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성매매 등의 피해를 입은 여성을 지원하고자 마련된 '해바라기센터'가 설치된 수탁병원 중 일부가 성폭력 피해자의 낙태(임신중지) 시술을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해바라기센터에서마저 임신중지 시술을 거부하는 경우가 발생하면서 피해 여성들이 점점 더 설 자리를 잃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지난 26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발표한 '성폭력 피해자 임신중단 지원 현황과 개선방안 연구' 자료에 따르면 해바라기센터의 수탁 병원 35곳 중 성폭력 피해자 임신중지 시술이 가능한 기관은 25개소(71.4%)에 그친 것으로 조사됐다.
시술이 불가능한 나머지 10개소는 주로 외부 병원으로 피해자를 연계해 임신중지 시술을 진행하도록 했다. 나머지 2개소는 '다른 해바라기센터로 연계한다', '피해자 지원이 가능한 다른 기관으로 연계한다'는 의견을 각각 냈다.
게다가 해바라기센터의 임신중지 의료 지원을 위해 '경찰신고'나 '고소'가 필수인 곳은 25곳 중 과반수 이상인 14곳(56%)으로 나타났다. 특히 성폭력 피해를 입은 사람이 청소년일 때 임신중지 의료 지원을 위해 보호자 동의가 필요하다고 응답한 기관은 23개소(92.0%)에 달했다. 폭력 피해 또는 임신 사실을 가족에게 알리기 어려운 청소년 피해자를 고려치 못한 조치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앞서 2019년 헌법재판소는 형법상 '낙태죄'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려 2021년부터 임신중지가 사실상 비범죄화된 상황이다.
그러나 이번 연구 참여자들은 2021년 비범죄화 이후로 큰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고 입을 모았다. 임신중지 시술에 대한 지침은 여전히 변함이 없고, 의료비 지원 절차도 그대로라는 의견이 많았다.
연구에 참여한 한 의료인은 "병원이 달라질 유인이 없다"며 "병원에서 체감하는 변화가 전혀 없고 정부도 불명확한 태도를 보여 기존의 관행을 유지하며 방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밝혔다.
해바라기센터 직원 역시 "법적으로 합법이 됐다고 하나 실질적으로 병원에선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정작 일반 여성으로서 선택할 수 있는 변화의 폭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는 임신중지 비범죄화에 대한 인식 개선 및 홍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본보와의 통화에서 의료진의 임신중지 시술 거부와 관련해 "의료진 본인이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는 심리적 불안감이 가장 큰 원인"이라며 "(의료진들은) 의료사고와 별개로 상대 남성에게 항의를 받거나, 병원에 들어오는 위협과 민원, 증인 출석 등 막연한 불안함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 연구위원은 "하지만 정부에선 비범죄화 판결 이후 '임신중지 시술한 의사는 확실히 처벌받지 않는다'는 얘기를 명확히 하지 않고 있다"며 "정부가 정확한 가이드라인을 주지 않아 의료진들의 불안감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또 그는 미성년자에 한해 '부모 동의'와 '경찰신고·고소'를 통해서만 이뤄지는 의료 지원과 관련해선 "현재 지원기관조차 위축이 된 상태"라며 "부모 동의 등 요건의 범위를 제한하지 않고 일단 긴급한 지원을 우선적으로 해야 한다는 지침이 빠르게 마련돼야 한다"고 의견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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