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창이는 역시 문과를 가야겠군."
청주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였다. 수학 선생님은 내가 수학문제 푸는 것을 내려다보시면서 종종 그런 말씀을 하셨다. 그 무렵부터 나는 문과 기질을 분명하게 보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국어나 영어 같은
어학과목을 좋아하였고, 작문시간을 좋아하였다.
어렸던 나의 마음에는 그 말씀이 참 섭섭하게 들렸다. 나는 모든 과목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특별히 수학을 못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던 터였으니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말씀은 내게
일종의 최면 같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자꾸 수학을 싫어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수학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나는 몇 차례의 작은 시험들을 망쳤
다.
학기말 시험에서 나는 수학과목의 명예회복을 다짐했다. 그리고 나름대로 준비를 했다.
그런데 무슨 마가 씌웠는지 그 시험마저 망쳐버리고 말았다. 너무 긴장한 까닭인지 대수시험에서 말도
안되는 실수들을 저지른 것이다. 점수는 60점 만점에 20점(100점 만점에 40점 정도)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만 모든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자신감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우리집에서는 모든 죄악들 중에서도 으뜸가는 죄악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아버지꼐 물려주신 가훈은 바로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고 했다. 정신을 하나로 모은
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느냐는 뜻이다. 아버지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식들에게 그
말씀을 들려주시며 모든 일의 성패는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강조하시곤 했다.
그런데 나는 그 소중한 가훈인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집에서는 내 기분과 전혀 다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주 즐거운 모습으로 부엌과 마당
을 오가며 떡을 찌고 계셨다. 형님과 내가 그날 시험을 마쳤으니 그 동안의 수고를 치하할 겸 모처럼
떡을 만들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집안에는 달콤하고 고소한 향기가 가득했다.
밥해먹을 쌀도 모자라서 매끼니 끙끙거리던 시절이었으니 그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형님은 나를 보자 더 즐거운 목소리로 소리쳐 물었다.
"야, 난 오늘 시험 아주 잘 봤어. 넌 어땠니?"
나는 이제 지옥하고도 밑바닥을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곳은 걱정거리라곤 하나도 없는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천국이었고, 나는 대수시험에서 20점밖에 맞지 못하고, 게다가 자신감까지 상실해버린 천하의
불행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가출을 결심했다. 교복도 갈아입지 않은 채, 어머니께는 이웃집에 잠깐 다녀오겠노라고 말씀드
리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는 터벅터벅 조치원역을 향해서 걷기 시작했다.
집을 나서면서 이미 생각을 정했는지 아니면 조치원역을 향하면서 그렇게 정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 내 능력으로는 부모님의 기대를 따라갈 수 없다.
그렇다면 내게 남은 길은 한가지뿐이다. 화물칸을 타고라도 서울로 올라가는 것이다. 혼자서 돈을
벌어 고학이라도 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보는 것이다. 성공해서 새 삶은 찾게 된다면
다시 부모님을 찾아뵐 것이다. 아니, 꼭 그렇게 할 것이다....'
청주역에는 서울로 가는 기차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조치원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조치원까지는 삼
십 리 남짓의 거리였는데, 한겨울에 삼십 리씩 이나 걷는 것은 참 힘든 일이었다. 온몸이 빳빳하게
얼어붙어 왔다. 교복 위에 외투라도 하나 걸치고 나오는 건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청주를 빠져나갈 즈음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조치원에 들어설 즈음에는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어둠이 깔렸다.
어느 언저리에선가 길가의 초가집들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오르고 있었다. 저녁밥을 짓는 연기였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저집에 사는 아이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학교를 다니지
도 않을 테니, 시험 따위는 치르지 않아도 되고, 밭이나 갈고 소나 키우다가 때가 되면 가족들과 밥
먹고 그리고 맘 편히 푹 잘 수 있으니.
밤이 되니까 몸이 한결 더 추웠고 배도 고팠다. 조치원역에 도착한 나는 우선 기차시간을 확인해 보
았다. 서울까지 가는 기차는 다음날 아침에나 있었다. 나는 그 역사에서 밤을 세워야 했다. 대합실에는 벌써 몇 명의 부랑인들이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가마니나 거적 같은 것을 깔고 덮고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나는 엿을 샀다. 그때 내 수중에는 약간의 돈이 있었는데 엿값을 치르고 나니
얼마 안 남았다. 나는 엿을 아주 조금만 오래도록 빨아서 먹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주머니 깊숙이 간직
했다. 앞으로 당분간은 그 엿이 유일한 식량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합실에서의 밤은 참으로 더디게 흘러갔다. 시계는 도무지 움직이지 않았고, 몸은 차갑게 마비되어 갔다. 혹시 어딘가에 가마니 따위가 있을까 찾아보았지만 헛수고였다. 그러다가 나는 역무원실 안의
빨갛게 달궈진 조개탄 난로를 보았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슬그머니 그곳으로 들어가 난로 곁에 쪼그
리고 앉아 보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발견한 역무원에게 호통을 받으며 내쫓기고 말았다.
"공부하기 싫어서 도망나온 놈이구만."
역무원의 그 한마디가 가슴에 아프게 와 박혔다. 세상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렵고 냉정한 곳이로
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과 학교를 오가던 동안 누구로부터도 그런 냉대를 받은 적은 없었다.
이제 내 인생은 저기 거적을 깔고 누운 부랑인들보다도 못한 것이 되는구나 싶었다.
다시 얼마 동안을 대합실의 차가운 의자에서 떨고 있었을까.
지나가던 헌병 두 사람이 내게 왜 그곳에 있는지 물었다. 나는 내일 새벽 서울행 첫차를 타야 한다고
대답했다. 행여 그들이 의심할까봐 여차여차한 구실까지 만들어 붙였다. 그랬더니 그들은 나를 조금
전의 역무실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역무원에게 말해 나를 난롯가에 앉게 했다. 역무원은 의자까지
끌어다주며 나를 난로 앞에 앉혔다.
나는 눈물이 나려 했다. 박대를 당하며 몇 시간을 떨다가 그런 대접을 받고 보니 가슴에서 무언가가
북받쳐오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이제 모든 일은 시작일 뿐이라고 다짐했다.
밤 11시가 넘은 시각, 역무원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역무원이 나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여기 있습니다. 그렇잖아도 이상해서 제가 난롯가에 앉혀 두었습니다..."
전화를 끊은 다음부터 그의 태도는 백팔십도 달라졌다. 그는 아버지가 오실 거라면서 뜨거운 보리차를
주기도 하고 난로 앞으로 더 가까이 오라고 의자를 당기기도 했다.
내가 사라진 동안 청주의 집에서는 난리가 났었던 모양이다. 이웃집에 잠깐 다녀오겠다고 나간 아이가
자정이 가깝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아버지께서는 경찰에까지 연락해서 찾아달라고 한 것이었다.
그 무렵 청주에는 대절택시가 겨우 두 대 있었다. 하이야 택시라고 불렀는데, 아버지는 그 택시를 타고 달려오셨다. 역사로 들어서는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머쓱하게 굳어졌다. 아버지는 자상하기보다는
단호하고 엄격하신 편이었기에 이제부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역무원실로 들어선 아버지는 단번에 나를 들어올려 가슴에 안으셨다. 그리고는 아무 말씀도
안하셨다. 아버지 가슴이 그처럼 따뜻한 곳이었음을 나는 그날 처음 깨달았다. 160센티미터가 못 되는
작은 체구의 아버지셨지만 아들을 안은 가슴만큼은 누구보다도 넓고 크고 단단했다.
택시에 올라탄 다음에도 아버지는 나를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으셨다.
나중에야 이렇게 한 말씀을 하셨다.
"어때? 나와 보니까 세상이 얼마나 무정한지 알겠지?"
나는 더 이상 아무런 말씀도 드릴 수 없었다.
역에서 당한 일들을 아시는 것도 아닐 텐데 아버지는 어떻게 단박에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아버지는 원래 시골의 평범한 농가 출신이셨다. 시골에서 파묻혀 살자면 크게 부족하지는 않은 살림
이었겠지만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가 고생하는 길을 택하셨다. 그래서 제일고보와 경성법전을 고학하
다시피 마치셨다. 그런 고생을 겪은 까닭에 아버지는 가출한 아들의 가슴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계셨
던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오래도록 아버지의 가슴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내 자식은
물론 다른 누구에게도, 그처럼 크고 넓고 따뜻한 가슴으로 기억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감동이네
이회창 총재님이 진짜 대통령감이신데 이인제 진짜..
모든 부모님은 훌륭한 존재이십니다
감동이네
이회창 총재님이 진짜 대통령감이신데 이인제 진짜..
저도 예전에 자유선진당에 있을 때 모셔봤지만
정말 한국 정치사에 비운의 인물입니다.
대통령 하시고도 남을 분인데 안타깝습니다.
쩐다..
이회창 저 분이 대통령 되시면 대한민국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갖추실 분이었는데, 그 아들 문제 때문에......
충청권에서 가장 화려했던 정치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 께서도 충청권에서 화려한 정치인이었지만
울 할머니 이회창 떨어지고 밥도 못드시고 우시고
했던 기억이..
지금에서야 이해가 된다~
넘 아까운 인물..ㅠ
울 홍카는 꼭 대통령 되셔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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