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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부적격 이방인에게 권력 준 대가

오주한

기적적 재기 요나라, 이방인王 의해 ‘한 방 와해’

對與 민심‧당심 우려, 이방인 앞 활화산처럼 분출

 

폐족(廢族)‧폐당(廢黨) 위기의 요나라

 

캐세이OOO은 홍콩의 세계적 항공사다. 그런데 이 회사 사명(社名)이 중세 동북‧중앙아시아의 한 이민족(異民族) 종족명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바로 거란(契丹)이다. 마르코 폴로(Marco Polo‧생몰연도 서기 1254~1324) 등 아시아를 방문한 유럽인들은 거란을 라틴어로 음차(音借)해 키탄(Kitan) 또는 키타이(Kitai)라고 불렀다. 캐세이(Cathay)는 이 키타이를 고(古)영어로 다시 음차한 것이라고 한다.

 

거란은 중세에 요하(遼河) 등 동북아시아에서 발원(發源)한 유목민족이다. 동호(東胡)‧선비(鮮卑) 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부락 간 이합집산(離合集散) 거듭하던 거란이 부흥한 건 요태조(遼太祖)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서기 872~926) 시절이다.

 

야율아보기의 후손들은 연운(燕雲) 16주(州)를 얻고서 대륙 침공로를 확보함에 따라, 마침내 화북(華北)‧만주(滿洲)‧막북(漠北) 일부 등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연운 16주를 제 손으로 갖다 바친 후진(後晉) 석경당(石敬瑭)은 오늘날까지도 중세시기 동아시아의 각 국 매국노들 중 하나로 손가락질 받고 있다.

 

훗날 여진족(女眞族)의 청(淸)나라 등을 제외한 거의 모든 비한족(非漢族) 제국이 그렇다시피, 요나라의 전성기도 길지 못했다. 주지(周知)하다시피 대륙은 좀 넓고 사람은 좀 많은 게 아니다. 대륙을 정복하거나 굴복시킨 타 민족들은 자기네 문화로 현지인들을 동화(同化)시키기는커녕, 현지 문화에 자신들이 동화되곤 했다. 거칠고 무거운 가죽옷 입고 마유주(馬乳酒) 등만 질리도록 먹던 유목민에게, 화려하고 가벼운 비단옷과 산해진미(山海珍味)는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만주벌판 누비던 호방(豪放)한 기상 잃은 거란은, 여진 등 주변민족에 대한 잔인한 농단까지 겹쳐, 비록 약 200년 간 요나라를 유지하긴 했지만, 결국 서기 1125년 여진‧송(宋)나라 협공 앞에 황제 천조제(天祚帝)가 사로잡히면서 끝장났다. 거란은 부락 단위로 갈가리 찢겨 학살당하거나 한족‧여진 등에 흡수된 끝에 상당수 멸족(滅族)됐다. 오늘날 만주‧내몽골(内蒙古) 등에 거주하는 소수민족 다우르족(達斡爾族‧2000년 기준 인구 약 13만명)이 거란의 후예로 추정되고 있다.

 

영웅 의해 재기(再起)하다

 

그런데 대륙‧만주 등에 잔류한 거란인들이 인종청소를 겪기 직전 서쪽으로 달아난 일부가 있었다. 요나라 황족(皇族)이었던 야율대석(耶律大石)과 그를 따른 무리였다. 당초 야율대석 등도 대륙에 고립된 채 목을 내어 줄 운명이었으나, 망국(亡國)을 사전에 예감하고 나아가 위구르족(Uyghurs)이 타림분지(Tarim Basin)행 길을 내어줌에 따라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도주할 수 있었다.

 

사실 요나라 망조(亡兆)는 공식멸망 수년 전부터 드러나던 상태였다. 마지막 황제 천조제는 잇따른 패전 끝에 내몽골로의 천도(遷都)를 단행했다. 이를 본 황족 야율순(耶律淳) 등은 1122년 북요(北遼)라는 나라를 세우고서 아직 황제가 멀쩡히 살아 있는 요나라 계승을 선언했다. 요나라와 북요는 마치 적을 상대하듯 대립했다.

 

정신없이 내달리면서 여러 민족과 싸워 때로는 이기고 때로는 쫓기던 거란 일족(一簇)은 몽골초원 서쪽에 터를 잡았다. 비록 맨몸으로 야반도주한 신세였으나 이들은 다시 200년 전 용맹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기라도 한듯 만인적(萬人敵)을 발휘했다. 실크로드(Silk Road) 장악한 일족은 무서운 기세로 세를 불려나가며 서요(西遼‧존속시기 1124~1218)를 건국했다.

 

엘도라도(El Dorado) 부럽지 않은 막대한 부(富)를 쌓고 좌충우돌 연전연승(連戰連勝)하던 이 신생국가 ‘카라키타이(Kara Khitai)’ 탄생소식은, 타클라마칸(Taklamakan)사막 넘던 유럽‧중동 상인들에 의해 동‧서양으로 퍼져나갔다.

 

일설에 의하면 ‘동방의 기독교왕국이 이슬람제국을 무찌르고 유럽을 구원할 것’이라는 내용의 프레스터 존(Prester John) 전설 기원(起源)이 서요라고 한다. 서요는 건국 직후 강력한 셀주크제국(Seljuk Empire) 군대를 격파한 바 있다. 서요는 뿐만 아니라 본국(本國) 무너뜨린 여진의 금(金)나라와도 전혀 밀리지 않는 힘겨루기를 벌였다.

 

부적격 인선으로 민심‧당심(黨心) 이반 자초

 

그러나 동‧서양에 강렬한 인상 남긴 강국(強國) 서요는 채 100년도 되지 않아 어이없이 멸망했다. 원인은 예나 지금이나 그 사례를 참으로 보기 힘든 이방인(異邦人), 특히 부적격자에 대한 최고권력 이양(移讓)이었다.

 

야율대석 손자인 말제(末帝) 야율직고로(耶律直魯古‧?~1213년)는 어느날 망명한 외국왕자를 공주와 혼인시켜 부마(駙馬)로 삼았다. 왕자는 나이만족(Naimans) 출신 쿠츨루크(Kuchluk‧?~1218)였다. 2004년작 드라마 칭기즈칸에선 아들 없던 야율직고로가 쿠츨루크를 후계자로 삼으려한 것으로 묘사됐다.

 

그런데 야율직고로를 태상황(太上皇)으로 밀어내고 1211년 옥좌(玉座)에 앉게 된 쿠츨루크는 기대에 크게 못 미친 모습을 보였다.

 

쿠츨루크는 우선 뚜렷한 국정(國政)철학 없이 오락가락했다. 당초 네스토리우스(Nestorius)파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서요 지도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지도층 종교로 개종(改宗)한 뒤, 나이만족뿐만 아니라 무슬림(Muslim) 등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도파에게도 무능한 정치를 펼쳤다. 자연히 중도층 인심(人心)은 크게 흉흉해졌다. 그렇다고 서요 지도층과 거란족이 모두 쌍수 들고 쿠츨루크를 지지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쿠츨루크 한 사람으로 인해 서요는 자멸(自蔑)했다. 국론(國論)은 쿠츨루크 한 사람에 대한 원망으로만 표출되는 게 아니라 서요 자체에 대한 실망으로 터져 나왔다. 대다수 백성들 사이에선 “서요는 이미 끝났다”는 분노가 솟구쳤다. 결국 백성들은 앞서 쿠츨루크 망명을 야기했던 몽골제국과의 건곤일척(乾坤一擲) 대결이 펼쳐져도 서요를 외면했다. 일부는 아예 제 손으로 성문을 열어 침략군을 맞아들였다.

 

근래 일각에서 대한민국 여당이 걷는 길과 서요가 걸은 길이 비슷한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길게 설명하진 않겠다. 과거 야당 측 인사로서 여당 압살에 앞장섰다는 논란의 ‘누군가’를 쿠츨루크에 대입(代入)해보면 우려 내용이 뭔지는 짐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직계정당 시절 한 때 폐당(廢黨) 위기 맞았던 여당은 지지난 대선 등에서 총대 맨 일부 영웅에 의해 재기(再起)할 수 있었다. 그런 당을 바라보는 오늘날 민심‧당심 눈길이 어떠한지는 ‘누군가’의 지지율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판국에 ‘누군가’는 바닷가 어딘가로 휴가 떠난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야당 수사는 매우 지지부진하다.

 

많은 이들이 어렵사리 지켜오고 키워온 여당이 총선이라는 건곤일척 승부를 앞두고 ‘누군가’에 의해 서요처럼,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건 아닌지 근심이 크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다. 정신 못 차리는 한, 쿠츨루크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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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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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NDEX
    2023.08.01

    크으 일잘하는 사람 팽개치고 재앙이 딱가리나 옹립하는 제 자리보전위해 똥오줌칠이나 하는 양아치들. 더럽고 산만한 현장에선 결코 좋은 작업이 나올수 없으며, 반대로 그만큼 일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작업자들이 모여있는 곳임을 증명합니다.

  • INDEX
    오주한
    작성자
    2023.08.01
    @INDEX 님에게 보내는 답글

    우리 현장이 정상화되리라 믿습니다.

  • 풀소유

    사실 여야 탄핵파들이 살기 위해 똘똘 뭉쳐 집권한 정부라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기대도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