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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4‧10 대첩 ‘김종현과 기병대’ 탄생할까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을 담은 담론

3차 고려‧거란 전쟁의 ‘숨겨진 영웅’ 김종현

한강벨트 험지‧경합지의 ‘제2의 김종현’ 주목

 

KBS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이 요즘 한창 방영 중이다. 논란이 있긴 하지만 우리 한(韓)민족 역사에서 보기 드문 야전(野戰)에서의 대회전(大會戰), 그것도 거대 유목제국에 맞서 우리의 압승으로 끝난 귀주대첩(龜州大捷)을 심도 있게 다뤘다는 점에서 의의가 적지 않다.

 

귀주대첩은 많은 이가 알다시피 1018년부터 고려(高麗)‧거란(契丹) 사이에 발발한 3차 여요(麗遼)전쟁 피날레를 장식한 전투다. 거란은 반농반목(半農半牧)의 여진(女眞)과 달리 거의 100% 유목민족에 가까운 종족이었다. 머리카락을 앞뒤좌우만 남기고 정수리를 모조리 홀라당 밀어버리는 충격적 스타일의 남성 변발(辮髮)로도 유명하다.

 

앞서 두 차례나 고려를 침공했다가 큰 소득 없이 돌아간 거란족의 요나라는 3차 침공에 앞서 강동6주(江東六州)를 내놓으라고 재차 고려에 협박했다. 지금의 평안북도 지역인 강동6주는 고려에겐 요나라 침략을 막을 요충지였고 요나라에겐 고려 침공 교두보였다. 이 땅은 1차 여요전쟁 때 서희(徐熙)의 언변에 넘어간 멍청한 거란군 사령관 소손녕(蕭遜寧)에 의해 고려 차지가 된 상태였다.

 

똘마니의 뻘짓에 열 받은 요성종(遼聖宗) 야율융서(耶律隆緖)는 2차 여요전쟁 일으키고 친정(親征)해 고려 수도 개경(開京)을 불태워버렸으나 그 자신도 상당한 타격 입었다. 게다가 황제가 수도를 비워두고 무한정 해외원정 나설 수도 없었다.

 

야율융서는 고려 현종(顯宗)으로부터 친조(親朝‧알현) 약속만 받고 퇴각했다. 그런데 재차 발작병이 도져 “고려가 친조 약속 어겼으니 강동6주 내놔라” 부르짖으며 3차 여요전쟁 일으킨 것이었다. 송(宋)나라와의 본격적 대결에 앞서 불안한 배후를 안정시켜야한다는 현실적 이유도 발광 배경 중 하나였다.

 

야율융서의 명을 받은 소손녕의 형 소배압(蕭排押)은 약 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었다. 2차 여요전쟁(40만) 때보다 병력이 적은 이유, 즉 치중병(輜重兵)이 없는 이유는 안정된 보급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전원 전투병력(기병)이었기 때문이란 추측이 있다. 실제로 소배압은 흥화진(興化鎭)전투에서 패하자 기병 특유의 기동력 발휘해 미친 듯한 속도로 개경을 향해 남하(南下)했다.

 

거란족 말발굽 소리가 진동하자 고려는 무려 20만이라는 대군으로 맞섰다. 11세기 고려 인구(추정치 200만명 안팎)를 감안하면 말 그대로 싸울만한 남성이란 남성은 탈탈 털어 그러모은 셈이었다.

 

필자가 역사학자는 아니어서 정확할지는 모르겠으나, 철저히 중앙 조정만 양병권(養兵權)‧통수권(統帥權) 쥐는 조선(朝鮮)과 달리 고려는 봉건제(封建制)였기에 20만 모병이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 각지 호족(豪族)들은 평소에도 가산 털어 가병(家兵)을 길렀다. 입김이 셌기에 이들은 고려 조정의 파병 요구를 거부하거나 2차 여요전쟁 때처럼 몽진(蒙塵) 가는 임금을 노략질하거나 할 수 있었다. 허나 3차 여요전쟁에선 현종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던 듯하다.

 

20만 장정들과 싸운다는 건 아무리 천하의 전투민족이라 해도 부담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소배압의 병력 중엔 최정예 우피실군(右皮室軍)도 포함돼 있었다. 우피실군은 요 황제의 친위대(親衛隊)였다. 이 정예군단이 타격 입고 요나라 국방력이 약화될 시 기다리는 건 송나라의 북침(北侵)이었다.

 

때문에 흥화진에서 고배 마신 소배압은 광란의 속도로 개경에 들이닥쳤으나 그곳은 이미 철통방어 상태였다. 현종은 개경 일대 곡창(穀倉)을 텅텅 비우고 우물을 메우는 청야전술(淸野戰術)도 썼기에 소배압으로선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다. 지리멸렬 상태에서 후방에 두고 온 20만 고려 본대가 따라와 개경 수비군과 협공(挾攻) 펼치면 전멸은 불을 보듯 뻔했다.

 

전격전(電擊戰)은 이미 글렀다고 판단한 소배압은 신속히 퇴각하기 시작했다. 고려는 “이들을 고이 돌려보내주면 반드시 또 올 것이다” 판단하고서 섬멸을 결정했다. 문관(文官)임에도 고려군을 이끌었던 명장(名將) 강감찬(姜邯贊‧생몰연도 948~1031)은 소배압이 반드시 지날 수밖에 없는 귀주(지금의 평북 구성시)에 병력을 집결했다. 그리곤 수성(守城)이 아닌 들판에서의 ‘야전’을 준비했다.

 

양 군(軍)은 각자 배수진(背水陣)을 친 채 사생결단(死生決斷) 대결에 돌입했다. 유목군단 그것도 최정예 유목기병들의 명성은 어디 가지 않았다. 수적으로 우세함에도 고려군은 거란군을 쉽게 꺾지 못했다. 마치 작금의 정치권 여야 지도부 대결을 보듯 양 측은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했다.

 

이 때 승부에 쇄기를 박은 게 ‘숨겨진 영웅’ 김종현(金宗鉉‧?~?)이었다. 고려의 무관(武官)이었던 그는 소배압이 개경으로 향하자 당초 추격임무를 받아 1만여 기병대 이끌고 축격(逐擊)했다. 그런데 소배압이 말머리 틀어 신들린 기동력으로 다시 북진(北進)하자 이를 쫓다가 극적인 순간에 나타난 것이었다.

 

고려군은 완벽히 ‘망치와 모루’ 형국을 갖추게 됐다. 강감찬의 본대가 거란군을 막는 사이 김종현의 기병대가 노도(怒濤)처럼 밀고 들어와 거란군 뒤를 짓밟았다. 설상가상 풍향(風向)도 바뀌어 거란군 시야를 가렸다. 소배압으로선 뒤로는 하천이 있고 귀주성도 장애물로 작용했기에 우회기동도 명령할 수 없었다.

 

거란군은 거센 돌풍에 눈조차 뜰 수 없고, 강풍(强風) 타고 날아드는 고려군 화살비를 온 몸으로 받아내며, 우회기동‧도주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꼼짝없이 갇혀 학살됐다. 지휘관급도 부지기수(不知其數)로 죽어나갔다. 압록강을 넘은 거란군은 ‘수천’에 불과했다. 야율융서는 “내 소배압 저 놈의 얼굴가죽을 뜯어내버리겠다” 날뛸 정도로 분노했다. 그는 결국 추가 침공을 포기한 채 고려국왕 친조, 강동6주 반환 등 요구도 단념했다.

 

필자가 몇몇 예비후보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국민의힘에서 총선 경선 관련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고 한다. 19일 서울 강남3구의 한 예비후보는 “총선 여론조사가 수시로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같은 날 강원도의 한 예비후보는 “조만간 언론사 주관 여론조사가 예상된다”고 했다. 단수공천(전략공천) 지역도 이미 조금씩 면모가 드러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도 광주‧전남 등 일부 지역에서 경선 일정이 확정되고 있다고 한다. 배수진을 친 거대양당 지도부가 과연 어떠한 ‘4‧10 대첩’ 승부수를 던질지, 그리고 김종현 및 1만 기병대와 같은 역전(歷戰)의 용사가 경선 과정에서 과연 출현해 본선 전체 판도까지 뒤흔들어 놓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필자 직업상 공개적으로 언급할 순 없지만, 진보스럽다는 자칭 언론인 일부는 대놓고 특정 당‧인물 지지해도 아무 일도 없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한강벨트 험지‧경합지 등지에서 필자가 내심 눈여겨보는 인물들도 있다. 건승과 활약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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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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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샘숭세탁기

    과연 김종현의 기마대가 올 떄까지 버틸 강감찬과 강민첨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근데 그거랑 별도로 드라마 요즘 작가 관련으로 논란도 많고, 뜬금없이 낙마 나오고 재미가 뚝 떨어졌더라고요 쩝

  • SEORITAE

    당과 지역에 상관없이 뚜렷한 정책으로 도전하는 정치인들 많이 나왔으면 하네요

  • 오주한
    작성자
    2024.01.20

    연예가중계 늬우스 보니 원작자와 새 각본가 사이에 뭔가 알력이 있는 듯 하더군요. 나라 민족 역사 갖고 장난질은 안 될 줄 압니다만. 당사자들이 잘 풀리시길..

     

    그리고 제가 보기에 훌륭하신 정치인들이 아직 '옳은쪽에' 계신 줄 압니다. 2024년판 김종현,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