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초 이회창 정부는 모든 걸 가진 채 고공행진하고 있었다. 국회 권력도 완벽하게 쥐었고, 지방권력마저 완벽히 가져갔으며, 국민들의 지지까지 매우 탄탄했다. 그러나 그만큼 이회창 정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IMF 사태 극복과 민생 안정이었다. 국민들은 이를 믿고 이회창을 뽑은 것이었기에, 이회창 역시 이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강소국연방제 추진 과정에서 생긴 애로사항과 질질 끌리는 기업과의 갈등 중재 과정에서 국민들에게 실망을 주게 된다.
이회창이 직접 주도한 강소국연방제(전국을 인구 500만~1천만명 규모의 여러 권역으로 나눠 국방·외교를 제외한 모든 권한을 지방에 이양해 각 지방정부를 유럽의 강소국 수준으로 육성하며, 장기적으로는 지금의 중앙집권적 권력구조에서 연방제 수준의 분권국가 구조로 전환하자는 내용)는 처음에는 신선한 정책으로 평가받았지만 점차 여러 자잘한 문제점들이 지적받고 야당 새정치국민회의의 결사반대와 언론플레이, 그리고 제대로 된 사항을 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차질 등으로 강소국연방제는 미궁 속으로 빠져버렸고, 결국 이회창 대통령은 강소국연방제 계획을 전면 보류하며 사실상 첫번째 주요 공약을 포기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2차 청소년보호법 파동과 이현세 화백 복권 논란으로 인해 다시 한 번 문민정부의 유산이 재점화되었고, 이는 이회창 정부에게 다시 한 번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구속되게 생긴 김현철이 "이회창도 연루되어있다"라며 폭로를 해버리는 '김현철 폭로 사건'이 발생,
이회창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나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라며 해명에 나서 진화에 나섰지만,
이회창의 지지율은 연이은 사건사고로 다시금 88%에서 51%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이회창은 기업에 "나라를 망치기 싫다면 정부의 요구에 응하라"는 연설을 하며 기업을 전방위적으로 압박,
끝내 일부 기업들을 굴복시키는 성과도 거뒀으나, 기업 통폐합의 길은 매우 쉽지 않았고, 이러한 상황에서 새 국무총리로 임명된 김종필이
"기업 통폐합 작업을 축소하고 근본적인 경제체제를 기업과 함께 협력하여 돌파하겠다"라는 '김종필 선언'을 하여 결국 기업에 압박에 한 발짝 물러난 꼴이 되었다. 이는 이회창 특유의 대쪽같은 성격이 국정에서도 드러나 결국 국민들에게는 부정적인 시각만 심어주고 말았다.
한편 새정치국민회의의 상황은 심상치 않았다. 새정치국민회의에서는 김대중이 정계를 은퇴하고 구 동교동계가 당권을 잡고 있었는데,
이대로면 민주당계 정당의 명맥이 끊길 위기였기에 결국에는 새로운 인물이 필요했다. 결국 권노갑 비대위 체제가 종료되고 열린 새 대표 선거에서,
혜성같이 등장한 구원투수, 노무현이 다른 인지도가 없는 후보들을 제치고 기적적으로 대표로 선출된다.
민주당의 새 대표로 선출된 노무현은 취임하자마자 이회창 대통령과 만남을 가지며 비판적 협력의 뜻을 내비쳤으며,
인재영입에 박차를 가해 여러 '노무현계' 정치인들을 양산해 내었다. 이로 인해 민주당의 지지율은 일시적으로 33%까지 상승하기도 했다.
그렇게 정국이 변화하고, 이제 이회창 정부를 기다리는 건 새 지방선거와 크나큰 시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