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롱 라차누팝공(Prince Damrong Rajanubhab)은 태국 제4대 군주 몽꿋왕(King Mongkut)의 아들이자 쭐랄롱꼰왕(King Chulalongkorn)의 이복동생으로 근대 태국의 교육 및 보건, 행정체계를 마련하고 태국사 연구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그는 1862년 6월 21일 당시 태국의 국호가 아직 '섬라'였을 때 방콕에서 태어나 불교식 궁중교육을 배우며 자랐고 영어에 능통해 영국을 비롯한 외국 사절들과 친분을 다져 외교술도 착실히 배웠습니다.
이복형인 쭐랄롱꼰왕의 치세에는 섭정을 하며 실권을 쥐고 있던 추앙 분낙(Chuang Bunnag)을 견제하기 위해 크게 중용되어 이복형의 개혁정책에 큰 역할을 도맡았는데, 특히 내무상으로 부임할 동안 100개 성(省)을 14개 특구(特區)로 통합한 행정구역 개편을 이룬 것은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손꼽힙니다.
그러나 1910년 쭐랄롱꼰왕이 붕어하고 새로 즉위한 와치라웃왕(King Vajiravudh)과 갈등을 빚자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은퇴 후에는 여러 개의 국립도서관과 국립박물관을 세우고 700여 개의 태국사 연구 논문을 발표했으며 이 덕분에 '태국 역사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로 불리게 됩니다.
1932년 군부가 군사혁명을 일으키자 정치적 위협을 받고 말레이시아의 피낭섬으로 피신했다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이 피낭섬을 침공하자 귀국하여 자신이 태어난 방콕에서 살다가 1943년 12월 1일에 서거합니다.
그리고 유네스코(UNESCO)는 그가 서거한 뒤인 1962년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그를 태국인 최초로 세계기념인물 중 하나로 선정했습니다.
오늘날 태국 정부에서는 그가 서거한 날인 12월 1일을 '담롱 라차누팝의 날(Damrong Rajanubhab Day)'이라는 기념일로 정했으며 공휴일까지의 위상에는 못 미쳐도 많은 태국인들이 그의 서거를 기리고 있습니다.
다재다능하셨노 ㄷㄷ
저 때 태국 왕자들은 엘리트가 되어야할 수 밖에 없었음 내부로는 궁중암투가 난무했고 외부로는 열강들이 어떻게 해야 태국을 손에 넣을까 궁리를 해댔으니
살아남으려면 ㅠㅠ
서쪽로는 영국, 동쪽으로는 프랑스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으니까...
생존 전략
국가와 왕실의 존망이 달렸는데 나랏돈으로 귀한 유학 가서 놀고 올 수는 없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