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의 담론
의혹 사실이라면 철 들고 모범이 되길
사카이 타다츠구(酒井忠次‧주정충차‧생몰연도 서기 1527~1596)는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활동한 도쿠가와 사천왕(徳川四天王)의 일원이다. 네 명의 사천왕 중에서 최고참이다.
전국시대 연구의 권위자 쿠와다 타다치카(桑田忠勝)가 감수해 1978년 출간된 ‘전국무장100화(戰國武將100話)’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덕천가강)는 1572년의 미카다가하라(三方原)전투에서 다케다 신겐(武田信玄‧무전신현)에게 무참히 패배했다. 당시 이에야스는 병력의 양적‧질적 모두에서 신겐에게 열세였다. 침공해들어온 신겐의 군대는 2만7천이었던 반면 이에야스는 1만1천에 그쳤다. 게다가 신겐의 코슈군단(甲州軍團) 기병은 당대 무적이었다. 풍림화산(風林火山)의 신겐 또한 용병술(用兵術)에 능했다.
싸움에서 박살난 이에야스는 도주 과정에서 ‘변’을 지릴 정도로 공포에 사로잡혔다. 겨우 안전지대에 도착해서 부하들이 “이게 뭔가요?” 묻자 이에야스는 그제야 제정신이 들어 “응, 된장이야” 둘러댔다. 그러나 아무리 태연한 척 해도 이미 군중(軍中)에 퍼진 두려움은 쉽게 잠재워지지 않았다. 이에야스 측은 신겐의 시옷 자만 들어도 울던 아이가 울음 뚝 그쳤다.
그런데 신겐 사후(死後)인 1575년, 이번엔 신겐의 아들인 다케다 카츠요리(武田勝頼‧무전승뢰)와 이에야스가 맞붙게 됐다. 비록 가이의 호랑이(甲斐の虎)는 가고 없고 머릿수도 이에야스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직전신장) 연합군 측이 많다곤 하나 막강한 코슈군단은 여전히 건재했다. 자연히 카츠요리와의 나가시노(長篠)전투를 앞두고 이에야스 측 분위기는 상당히 어두웠다. 이에야스가 마상(馬上)에서 또 거사를 치르게 되지 말란 법 없었다.
전투 전 날 이에야스의 막사. 이에야스는 물론 사천왕 이하 모든 장수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이에야스가 엄격근엄진지한 표정으로 타다츠구를 가리키며 외쳤다. “이보시게 자네, 새우잡이 춤을 추어주지 않겠는가?!”
머리 맞대고 전략을 짜내거나 지금이라도 달아나도 모자랄 판에 뜬금없이 새우통구이 춤을 추라는 명이 떨어지니 제장(諸將)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런데 더 큰 반전. “옛 썰” 외친 타다츠구는 벌떡 일어나 회의장 한가운데로 내달리더니 정말로 먹음직한 한 마리 대하가 되어 팔딱팔딱 날뛰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연실색했던 제장들은 명색이 사천왕 최선임이라는 타다츠구의 신나는 관광버스 막춤에 하나 둘 폭소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막사 안은 온통 웃음바다가 됐고 바닥을 치던 사기도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제장들은 “그래, 맏고참께서 저렇게 체면 구기면서까지 우리 기 살려주려 하시는데 내일 한 번 죽기 살기로 싸워보자. 까짓 거 우리가 이길 수도 있잖아?” 다짐했다.
효과는 컸다. 이에야스 측은 약간의 미동(微動)도 물러섬도 없이 철통같은 태세로 전투에 임했다. 휘하 철포(鐵砲‧조총)부대 총구는 일제히 불을 뿜어 카츠요리 측을 쓸어버렸다. 카츠요리는 이십사장(二十四將) 중 상당수를 잃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전투는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고 카츠요리는 수백 명의 하타모토(旗本‧호위무사) 보호를 받으며 겨우 목숨만 건져 퇴각했다. 패전 후유증을 이기지 못한 다케다 가문은 1582년 멸문(滅門) 당한다.
국민의힘 모 인사가 배현진 의원에 대한 모함 논란에 휩싸였다. 필자가 자초지종을 정확히 알 순 없다. 그러나 배 의원의 녹취록 공개 앞에 여론은 모 인사의 모함 의혹이 사실이라는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다. 의혹이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모 인사에게 말하고 싶다. 중진 대접을 받고 싶다면 그에 맞게 모범이 되길. 얼른 철 드시길.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