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전 위해 자국민 벌레 보듯 했나” 논란의 A의원
절대왕정‧사략선장 공생 오버랩…오물 속히 치워야
‘남국(南國)의 정취’라는 말이 있다. 태평양‧대서양‧인도양‧카리브해의 여러 도서(島嶼) 등 금(金)빛 열대해안을 가진 휴양지의 모습을 일컫는 용어다. 그런데 오늘날의 대한민국처럼 정치권의 탐욕‧거짓이 난무했던 15~17세기 대항해시대(Age of Discovery)의 남국은 그렇지 못했다.
대항해시대의 문을 연 인물은 흔히 포르투갈의 왕자 엔히크(Henrique)로 알려진다. 그는 항해기술이 발전하자 후추 등 값비싼 향신료가 기다리는 인도행 항로 개척에 평생 매달렸다. 1434년 선장 질 아이네스(Gil Eanes)는 남하 한계선으로 여겨지던 아프리카 서부의 보자도르(Bojador) 곶을 돌아 생환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제노바(Genova) 공화국 출신인 에스파냐(스페인)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는 대서양으로 나아가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쿠바‧자메이카‧도미니카와 아메리카 대륙 등을 발견했다. 그는 목숨을 내다 버리다시피 한 항해 끝에 신대륙에 다다를 수 있었다.
범선(帆船)은 풍력을 동력으로 하기에 무풍(無風)지대에 들어서면 바람이 다시 불거나 빗물이 내리지 않는 이상 서서히 말라죽을 수밖에 없다. 대양을 항해하는 범선 배수량은 수백~수천톤이기에 두 팔로 노 저어 움직이기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반대로 거센 폭풍을 만난다 해도 수십미터는 우습게 넘는 파고(波高) 앞에 물고기 밥이 돼야 한다. 거대한 파도를 측면에서 받은 선박은 뒤집어지기 일쑤다. 범선시대 선원들의 삶은 2003년작 헐리웃 영화 ‘마스터 앤드 커맨더 : 위대한 정복자’에서 실감할 수 있다.
전설 같은 업적을 이룬 콜럼버스에게 질세라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는 희망봉(Cape of Good Hope)을 경유하는 항로를 발굴했다. 동국(同國)의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은 세계 최초로 지구를 일주했다.
네덜란드‧영국 등은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를 설립하고서 본격적인 동양과의 직접무역에 나섰다. 세계 최초 주식회사인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는 오늘날 미국의 상위 20개 기업 가치를 합한 수준의 초거대 다국적기업이었다. VOC는 증권거래소와 같은 근현대 경제시스템의 시발점(始發點) 중 하나가 됐다.
주요 유럽 각 국에는 막대한 금은이 쌓이기 시작했다. 대항해시대를 거치면서 의료지식 등도 비약적으로 축적됐다. 당시 선원들은 벽돌처럼 건조시킨 탓에 흉기로도 활용된 건빵, 소금에 절이다 못해 소금이 절반인 고깃덩어리를 죽처럼 끓여 선상(船上)에서 먹었다. 식자재 부패를 막기 위한 나름의 조치였지만 단 하나 채소섭취를 잊은 탓에 괴혈병(壞血病) 등에 시달려 줄초상이 났다.
영국의 군인‧탐험가였던 제임스 쿡(James Cook)은 비타민C 부족이 괴혈병 원인임을 깨닫고 선원들에게 절인 양배추를 강제로 먹였다. 거칠디 거친 뱃사람이었던 하급선원들은 “남자답지 못하게 채소나 먹으라니”라며 강력항의했다. 이에 쿡은 일부러 양배추 배급량을 하급선원들에겐 대폭 줄이고 장교(귀족)들에겐 대폭 늘렸다. 결국 하급선원들은 “귀족들이 맛있다며 먹는 걸 보니 귀한 게 틀림없다”며 장교층과의 동등한 양배추 배급량을 요구했다.
대항해시대에 유럽인들은 계층을 막론하고 천국의 시대가 오리라 믿었다. 그러나 이는 19세기 말~20세기 초의 벨 에포크(Belle Époque)처럼 신기루에 불과했다. 벨 에포크 시대의 유럽인들은 급격한 산업기술 발전 등을 지켜보며 이름 그대로 ‘좋은 시대’를 염원했다. 이러한 꿈은 수천만명의 사상자를 야기한 1차 세계대전 앞에 산산이 부서졌다.
1차 대전에서 지도층은 탁상공론을 일삼으며 제 권력욕‧물욕만 챙겼다. 그 사이 젊은이들은 철조망‧기관총‧참호라는 ‘악마의 삼형제’ 앞에 목숨 잃거나 사지가 찢겨나갔다. 착검한 채 기관총 앞으로 달려 나간 병사들은 철조망에 걸려 오도 가도 못한 채 총탄에 꿰뚫려 쓰러졌다. 1916년 7~11월 솜(Somme) 전투에서는 첫 날에만 약 6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포격, 화학무기 공격 등에 대비해 구축한 오물 가득한 참호에서는 참호족(鍼足病)이라는 끔찍한 질병에 감염돼 사지를 절단해야 했다.
대항해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지배층은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얻고 제해권(制海權)을 공고히 하기 위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눴다. 그리고는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수병(水兵)들을 확보해 전장으로 내보냈다.
근대 이전의 뱃사람들은 상상 이상의 중노동‧체벌에 내몰려야 했다. 조선시대에는 수병이 아예 칠반천인(七般賤人) 중 하나로 꼽혔다. 이는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막장인생이 아닌 이상 누구나 해군 복무를 기피했기에 병역자원 납치는 일상이었다. 기존 수병들은 아무 술집에나 난입한 뒤 만취한 상선선원‧해적, 심지어 민간인까지 두들겨 패 끌고 갔다고 한다. 지배층은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 등을 앞세워 이를 합리화했다.
그렇게 군복을 입은 이들은 태반이 사략선(私掠船) 등에서 대포‧총탄‧창칼에 목숨 잃었다. 주요 각 국은 아예 해적들에게 국왕의 이름으로 ‘정당히 모병(납치)·약탈할 권리’를 부여하던 터였다. 이 사략선이 바로 ‘약탈면허’를 취득한 해적선들이었다. 사략선장들은 아군에게까지 칼날을 겨누며 무차별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 상당수는 지배층에게 상납됐다.
사략선은 명목상 면허를 내 준 국가 측 상선은 건드리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먼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은 육지에선 알 도리가 없기에 동족에 대한 범죄가 공공연히 행해졌다.
영국 사략선장이었던 윌리엄 키드(William Kidd)는 1698년 프랑스 국기를 내 건 대형상선 하나를 나포했다. 그런데 이 선박 선장은 영국인이었고 상선 자체도 영국 동인도회사 중개를 통해 항해하던 중이었다. 그럼에도 키드는 약탈한 재물을 포기하지 않았다. 진보 성향의 휘그당(Whig Party)은 그런 키드의 최대 후원자였다. 마찬가지로 영국 사략선장이었던 프란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가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에게 바친 ‘사납금’은 수십만 파운드에 달했다. 이는 당시 영국 왕실의 1년 수입보다 많은 액수였다.
야당 출신 A의원의 코인(가상화폐) 논란이 돈세탁 의혹으로까지 번지고 있다. A의원이 국록(國祿)이 무색하게 업무시간까지 할애해가며 축적한 금(金) 빛 찬란한 가상화폐가 상전의 자금세탁 등에 동원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야당 승리로 벨 에포크와 같은 시대가 오리라 선전했던 A의원은 실은 상전에 대한 왕권신수설만을 외치며 그에 기생하는 사략선장처럼 자국민 고통에 고개 돌린 셈이 된다. 현재 가상화폐 앞에 통곡하는 국민은 한 둘이 아니다.
이러한 억장 무너지는 소리 앞에 국민은 남국 해안처럼 맑고 깨끗해야 할 정치권의 정취가 아닌 악취에 몸부림치고 있다. 약칭 ‘금남국’의 더러움에 치를 떨고 있다. A의원 논란이 한창이던 와중 실시된 한 여론조사(상세사항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서 야당에 대한 청년층 지지율이 급락했다는 결과가 나온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국민 모두가 더 늦기 전에 금전정치로 얼룩진 남국의 구더기들을 뒷간에 던져 넣어야 할 때다.
자기 재산을 어떻게 증식하던 상관은 없는데 참 자신이 가난하다고 기만하며 관련입법에 관여해가며 신나게 논건 용납이 안되는 것입니다. 타인을 강제하는 법을 다루는 정치인이 자신에게 엄격하지 않다면 그것은 반드시 지탄받아야합니다. 정말 기초적인 것입니다. 일을 잘하고 못하고는 그 뒤의 일이고 기만없는 청렴함은 정치인이 기본으로 가져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잭디
요즘 돌아가는 걸 보면 우리 선조님들께서 공직자 청렴을 첫째 덕목으로 내세우신 게 괜히 그런 게 아닌 듯 싶습니다. 마치 제3세계의 부정부패를 보는 것 같아 이젠 헛웃음만 나올 뿐입니다. 준엄한 국법의 쓴맛이 그립기만 합니다. 잭디(이건 저만의 고유의 한숨소리일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