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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란의 역사 : 아케메네스 왕조를 중심으로(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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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로렌츠

칼럼 https://theyouthdream.com/free/4316701

 

16. 비교조차 되지 않는 양국간의 국력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 제국 간의 격차는 엄청났는데요. 인구수, 군대의 숫자, 경제 규모, 국토의 크기로 봐도 마케도니아는 페르시아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당시 마케도니아가 정복한 그리스 본토와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본토의 인구를 합하면 약 450만 정도였습니다만, 마케도니아 본토의 인구는 약 60~90만 정도였으며 나머지 지역을 효과적으로 동화시키지는 못했기에 그리스 전역의 인구를 효과적으로 동원하지 못했습니다.(추가적으로 당시 지중해 전역과 흑해에 존재하던 그리스 문화권의 인구는 약 720만으로 추산됩니다.)

 

 

이에 반해 당시 페르시아 제국은 기원전 500년으로부터 160여년 이상의 시간이 흘러 인구가 증가하였을 텐데, 아마 3500만에서 4000만 정도를 헤아렸을 것입니다. 마케도니아 본토 인구와 수십배의 차이였던 것이죠. 객관적으로 보면 알렉산드로스는 원정에 실패하는 것이 당연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여신은 알렉산드로스의 손을 들어 주었고, 결국 제국은 멸망에 이르지요.

 

 

17. 서쪽에서 불어오는 폭풍: 알렉산드로스의 침입과 멸망 

 

 

알렉산드로스는 재정적인 문제와 보급의 문제 때문에 빠르게 한 판 승부를 봐서 승리를 거머쥐어야 하는 상황이 강요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신속하게 전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페르시아가 싸워 주지 않으면 무용지물이었는데요. 당시 페르시아의 장군 멤논은 청야전술을 구사하여 적들을 고사시킨다는 작전을 입안했으나, 다른 장군들이 이를 반대하였습니다. 멤논의 출신은 그리스계였고, 그가 이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사면된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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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니코스 강 전투>

 

 

그리하여 그라니코스 강에서 전투가 발발하였고, 알랙산드로스는 죽을 뻔 하지만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원정 내내 왕을 상징하는 황금 갑옷을 입고 선두에 서서 적과 싸웠는데요.그 때문인지 사경을 헤맨 적이 많았습니다.) 전투에서의 승리로 얻은 전리품들은 알렉산드로스의 훌륭한 자금줄이 되어주어서 그가 파산하는 사태를 막아 주었습니다. 그라니코스의 패배 이후 총사령관이 된 멤논은 청야전술의 시행과,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사주하여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마케도니아에 전쟁을 걸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멤논은 병사하였으며,(알렉산드로스가 독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됨)마케도니아는 본토를 지키고 있던 안티파트로스가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제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이수스 전투 이후 메갈로폴리스 전투 BC 331) 

 

 

알렉산드로스가 수없이 전투를 치르던 와중, 다리우스 3세는 대군을 이끌고 이수스로 향하는데요.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가 시리아 방비를 튼튼히 할 것이라고 예상해 남하했으나, 다리우스는 아마누스 산으로 북상하여 알렉산드로스의 주둔지에 빈집털이를 성공시켜서 알렉산드로스가 남겨둔 부상병들을 처형하기에 이르고 그들 일부를 알렉산드로스의 진영에 보냄으로써 알렉산드로스 측에서 페르시아 군의 엄청난 규모를 듣고 병사들의 공포를 유발시키고 알렉산드로스의 보급을 일체 끊어버리게 되는데요.

알렉산드로스의 전략적 패배였으며 다리우스의 전략적 승리였습니다. 다리우스는 이제 알렉산드로스를 격파하는 일만 남은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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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스 전투 전개>

 

 

다리우스가 보급을 끊고 알렉산드로스의 목줄을 쥐어 버리자 알렉산드로스로서는 재빠르게 다리우스를 패배시키지 못한다면 여태까지의 성과는 물론이고 모든 것들을 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다시 북상하여 다리우스와 한 판 승부를 벌이게 되는데, 그게 이수스 전투입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마도 10만이 넘었을 대군을 상대로 적의 수장인 다리우스를 노리는 전략을 성공시켜 다리우스를 도망치게 만들어 전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이수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다리우스의 막사에서 엄청난 양의 보물을 노획하는데요. 그동안 아슬아슬하게 지급하던 군인들의 봉급 문제와 보급 문제를 한번에 해결해 버리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야말로 잭팟을 터트린 것이었죠.

 

 

 

 

그 후 알렉산드로스는 페니키아의 유명한 도시 티레의 공성전에 돌입하는데, 그는 항복을 제의했으나 티레 측에서 거절했고 결국 공성전이 벌어졌습니다. 티레 공성전이 진행되던 중, 다리우스의 편지가 알렉산드로스에게 도달하게 되는데요. 그 내용은 유프라테스 강 서쪽의 땅을 모두 할양하고 금 1만 탈렌트를 지급하며 자신의 딸과 맺어주는 것을 조건으로 자신의 가족을 돌려보내 주고 휴전을 맺자고 제안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단칼에 거절했고 여기서 파르메니온과 알렉산드로스의 유명한 대화가 나오죠. 

 

 

파르메니온 : "제가 알렉산드로스였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알렉산드로스 : "내가 파르메니온이라면 그랬겠지."

 

 

알렉산드로스는 외려 다리우스에게 자신에게 와 항복할 것을 주문하고 설사 다리우스가 도망가더라도 자신은 끝까지 추격할 것이라는 말도 안되는 답장을 보내게 됩니다. 

 

 

알렉산드로스 : "만일 당신이 나를 찾아와 항복을 한다면 예의를 갖추어 대할 것이오. 그러나 그러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찾아 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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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레 공성전>

 

 

티레 공성전은 어떻게 진행됐을까요? 티레는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에 지어진 도시라서 육군으로 공성전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티레와 육지를 잇는 부두를 건설하였고, 정복지의 해군을 동원해 배에 공성병기를 실어 도시를 포격했으며 티레를 포위하여 육해군의 양동 작전으로 티레를 함락시키기에 이르죠. 잔혹한 학살이 시행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노예로 팔렸습니다. 

 

 

티레에서의 승리 후 알렉산드로스는 가자 역시 포위해서 함락시켰고, 이집트에 무혈입성하게 됩니다. 이집트에서 그는 파라오로 즉위하고, 그가 아몬 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역시 이집트에 세우게 됩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가 정복한 영토 곳곳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들을 지었는데, 제국 전역에 약 70여 개의 도시들을 건설하였다고 하며,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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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우가멜라 전투>

 

 

알렉산드로스가 한창 페르시아 제국 서부를 경략하고 있던 와중 다리우스는 다시 알렉산드로스와의 일전을 준비하여 다시 싸우고자 하였고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는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 평원에서 맞붙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약 10여만의 군대를 상대로 또다시 승리해 내는데 성공하는데요. 다리우스를 노려 적을 붕괴시킨다는 전략을 이수스 때처럼 다시 성공시켜서 그것을 가능케 했습니다. 하지만 가우가멜라 전투는 조금만 삐끗했어도 마케도니아의 패배로 직결되었을 정도로 페르시아 군이 분전한 전투이기도 합니다. 파르메니온이 이끄는 부대가 페르시아 기병의 맹공에 붕괴될뻔 했으니까요. 이민족 기병대가 약탈에 눈이 멀지 않고 그대로 마케도니아의 후방을 공격했더라면 가우가멜라 전투의 패배는 알렉산드로스가 맛보아야 했겠죠.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다리우스는 다시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다리우스에게 시간 자체를 주지 않고 맹렬하게 추격하는데요. 왜냐하면 알렉산드로스가 적의 10만 대군(기록상으로는 수십만에서 백만인)을 두 번이나 궤멸시켰을지언정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는 매우 광대해서 가우가멜라 전투 직후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정복했을 때도 페르시아 제국 영토의 절반 정도밖에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리우스에게는 아직도 중요한 수도들인 수사, 엑바타나, 파사르가다에, 제 1수도 페르세폴리스가 그의 영역에 있었고, 국고에는 많은 황금이 비축되어 있었습니다. 즉, 해 볼만 했던 것이죠.

 

 

다리우스에게 시간이 다시 주어진다면 국고에 있는 자금을 사용해 다시금 군세를 모아 재기할 수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런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다리우스를 맹렬하게 추격해서 병력을 모을 시간 자체를 일체 허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차례차례 페르시아의 수도들인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파사르가다에, 엑바타나를 모두 정복하였고 이 과정에서 도시들이 약탈되었습니다. 수사에서는 5만 탈렌트의 은괴가 약탈되었고, 3만 탈렌트(1075톤)의 금이 약탈되었습니다. 제 1수도인 페르세폴리스는 아예 불태워져 오늘날 그 잔해만 남아 있으며 약탈 과정에서 2만 마리의 노새와 5천 마리의 낙타가 12만 탈렌트(4300톤)의 금을 약탈하는 데 동원되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고 약탈한 황금의 총량은 18만 탈렌트인데, 이를 현대의 도량형으로 환산하면 6000여 톤이 넘어가는 수치입니다.(기록이 진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엄청난 양의 금이 약탈된 것은 사실이겠죠.) 막대한 부를 차지했기 때문에 데마라토스는 눈물을 흘리며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오늘이 되기 전에 죽은 그리스인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다리우스의 왕좌에 앉는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을 모른 채 죽어 버렸구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전집 2(완역본) 중에서》

 

 

알렉산드로스의 맹렬한 추격을 받던 다리우스는 기원전 330년 휘하 사트라프인 베수스에게 살해당했고 마지막 황제의 죽음으로써 아케메네스 왕조는 멸망했습니다. 베수스의 다리우스 살해는 알렉산드로스를 분노케 하였는데, 알렉산드로스의 목표는 시종일관 다리우스를 생포하여 그에게서 정식으로 선양을 받아 페르시아 제국의 정식 황제가 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베수스는 스스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5세라고 주장하였지만, 그 역시 협력자들의 배신으로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겨졌고 그는 처형되었습니다. 다리우스의 장례는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알렉산드로스는 이로써 선황이신 다리우스의 원수를 갚았노라며 끝까지 다리우스를 정치적으로 이용해먹죠. 그 이후에도 아직 정복하지 못한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들을 정복하러 알렉산드로스는 원정을 지속합니다.

 

 

18. 아케메네스 왕조 멸망 이후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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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르다리야 강에서의 전투 알렉산드로스는 유목민들을 효과적으로 섬멸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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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다스페스 강 전투 이 전투에서 파우라바의 왕 포루스를 사로잡는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나머지 영토들을 정복하는데 성공했고, 그 과정에서 그에게 쇄도해 오는 군사적 도전들을 전부 격파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는 유목민들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하였는데, 오늘날의 시르다리야 강가에서 벌어진 스키타이와의 교전에서 유목민 특유의 포위 전략을 부숴버리며 승리합니다. 요컨대 유목민들이 화살을 쏘며 도망가다가 아군 부대를 포위하는 순간에 맞춰서 미리 매복시켜 두었던 아군을 다시 투입해 적을 역포위하는 식으로 섬멸하는 데 성공하죠. 별개로 원정 도중에 록사나라는 여성에게 반해 그녀와 결혼하기도 하고요. 이후 알렉산드로스는 인더스 강 유역을 평정하였고, 그를 막아서는 파우라바의 포루스 왕 역시 히다스페스 강 전투에서 그의 코끼리 부대를 격파하며 승리를 얻어냅니다. 그는 인더스 강을 넘어 동쪽의 갠지스 강에 위치한 마가다국의 난다 왕조마저 쳐서 멸망시키고자 하였지만, 20만의 보병, 8만의 기병, 8천 대의 전차와 6천의 코끼리를 보유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부하들은 결사반대를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인도의 풍토병과 병사들의 불만과 사기 문제들이 얽히고설켜, 알렉산드로스는 회군을 결정하게 됩니다.

 

 

회군해서 바빌론으로 돌아온 알렉산드로스는 부정축재를 저지른 관료들을 처형하고 원대한 원정 계획을 세우는데요. 천여척의 대함대를 제작하고, 아라비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서지중해 전체를 정복하며, 아시아 사람들을 유럽으로, 유럽 사람들을 아시아로 이주시켜서 서로간의 대화합을 계획했습니다. 또한 아버지 필리포스와 친구이자 동성 연인인(고대 그리스 시대는 동성애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헤파이스티온을 추모하는 기념비를 지을 것이었으며 특히 아버지 필리포스의 무덤은 이집트의 대피라미드와 맞먹는 규모로 만들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의 여러 곳에 거대한 신전을 세울 생각이었고, 트로이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아테나 신전을 세울 계획이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가 오래 살아서 위의 계획들을 실현하는데 성공했더라면 그의 제국이 대서양에서 인도양까지의 권역을 하나의 정권 아래에 통합시키는 과제를 완수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숨을 거두게 됩니다. 그의 나이 서른 세 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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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의 놀라운 정복속도와 그의 사망당시 제국의 영토>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그의 장군들은 제국을 갈라먹어 내전을 일으켰고, 가히 고대판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그 절정을 알리는 전투는 기원전 301년에 벌어진 입소스 전투인데, 여기서 안티고노스군과 그에 맞서 대항하는 연합군은 각각 8만 대군을 소집하여 한 전장에서 16만의 군세가 서로 붙게 됩니다. 안티고노스군은 패배하였고 안티고노스 역시 전사하였습니다. 이 전투 이후 셀레우코스가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죠. 이후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은 크게 세 국가로 분열되었는데 : 

 

셀레우코스 왕조(아나톨리아,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이란 고원, 옥수스 강 유역)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이집트와 키레네) 

 

안티고노스 왕조(마케도니아) 

 

위의 분열된 국가들이 그것이고, 그 외에도 온갖 소국들이 존재하여 혼란한 오리엔트 지역에서 살아남기 급급했습니다. 전란의 시대가 길어지니 일반 백성들의 삶 역시 피폐해졌으며, 수많은 농토와 관개시설이 파괴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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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소스 전투 이후 마케도니아와 아나톨리아는 리시마코스가, 메소포타미아, 이란, 중앙아시아는 셀레우코스가,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가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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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81년 코루페디온 전투에서 승리한 셀레우코스는 마케도니아와 아나톨리아를 차지하지만, 암살당했다>

 

 

 

그뿐입니까? 이미 알렉산드로스 대왕 당대에 페르세폴리스에서 약탈한 금을 흥청망청 써버리면서 막대한 양의 금이 시장에 풀렸고, 이는 아마도 인류 역사상 첫번째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유발했습니다. 금과 은의 교환 비율은 1대13에서 1대10으로 금값이 내려갔고, 금의 가치는 구리에 비해 반토막났습니다.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하자 그의 장군들은 군을 소집하기 위해 황금을 물 쓰듯이 써버렸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습니다. 당시 바빌론의 보리 가격이 급상승한 것은 이를 훌륭하게 예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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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사후 폭등하는 바빌론의 보리와 양모 물가(맨 위가 보리고 아래가 양모 값이다)>

 

 

이렇듯 아케메네스조가 무너지고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하여 질서와 권위가 무너짐에 따라, 옛 페르시아 제국령은 그야말로 피폐해지게 되었고, 백성들은 전쟁에 고통받아야 했습니다. 인세의 지옥도가 도래한 것이었죠. 옛 제국령이 황폐해지고 있을 동안, 제국에게서 멀리 떨어진 주변부가 성장하는데요. 서쪽에서는 앞으로 로마 제국으로 불리울 로마 공화국이 성장하고 있었으며 동쪽에서는 인도 역사상 최강의 제국인 마우리아 제국이 급속도로 성장해서 세계 최강의 국가로 발돋움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란은 다시는 옛 아케메네스 왕조의 고토를 회복하지 못합니다.(사산조때 잠깐 성공할뻔 했습니다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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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키
    세계지도 보는게 꿀잼이다

    마우리아 왕조 커지고 중국 전국시대 끝나가고

  • 타키
    킬로렌츠
    작성자
    2021.12.11
    @타키 님에게 보내는 답글

    장구한 역사의 흐름을 보면 느끼는 게 많아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