘공포 정권’“이라 비상을 걸었다. 이런 체코 사태가 미국과 유엔의 ‘남한단독선거’를 결심하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메논의 연설에 흡족해하던 이승만에게 또 하나 ‘행운의 여신’이 나타나 도와준 셈이다.
◆남한단독 총선거 결의...메논 ”내 심장이 가는 대로 했노라“
2월24일 다시 열린 유엔소총회에서 미국 대표가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여 한국정부로 승인하는 결의안을 제시하였고 26일 투표한 표결에서 찬성 31표, 반대2표, 기권 11표로 가결되었다. 국내에서는 이승만은 물론, 전 언론이 이를 대서특필, 기쁨에 취하였다.드디어 스탈린이 적화시키려는 한반도에서 ‘남한’ 절반만이라도 ‘구원’을 얻었다. 소련이 북한에 소위 ‘민주기지’를 세워 남한까지 공산화하려는 것을 막고, 이젠 남한에 ‘자유기지’를 세워 북한 공산지옥을 자유화시켜 통일을 이뤄낼 역사적 기회가 열린 것이다. 스탈린과 거기에 끌려간 김구가 가로막은 ‘분단 절벽’에 맞서 이승만 혼자 싸우는 ‘1인 건국전쟁’은 이제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남한 총선거만 치르며 되었다.
메논은 3월6일 서울에 돌아왔다. 모윤숙의 회상록을 다시 펼쳐 보자.「그는 퍽 피곤해 보였다. 이 박사는 그날로 회현동 우리 집에 메논을 초대해서 대접하라고 했다. 메논씨는 귀국환영 파티를 일찌감치 마치고 후스쩌(胡世澤) 박사와 함께 나타났다. 후 박사는 메논씨와 인간적으로 각별한 사이여서 농담도 잘해 좌중을 곧잘 웃겼다.”일주일을 어떻게 참았소. 미스 모가 보고 싶어서 말이오. 이 집 2층과 호텔 당신 방 사이에 구름다리를 하나 놓는 게 어떻겠소? 하하하“우리를 통행금지가 넘도록 이야기 꽃을 피웠지만 지난 일이 떠올라 안타까웠다. 메논씨는 서울에 온 며칠 후에도 우리 집에 통행금지가 지나도록 앉아 있다가 야단이 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메논을 찾다 화가 난 비서가 뛰어들고 헌병대장도 헐레벌떡 ”각하, 서울을 다 뒤져도 계신 곳을 몰라 헌병 백명을 풀었습니다. 혹시 공산당에게 납치되어 평양에 가시지 않았나 했죠. 이제 안심했습니다“라며 돌아갔다.메논씨는 실로 대화의 멋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어디까지가 공동의 대화이며 어디까지가 마음 설레는 사적 대화인지 분계선을 가리기 어려웠다. 두 가지가 다 농후해져 나를 그에게로 이끌어갔다. 그것은 나에게는 새로운 마음의 빛깔이요, 울림이요, 갈망이기도 했다...」
★메논의 자서전 ”모윤숙은 나를 한국의 구세주라 불렀다“유엔에서 돌아온 메논은 오자마자 인도의 외무장관으로 발령되어 3월19일 서울을 떠났다.외무장관 봉직후 소련 주재 대사를 9년간 지낸 뒤 메논은 1965년 펴낸 자서전에서 모윤숙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한국인들은 매우 친절한 사람들이었고 그중 가장 친애한 사람은 지도적 여류시인 매리언 모(모윤숙)였다. 나는 그녀와 많은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데 정치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 않았다.매리언 모는 시인이요 애국자였다. 그녀에게는 남한이 한국이었고 북한은 ‘아데나워의 동독’처럼 하나의 저주(aberration)일 뿐이다. 모윤숙은 모든 희망을 나에게 걸고, 심지어 나를 ‘한국의 구세주’(Saviour of Korea)라 부르는 몇 편의 시까지 지어 읊어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인 나의 나라(인도)가 유엔 결의(남한단독선거)를 거부한다면 그녀는 심장이 터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국에 돌아와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들이 되어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이것은 나의 평생 공직생활가운데 나의 심장이 나의 두뇌를 지배하게 한 유일한 경우였다...」 (K.P.S. Menon [Many World Revisited] 1981. 최종고, 앞의 책)
★모윤숙, 메논의 초청 받아 인도에 가다1948년 8월15일 건국후, 파리에서 열린 유엔3차총회에서 대한민국 정부승인을 얻어낸 사절단의 일원이던 모윤숙은 귀국길 인도에 기착한다. 1년전 김포 공항에서 ”인도에 오시오. 언제든 꼭 인도에, 인도에...“ 여러번 간곡히 요구하며 비행기 창문에 원을 그리던 메논이 파리의 모윤숙을 부른 것이었다. 1949년 2월 인도 공항, 도착한 모윤숙을 맞은 사람은 기대했던 메논이 아니라 메논의 아름다운 부인이었다.호텔서 하룻밤만 지내고 떠나겠다는 모윤숙을 메논 부인은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눈부신 분수와 꽃들과 수목이 무성한 수천평 정원에 높이 솟은 화강암 저택이 으리으리하게 다가왔다.첫 날 여권을 빼앗아 간 외무장관 메논은 모윤숙 앞에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메논의 형과 메논의 부인이 타지마할 등 명승지로 데리고 다녔다. 서먹하고 의아한 나날에 뜻 밖에 네루 수상이 환영만찬을 베풀었다. 물론 메논의 연출이다.2월22일 밤 네루 수상은 몹시 친절한 태도로 모윤숙을 옆에 앉혔고, 그제야 마즌 편에 부인과 앉은 메논을 눈으로 만날 수 있었다. 네루는 한복을 칭찬하며 정치를 하라고 권했다. 모윤숙은 메논씨가 한국이 어려울 때 한국인이 원하는 일을 해주었다고 응답했다. 메논은 미소만 지었다. 네루는 ”이승만 박사가 좀 부드러우면 나와 함께 일할 수 있을 텐데 고집 좀 숙이라고 하시오“ 농반진반 웃었다. 모윤숙은 ”인도와 같은 중립노선이 한국엔 맞지 않는다“며 이승만의 고집정치가 반신불수 한국을 구할수 있는 약이라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네루는 이승만 박사에게 줄 선물로 회고록을 주었다.새벽 1시 넘어 귀가했을 때 메논은 ‘굿나잇’ 한마디만 던지고 부인과 함께 사라졌다.잠 못드는 모윤숙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M선생! 모두가 지나치게 잔인한 친절 속에 저를 가두어놓고 의장님은 만날 수도 얘기할 수도 없는 거리에 계시는군요. 가난하고 비교도 안되는 금곡릉을 타지마할에 비교했던 나의 무지에 대한 보복인가요. 왜 나를 불러놓고 한 번의 식사, 한 번의 만남조차 없이 이리저리로 나 혼자만 다니게 합니까? 지난 번 복도에서 빼앗아간 여권을 빨리 돌려주세요. 이처럼 낮선 사람들 틈에 더 섞이고 싶지 않습니다. 내일 떠나겠어요. 이 진저리나는 고독과 슬픔들이 나를 몰아내고야 말 것입니다. 정월 그믐밤 러크나우에서 M“ (모윤숙, 앞의 책)한 달이 되도록 메논을 단둘이 만나지 못한 모윤숙은 메논 저택을 떠나 귀국한다.
5년 뒤 1954년 국제 펜(PEN)클럽 창설문제로 런던에 갔던 모윤숙은 후배 문인 조경희(趙敬姬,1918~2005)와 함께 인도에 들렀다. 왜 메논씨에게 연락하지 않느냐는 조경희의 물음에 모윤숙이 터졌다. ”부질없는 일이야“ 벽에 이마를 대고 흐느꼈다는 말이 전해진다.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72년 뉴델리, 국회의원이 된 62세 모윤숙은 인도 출장길에 메논을 찾았다. 관직에서 은퇴하여 인도-소련 협회장이 된 74세 메논, 더 다정해진 그 부인이 선물을 건네며 ”아예 인도에 와서 함께 살자“는 말을 꺼냈다. 메논도 거들었다. 말없이 희미한 미소를 짓는 모윤숙의 대답은 자수정 반지를 빼내 부인 손가락에 끼워준 것이었다. 메논은 1982년 84세로 죽었다. 1990년 모윤숙도 80세로 눈을 감았다.이승만의 ‘유엔외교-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준 남녀의 인연, 우연히 만난 인도 외교관이 한국의 여류시인에 끌려 ‘뜻밖의 외교드라마’를 연출하고 역사에서 사라져갔다. ‘연인 아닌 연인’ ‘우정을 넘은 우정’이 대한민국 건국사의 위험한 막간(幕間)을 드라마틱하게 구원해주었다.오늘을 사는 자유 한국인들에게 ‘감사’를 잊은 은인들이 너무 많지 않은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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