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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난도질 당한 서태후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 담은 담론

권세‧곳간 챙기려다 제 무덤 파지 말기를

 

서태후(西太后‧생몰연도 서기 1835~1908) 예흐나라씨(葉赫那拉氏)는 청(淸)나라 말기 인물이다. 황제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와 달리 후궁‧태후로서 정사(政事) 관여 권한이 일절 없음에도 인사전횡 일삼고 부정축재까지 한 인물이다.

 

서태후는 1835년 안후이성(安徽省)에서 몰락한 관리의 딸로 태어났다. 가난에 한이 맺힌 그는 연인과 이별하면서까지 입궁(入宮)하고자 애썼다. 1851년 끝내 자금성(紫禁城)에 들어가 궁녀가 된 서태후는 현란한 말솜씨와 미모로 함풍제(咸豐帝)를 사로잡았다. 승은(承恩)을 입게 된 서태후는 훗날의 동치제(同治帝)를 낳았다.

 

아들 출산으로 일약 귀비(貴妃)가 된 서태후는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가 비선(秘線)처럼 정치에 관여하려 조금씩 욕심내자 그제야 함풍제는 아내의 야심을 알아채고 경계했다. 일설에 의하면 서태후를 처단할 생각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함풍제는 1860년 31세 나이로 요절(夭折)하고 말았다.

 

동치제가 다섯 살 나이에 새 황제로 즉위하자 세상은 서태후 것이 됐다. 그는 함풍제의 정비(正妃)인 동태후(東太后)와 함께 수렴청정(垂簾聽政)에 나섰다. 야심이 없고 후덕했던 동태후는 서태후에게 조정을 맡겼다.

 

서태후의 인사전횡 첫 타깃은 ‘아들’이었다. 서태후는 언젠가 아들이 장성해 친정(親政)하면 권력을 잃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때문에 그는 어미로서는 해선 안 될 위험한 선택을 하고 말았다. 서태후는 아들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대신 환락(歡樂)으로 몰아넣었다. 궁궐 밖 홍등가 드나들던 동치제는 끝내 몹쓸 병들에 걸렸다. 박수 치고 깔깔 웃은 서태후는 아들이 병들어 죽게 내버려뒀다.

 

동치제가 승하(昇遐)하자 서태후는 동치제의 자식, 즉 제 ‘손주’를 잉태하고 있던 며느리에게도 죽음을 강요했다. 서태후에게 있어서 며느리가 품은 손주는 세상에 둘도 없는 귀엽고 예쁜 혈육(血肉)이 아닌 미래의 경쟁자였다. 실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들 일가(一家)를 몰살시킨 서태후는 다음 황제를 자신이 직접 정함으로써 조정 실권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그가 택한 후임은 함풍제 동생과 제 여동생 사이에서 난 네 살의 광서제(光緖帝)였다. 광서제는 황비(皇妃)도 제 손으로 간택 못하고 서태후가 짝지어 준 예흐나라씨 집안 여인으로 골라야 했다. 조정 대신들도 모두 서태후의 사람들로만 채워졌다.

 

광서제는 허수아비 황제로 전락했다. 평생 서태후의 꼭두각시로 지낸 광서제는 1908년 37세 나이로 급사(急死)했다. 중국 국가청사(淸史)편찬위원회 등은 2003년부터 광서제 능을 조사한 결과 시신 머리카락 등에서 치명적 분량의 비상(砒霜·비소로 만든 독약)이 검출됐다고 2008년 11월 발표했다. 광서제 후임이자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도 서태후에 의해 강제로 즉위했다.

 

황궁을 피칠갑하면서 여러 황제를 제 손으로 갈아치운 서태후는 천문학적 규모의 국고횡령도 일삼았다. 대표적 사건이 근세판 아방궁(阿房宮)인 이화원(頤和園) 재건‧증축이었다.

 

이화원이 본격 조영(造營)된 때는 1750년이었다. 건륭제(乾隆帝)는 모친 환갑을 기념해 이화원 전신(前身)인 청의원(淸漪園) 건축을 명했다. 당시는 강건성세(康乾盛世)로서 청나라 최대 전성기였기에 많은 나랏돈을 소비해도 나라살림에 큰 무리는 없었다.

 

허나 19세기 청나라는 1~2차 아편전쟁(Opium War) 등으로 국운(國運)이 쇠하던 황혼기였다. 그럼에도 1886년 서태후는 무려 은자(銀子) 3000만냥을 투입해 2차 아편전쟁 당시 불탄 이화원을 재건하고 나아가 무지막지하게 확장했다. 이 돈은 북양함대(北洋艦隊) 예산에서 유용됐다는 설이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3000만냥은 청나라 해군 1년 예산의 절반에 달해 결국엔 청군(淸軍)의 제해권(制海權) 장악에 막대한 차질을 야기했다.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된 이화원은 외교사절단 접대 등을 위한 국가자산이 아닌 서태후 개인별장으로 사용됐다. 명목상 광서제에게 옥새(玉璽) 돌려주고 자신은 태후로 물러나 배후에서 조정을 주물럭거린 서태후는 이화원에서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졌다.

 

조금이라도 젊고 잘생긴 남자란 남자는 모조리 이화원 침실로 끌려갔다. 일부 관리는 이를 모면코자 서태후 측근들에게 뇌물을 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외국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국 외교부의 중국어 통역이었던 에드먼드 백하우스(Edmond Backhouse‧1873~1944) 백작은 1943년 작성해 2011년 출간된 회고록에서 “나는 서태후와 4년간 관계를 맺었다. 서태후는 함풍제 사후(死後) 많은 남자들과 한 이불을 덮었다”고 폭로했다.

 

그런데 철통권세와 두둑한 곳간을 위한, 지은 죄가 있으니 두려울 수록 더욱 지속된, 서태후의 월권행위들은 도리어 비수가 돼 서태후에게로 되돌아왔다.

 

우선 조정이 저 모양이니 기강이 바로 설 리 없었다. 따라서 이홍장(李鴻章) 등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 관리들은 문무(文武)를 막론하고 근무태만‧가렴주구(苛斂誅求) 일삼았다. 자연히 병사들은 훈련부족에 내몰렸다. 군대 특히 해군은 반복숙달 교육이 생명이다.

 

또한 서태후의 국고횡령으로 인해 북양함대는 포탄마저 없다시피 한 이빨 빠진 호랑이로 전락했다. 독일 조선업체 등에서 수입한 철갑선(鐵甲船) 29척으로 구성된 북양함대는 원래 열강(列強)의 해군력과 동등하거나 그 수준을 뛰어넘는 무적함대였다. 함대 기함(旗艦)인 배수량 7천t의 정원함(定遠艦)은 독일해군마저 보유 못한 최신예 거함(巨艦)이었다고 한다.

 

훈련 안 된 병사들이 우왕좌왕하고 함선은 제 구실 못함에 따라 북양함대는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일본에게 무참히 패배했다. 2019년 9월 신화통신(新華通訊) 보도에 의하면 같은 해 산둥반도(山東半島) 해저에서 초라한 몰골로 잠든 정원호의 잔해가 중국 국가문물국 수중문화유산보호센터 등에 의해 확인됐다.

 

청나라가 완연한 종이호랑이임을 확인한 열강들은 수년 뒤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 때 연합군 구성하고서 베이징(北京)을 점령해 이화원 등을 때려 부셨다. 서태후는 난을 피해 도주하며 산해진미(山海珍味) 대신 옥수수빵이나 먹는 신세가 됐다. 청나라가 멸망한 뒤 20세기 초 군벌시대(軍閥時期) 때는 군벌들이 도굴을 위해 서태후 묘를 엉망진창 파헤쳤다. 병사들은 서태후의 시신을 난도질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중화민국(대만)‧중국은 한 목소리로 서태후를 ‘역적’ ‘매국노’ 등으로 성토 중이다.

 

‘용산’ 모 여사님의 초법(超法)적인 정당 수장 갈아치우기 시도 의혹, 그리고 고속도로 노선변경 및 명품백 관련 의혹 등이 연일 세간의 입에 오르내린다. 이들 중 일부는 아직 사실여부가 확인 안 됐고 일부는 사실로 굳어지는 듯한 분위기다. 많은 사람이 신년 기자간담회든 대담이든 해당 사모님 남편으로부터 어떤 입장이 나올지 지켜보고 있다.

 

길게 말하진 않겠다. 의혹들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면 적극 해명하길 바란다. 만에 하나 사실이라면 더 이상의 서태후 같은 어리석은, 어쩌면 늦었을 수도 있지만, 여론악화를 자초해 ‘서울 6석 내부 보고서’ 등을 야기하는 자충수(自充手)는 없길 바란다. 당세(黨勢)가 기울면 결국엔 용산도 살아남을 수 없다. 권세‧곳간 챙긴다면서 제 무덤 파지 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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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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