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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민주당에 피어난 ‘노란 싹’

오주한

‘노인네 살아봤자’ 패륜 일삼다 패가망신한 서초패왕

‘노인네 길어봤자’ 막말 일삼다 패가망신할 한국야당

 

서초패륜의 패륜행각 1

 

항우(項羽‧생몰연도 기원전 232~202)는 초한(楚漢)전쟁 시기 활동한 초나라 무장이다.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한 그의 본명은 항적(項籍)이나, 자(字)를 붙인 항우라는 이름으로 통칭된다.

 

항우는 고래(古來)로 동아시아에서 ‘힘’의 상징이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뒤덮는다)나 파부침주(破釜沈舟‧솥을 깨고 배를 가라앉힌다) 등 고사가 모두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허나 항우는 실상 무고한 포로 수십만을 생매장하고, 천자(天子)를 아무렇지 않은 듯 시해(弑害)하는 인격파탄자였다. 그의 사이코패스‧소시오패스적 행태는 ‘노인 비하‧학대’에서 절정 이뤘다. 결국 항우는 이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을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저질렀다가 자멸(自蔑)했다.

 

왕릉(王陵‧?~기원전 180)은 한나라 개국공신이다. 젊은 시절 협자(俠者)로 명성 떨친 그는 효심(孝心) 또한 깊은 인물이었다. 진승오광(陳勝吳廣)의 난 이후 독자세력을 이뤘지만 처음부터 한나라를 따른 건 아니었다.

 

왕릉은 자신을 형님처럼 모신 한왕(漢王) 즉 훗날의 한고조(漢高祖)의 간곡한 부탁에 결국 한의 기치를 받아들였다. 항우의 천자 시해도 그의 결심에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초의제(楚義帝)가 죽자 항우에 의해 분봉(分封)된 많은 제후왕(諸侯王)들이 항우에게 반기 들었다.

 

급해진 항우는 왕릉의 모친을 ‘잡아 가두고는’ 왕릉의 사신(使臣)이 오자 모친을 후히 대접하는 척하면서 회유하려 했다. 허나 모친은 항우의 가식(假飾)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터였다. 항우에게 귀순했다간 아들 목숨마저 위태롭다 여긴 모친은 사신에게 몰래 사람을 보내 이같이 말했다.

 

“내 아들놈에게 이 어미를 위해서라도 한왕을 잘 섬기라 전해주시오. 한왕은 훌륭한 어른이시니 어미 때문에 두 마음을 품어선 안 된다고 말이오. 이 늙은이는 죽음으로서 그대(사신)를 전송하겠소”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평생 자식걱정으로 낮밤 지새웠던 왕릉의 모친은 정말로 자진(自盡)하고 말았다.

 

여기까지만 해도 항우는 천하의 패륜아(悖倫兒)로 손가락질 받았을 터였는데 그는 아예 ‘인간임을 포기’했다. 어르신 시신을 정중히 묻어드려도 모자랄 판에, 마치 “어차피 살 날 얼마 안 남은 노인네인데 막 나가자”는 식으로 분풀이를 위해 모친 시신을 잔칫상 고기나 들어갈 법한 ‘가마솥’에 넣고 삶아버렸다.

 

두 눈에서 피눈물 흘리며 통곡한 왕릉은 끝까지 한왕을 따르면서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 항우를 무찌르는데 전력을 다했다. 얼마나 한에 진심이었냐면 한고조가 자신의 사후(死後) 뒤처리를 왕릉에게 맡길 정도였다. 이 믿기지 않는 왕릉 모자(母子)의 끔찍한 소식을 접한 대다수 천하백성, 심지어 초나라인들도 망연자실(茫然自失)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서초패륜의 패륜행각 2

 

그런데 항우는 정말로 반(反)사회적 인격장애자였다. 그는 왕릉의 모친에서 그치지 않고 한왕의 부친은 아예 ‘산 채로’ 펄펄 끓는 물에 던져 넣으려 했다.

 

유태공(劉太公‧기원전 270?~기원전 197)은 한왕의 아버지다. 실명은 알 수 없고 ‘유씨네 가장(家長)’이라는 의미의 유태공으로 불렸다는 기록만 있다. 본래 패현(沛縣) 풍읍(豊邑)이란 시골마을의 평범한 농부로서 가족들 먹여 살렸으나 아들이 황제가 되면서 훗날 태상황(太上皇)으로 모셔졌다.

 

천자의 부친이라는 어마어마한 권세를 누렸지만 성품은 대단히 소박한, 인정 넘치는 여느 어르신과 다름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고래등 같은 궁궐에 살면서도 풍읍 시절의 떠들썩했던 추억을 못 잊어, 한고조가 수도 장안(長安) 귀퉁이에 간소한 소(小)풍읍을 조성해줬을 정도였다. 그리운 고향사람들이 하나 둘 이곳으로 이사하자 그제야 유태공 얼굴엔 웃음꽃이 폈다고 한다.

 

부자(父子) 사이임에도 공사(公私)를 철저히 구분해 한 사회‧시대의 어른으로서의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한고조는 황제가 되고서도 풍읍 시절처럼 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유태공도 그런 아들 이름을 옛날처럼 스스럼없이 불렀다. 어느날 한 신하는 “황제는 만백성의 어버이이시니 태공께서도 예를 갖추심이 옳습니다”고 했다.

 

이에 유태공은 아들이 공무(公務)를 마치고 매일 저녁 자신의 거처에 올 때마다 문 앞에 서서 빗자루 들고 맞았다. 깜짝 놀란 한고조는 극구 말렸지만 유태공은 끝까지 예를 잃지 않았다. 한 아들의 아버지이자 동시에 한 임금의 백성인 자신이 앞장서서 규범 따르지 않는다면, 만백성이 국법(國法) 알기를 우습게 알게 되고 마침내 군신(君臣)의 법도(法道)가 무너져 온 사회가 혼란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유태공은 나아가 자신에게 고언(苦言)한 신하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마침내 백기 든 한고조는 해당 신하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동시에 아버지를 태상황으로 모셨다. 사석(私席)에서는 아버지와 아들로서 스스럼없이 정겹게 지냈음은 물론이다.

 

이런 날이 있기까지 유태공은 다사다난(多事多難)한 세월을 보냈다. 아들이 팔자에도 없는 패공(沛公)‧한왕 등 벼슬길에 올라 항우와 천지를 가를 듯한 전쟁에 돌입하자, 한왕 일가(一家)는 여러 군웅(群雄)‧도적들의 ‘1순위 표적’이 됐다. 항우도 하이에나 중 하나였다.

 

기원전 205년 팽성(彭城)에서의 전투에서 한왕의 56만 연합군을 ‘3만’ 병력만으로 무찌른 항우는 한왕 가족을 사로잡았다. 이후 유태공 등은 무려 약 2년 동안 포로 신세가 됐다. 비록 적이라 해도 책임 없는 그 일가를 억류하고 노예 취급하는 것만 해도 도의(道義)를 크게 거스르는 행위인데, 전쟁 말미 불리해진 항우는 금수(禽獸)임을 자처하듯 한왕 가족을 이용해 인질극을 벌이려 했다.

 

항우는 초‧한 양 측 도합 수십만 장졸(將卒)과 대치현장 일대 백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유태공을 끌어냈다. 그리고는 자신이 개망나니라고 천하에 ‘광고’라도 하듯 펄펄 끓는 물이 담긴 큰 솥에 유태공을 던져 넣으려 했다. 항우에게 유태공은 존중해야 할 어른이 아니라 그저 ‘살 날 얼마 안 남은 노인네’에 불과할 뿐이었다.

 

이 믿기지 않는 경악할 장면에 한군(漢軍)은 물론 초군(楚軍)도 크게 동요했다. 멀리 갈 것 없이 항우의 숙부인 항백(項伯)이 아연실색해 조카를 꾸짖고 앞장서서 뜯어말릴 정도였다. 여러 제장(諸將)들의 필사적 만류에 유태공은 가까스로 목숨 건졌지만, 이 사건이 훗날 사면초가(四面楚歌)에서의 항백 등 초군 집단탈영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게 중론이다.

 

서초패륜의 패륜행각 3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말처럼 항우는 아군을 대상으로도 방약무인(傍若無人)으로 미쳐 날뛰었다.

 

범증(范增‧기원전278?~기원전 204)은 조카 항우를 친아들처럼 키워준 항량(項梁) 때부터 초나라를 따른 인물이다. 노예 출신 진승이 칭제(稱帝)했다가 자멸한 원인을 꿰뚫어보고,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초나라 황실후손 의제를 황위(皇位)에 앉히자 제안한 게 범증이었다.

 

구심점 추대라는 건 원래 그에 걸맞은 권위‧명분이 수반돼야 한다. 오늘날에는 홍준표 대구시장과 같은 시대의 큰 획(劃)을 그은 고목(古木)이 구심점 적임자이듯이, 고대에는 황실적통(嫡統)이 구심점이 돼야 잡음이 없다.

 

그런데 진승은 “초나라를 재건하자”며 초나라 출신들을 규합해 장초(張楚)를 세운 뒤, 초 황실과는 광년단위로 거리가 먼 자신이 면류관(冕旒冠)을 냉큼 챙겨 만인이 혀를 내두르게 했다. 실제로 진승이 황제가 되자 그 수하들은 “저런 놈도 천자인데 나라고 안 될 거 뭐 있냐”며 줄반란에 착수했다. 그 정도로 범증은 항우에게 없어선 안 될, 식견(識見)과 통찰력을 갖춘 현자(賢者)였다.

 

그런데 서초패왕에 오른 항우는 왕릉의 모친, 유태공에게 보였던 ‘노란 싹’을 고희(古稀)의 범증에게 먼저 선보였다. 범증 보란 듯 의제를 살해한 것도 항우였으며, 범증 혈압 올리려는 듯 진(秦)나라 수도 함양(咸陽)을 불태운 것도 항우였고, 범증 쓰러지라는 듯 금의야행(錦衣夜行) 논리 들어 팽성을 초나라 수도로 삼은 것도 항우였으며, 폭발한 범증이 사표 내자 “멀리 안 나갑니다” 놀린 것도 항우였다.

 

결국 걸해골(乞骸骨)의 처절한 한마디 남긴 범증은 초나라 멸망을 예감하며 먼 길 떠나다가 쓸쓸이 사망했다. 범증이 사라지고 한나라의 샌드백 신세가 된 항우는 그제야 “아보(亞父‧범증)가 계셨더라면” 후회하며 입버릇처럼 되뇌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야당에 드리운 패륜王의 그림자

 

더불어민주당에서 인간적으로 해선 안 될 금기어(禁忌語)가 나왔다. 문제의 인사는 과거 어린 아들이 자신에게 들려줬던 말이라며 “우리들 미래가 훨씬 더 긴데 왜 ‘미래 짧은 분들’이 1대1 표결을 하느냐”고 했다. 또 “민주주의 국가에선 1인1표라 현실적 어려움이 있지만 (아들 주장은) 맞는 말”이라며 제 의견도 덧붙였다.

 

지난달 27일 통계청에 의하면 작년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905만명’이다. 65~74세는 전체 고령인구의 58.1%, 75~84세는 31.7%, 85세 이상은 10.2%였다고 한다.

 

한강의 기적(Miracle on the Han River)과 민주화 주역으로서, 비록 ‘잃어버린 5년’이 단숨에 국력(國力)을 속된 말로 말아먹긴 했지만,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후세(後世)에 물려주신 1000만 아버님‧어머님‧할아버님‧할머님들을 순식간에 ‘미래 짧은 분’으로 격하(格下)하고 그 지혜‧권리를 끓는 물에 던져 넣은 것이다.

 

아무리 젊은 사람이라 해도 언제고 반드시 늙기 마련이다. 문제의 인사도, 민주당 지도부도 언젠가는 반드시 고령층이 된다. 그 때 그들의 자식이 ‘미래 짧은 분’이라 손가락질하며 태연히 21세기판 고려장(高麗葬)에 나선다면, 그 때도 민주당 일부 인사들은 “맞는 말”이라 박수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아무리 권세가 급하다 해도 최소한의 인간성은 챙기길 바란다. 어쩌면 패륜아 항우에게 바랄 걸 바라야 할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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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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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NDEX
    2023.08.01

    보통선거제에 불만이 많은것은 저도 같습니다만 저렇게 대놓고 특정계층에 차별을 주장하는것은 매우 유쾌합니다. 그들은 충분히 광대의 소질이 있습니다

  • INDEX
    오주한
    작성자
    2023.08.01
    @INDEX 님에게 보내는 답글

    개그는 개그로 끝나야 하는데.. 공교롭게도 며칠 전에 한 때 크게 잘 나가다 지금은 구설수에 오른 개그맨 겸 시트콤배우 장xx씨가 서울 서초구 모처에 어깨들 데리고 먹는 걸 봤네요. 개그와 비정상의 경계가 모호해진 세상입니다.

  • ydol7707

    노인들에 대한 존경은 하나도 없는 민주당은 제 버릇 못 고치는 것 같습니다.

    다만 조심스러운 의견을 드리자면 노인 지하철 무임승차와 같이 미래세대에 부담을 줘서 세대갈등을 일으키는 노인 포퓰리즘등은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 ydol7707
    오주한
    작성자
    2023.08.03
    @ydol7707 님에게 보내는 답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의문마저 들 정도입니다.

  • 풀소유

    뿌린 대로 거두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