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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 이승만 “진리와 정의는 항상 승리” … “세계사에서 가장 완벽한 민주주의 혁명” 왜? … 피 한방울 안흘린 ’국민국가‘ 탄생!

뉴데일리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의 건국은 건국의 완성이 아니라 건국의 시작이었다. 소련과 싸우고 미국과 싸우는 이승만은 그의 평생지론 ‘외교독립’의 전략에 따라 유엔 외교로 대한민국을 세웠고, 건국 즉시 농지개혁, 의무교육, 지방자치제 실시를 서둘렀지만 공산군의 6.25침략으로 진통을 겪는다. 그러나 전쟁중에도 농지개혁을 단행하고 피난 부산에서도 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휴전협상이 진행되자 이승만은 지방자치제 선거를 단행하고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켜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정을 밀어붙여, 마침내 극민의 손에 ‘정치 선택의 자유권’을 쥐어주었다. 왜 그랬을까? 한마디로 이승만은 전쟁하면서 ‘민주화 혁명’을 완성시키고자 분투한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이 민주화 혁명이다. 그러나 국민이 주권을 가지고 행사하는 나라가 되어야 명실상부한 민주화 혁명, 곧 현대적 ‘국민국가’가 완성되기 때문이었다.그 필수조건이 바로 첫째 농지개혁, 둘째 의무교육, 셋째 지방자치를 통한 자유민주주의 훈련이다. 무엇보다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는 ‘주권재민의 확보’야말로 국민을 독립정신으로 무장시켜 국가주체로 세우는 지름길이다.

첫째, 농지개혁은 국민의 80% 농민이 자기 농지를 소유해야 경제적 자유권이 생기고 정치적 자유권을 행사할 힘을 갖는다.둘째, 의무교육은 문맹 80% 국민을 가르쳐 주권을 행사할 줄 아는 인간으로 정신수준을 고양시키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다.셋째, 지방자치제는 민주주의를 모르는 국민을 자유-자주-협동 훈련을 통해 민주의식을 갖추도록 민주화시켜야 한다.넷째, 대통령 간선제가 아니라 직선제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국민의 손에 지도자 선택권을 맡긴다. 미국보다 앞선 민주제도이다. 이때 비로소 현대적 국민국가로서 국민이 국가독립을 수호할 수 있는 자위권을 행사, 명실공히 독립국가로 거듭나게 된다.

“일하면서 싸우자”는 구호는 박정희 것이 아니라 이승만의 건국혁명 슬로건이다.싸우면서 일하고 싸우면서 국민의 힘을 키우고 싸우면서 나라의 골격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켜 미국-영국보다 더 완벽한 민주국가로 재건축했던 역사이다.혹자는 농지개혁만을 두고도 ‘세계사에 가장 완벽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라 평한다. 맞는 말이지만 반만 맞는 말이다.이승만 자신이 가난한 지식인으로서 ‘무산계급’ 농민과 노동자를 ‘유산계급 국민’으로 만들었다. 공산주의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부르주아와 융합하여 ‘국민통합’을 완성한 혁명 그것이다. 공산주의가 탄생이래 100년 넘도록 실패한 무산계급혁명을 이승만은 전쟁하면서 불과 3년만에 실현해냈다. 그런데 농지개혁과 병행하며 직선제 개헌까지 완성했으니 이를 통틀어 무슨 혁명이라 평가할 것인가. 아무도 대답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 학계에서 이 두 가지 혁명적 민주개혁을 통합하여 연구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연구는커녕 두 혁명 모두를 독재자의 횡포로 치부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부족하다. 6.25전쟁은 유엔 자유세계가 달려와 싸워주고 있지만, 전쟁이 끝나면 약소국 ‘민주화 혁명’은 언제 또 파괴될지 모른다. 그래서 이때부터 ‘싫다는 미국’을 붙잡고 늘어져 목숨 걸고 안보철벽 ‘한미동맹’을 쟁취하였고, 그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한 자유시장경제 헌법 제정, 곧 사사오입 개헌 파동을 일으켜 글로벌 자유경제시장에 가난한 후진국가를 편입시켰다. 이것도 한국의 전통적 정치인들과 학자들에겐 ‘종신 독재’요, 독재자의 횡포일 뿐이다. 그들은 도대체 외눈박이 역사 문맹자들인가. 보이는 것이 국민도 아니요, 국가도 아니요, 세계도 아니요, 오로지 ‘자기집권’ 뿐인 까닭이다. ’필자는 이 3개 사건, 부산정치파동과 한미동맹, 사사오입 개헌 파동을 “제2의 건국 혁명“으로 규정해왔다. 이유는 그 절차와 그 결과물들이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사건이야 말로 ”세계사에 있어서 가장 완벽한 자유 민주주의 혁명“이라 평가해야 마땅할 터이다. (참조: 인보길, 앞의 책).한미동맹과 사사오입사건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고 여기서는 ‘부산정치파동의 피날레’부터 마무리 해보자.

◆ 사상최초 직선제 선거...공산당 출신 조봉암이 ‘대통령 후보’

건국 4년 만에 5천년 민족사상 최초로 시행하는 대통령-부통령 직접선거는 7월 26일 후보등록을 마감하고. 선거의 자유분위기 보장을 위하여 비상계엄령도 선포 두 달을 넘겨 28일0시를 기해 해제시킨다.「대통령-부통령 선거 입후보등록은 지난 19일 개시하여 26일 하오12시 마감하였다. 이날 등록은 마감시간 몇분 전에 부통령 후보 조병옥씨가 최후로 등록을 한 것으로 끝마쳤는데 이로써 대통령에는 이승만, 이시영, 조봉암, 신흥우 4씨가 입후보등록을 완료하였고, 부통령에는 이윤영, 조병옥, 함태영, 임영신, 전진한, 이범석, 백성욱, 이갑성, 정기원 등 9씨가 출마케 된 것이다. 한편 중앙선선거위원회에서는 27일 상오10시부터 국무회의실에서 정부통령 입후보자의 기호 추첨을 하였는바, 대통령 입후보자의 기호순위는 1호 조봉암, 2호 이승만, 3호 이시영, 4호 신흥우씨로 정해졌다. 그리고 부통령 기호순위는....」 ([동아일보] 1952년 7월28일자) 야당의 기관지격인 이 신문은 앞으로 1주일간 전개될 선거전이 백열화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하면서, 국회의장 신익희가 ‘정치적 불이익 우려’를 이유로 불출마를 선언했다는 1단 기사를 덧붙이고 있다. 장면 역시 “출마하고 싶지만 나의 지지자들이 피해를 볼 것 같아 포기”한다고 짤막한 성명을 냈다.직선제 헌법 확정후 ‘이승만 천하’를 실감한 정치판은 이처럼 출마를 주저하는 형편이다. 투표를 해보나마나 대통령에 ‘이승만 당선‘이 빤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민국당이 내각제 개헌안을 밀어붙이지 못한 것도 이승만과 감히 맞설 만한 대통령 감이 없었던 탓이요, 이승만을 제거하고 싶었던 미국조차 ‘대체 인물’이 없는 한국의 정치현실을 깨닫고 ‘국회쿠데타’를 진작 포기하지 않았던가. 그리하여 등록 마감이 임박해서야 민국당은 부통령을 사임한 이시영과 조병옥을 정-부통령 후보로 등록했다. 무소속 조봉암은 공산당시절 이래로 유일한 좌파후보이고, 부통령 선거에 출마한 무소속 노동운동가 전진한은 중간파로 분류되었다.

★부통령 후보들 ‘친이’ 경쟁...이승만 ‘내가 지명한 분 없다“

제헌헌법부터 대통령과 부통령의 출마는 미국식의 러닝메이트제가 아니었다. 각각 소속당이 다르고 각각 국민들이 따로 선택하는 독특한 권력분립체로서 얼핏 민주적 장점인 듯 하지만 권력싸움을 배가시키는 큰 단점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바로 8년 뒤 저질러지는 3.15부정선거가 ’부통령 쟁탈전‘의 뿌리가 이것이었다. 이번에 첫 선거부터 그 모순점이 증명되었다. 대통령 자리는 전국민이 ‘국부(國父) 이승만’을 추앙하는 일방적인 분위기에서 투표는 하나마나가 되었고, 결국 ‘부통령 쟁탈전’으로 변하고 말았다. 난립한 부통령 후보들의 선거운동은 놀랍게도, 그러나 자연스럽게도 ‘친(親)이승만’을 내세우는 ‘이승만 덕보기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진다. “위대하신 민족 지도자 이승만 대통령 각하께서 밀어주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 “아니다, 내가 진짜 이승만 박사의 충성스러운 일꾼이다” “아니다, 나도 친히 점찍어 주셨다” 전쟁 중에 휴전협상과 남북통일등 국가적 과제가 발등의 불인데도 국정공약이나 정책경쟁은 찾아볼 수 없이 그저 이승만의 ‘선택 여부’에만 시선이 집중된 판국이었다.이승만은 “나는 어느 누구도 부통령으로 지명한 일이 없다”는 담화부터 발표해야 했다. “여러 분이 부통령후보에 입후보하고 나서 대통령이 지명한 것처럼 자기편에 유리하게 선전을 하고 있다는데 나는 특별히 누구를 지명한 적이 없다는 것을 밝혀둔다.”이 말은 이승만-이범석을 정부통령 후보로 추대한 자유당엔 직격탄이었다. 이승만은 왜 그랬을까...옛날 왕권을 둘러싸고 죽자 사자 덤비던 당쟁이 이승만을 둘러싸고 또 생겨나 개헌공신 다툼을 벌이는 신판당쟁, 현재의 국회 당파싸움으로도 모자라 새로운 파당들이 눈앞에 등장한 것이었다. 못 말리는 한국인의 당쟁근성에 머리를 내두른 이승만은 원내외 자유당 파벌의 세력다툼을 보다 못해 폭탄선언을 던졌던 것, 이를 계기로 원외 자유당내 민족청년단(족청)의 지도자 이범석은 끝내 재기할 수 없게 된다. (조용중, 앞의 책).

★이승만의 ‘숨은 카드’ 함태영 부통령...청년시절의 동지

뜨거운 부통령 경쟁에 뜻밖의 인물이 혜성처럼 등장한다. 이승만이 싸움판에 박은 쐐기!자신보다 2살 많은 79세 심계원장(審計院長:현 감사원장) 함태영(咸台永,1873~1964)을 불러 부통령 후보로 적극 권유하여 출마시킨 것이다. 정국은 또 한번 놀랐다. 전혀 뜻밖의 인물함태영이 등장한 것은 물을 것도 없이 이승만의 의중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조용하고 독실한 기독교인 함태영이 이승만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음을 당시 누가 알까. 구한말 고종시대 1898년 만민공동회, 급진적인 왕정개혁을 부르짖던 이승만이 반역죄로 몰려 한성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일이다. 혹독한 고문 끝에 법정에 섰던 1899년 봄, 그 재판의 검사보가 젊은 함태영이었다. 독립협회의 개혁운동에 동감하던 그는 “이들이 반역하려 한 것이 아니라 황제폐하의 국정을 돕고자” 하였으므로 사형은 부당할 뿐더러 가볍게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것이었다. 검사가 아니라 변호사였던 셈, 함태영은 즉시 파면 당하였다.오랜 세월 이 사실을 잊지 않고 있던 이승만은 정부 수립 후 그를 심계원장으로 발탁하였다. 파벌 없고 당쟁 싫어하는 그 함태영을 부통령으로 삼으려 했던 것은 새롭게 등장하는 정치세력들의 싸움판을 무력화 시켜 보려는 이승만 스타일의 탕평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승만 후보의 선거유세...‘직선제’ 주창과 조봉암 비판7월말 경부터 8월초까지 선거운동이 벌어지고 후보들의 정견발표가 이어지자 이승만 대통령 후보도 선거용 유세 연설을 한다. 다음 연설문에는 이시영-조봉암 등 경쟁상대에 대한 이승만 특유의 평가가 보이고, 창당 반년밖엔 안된 자유당에 대한 선거 인식과 정치적 계몽 및 당부가 들어있어 눈여겨 볼만 하다. 특히 사상처음 직선제 헌법 하에서 치루는 최초의 직선제 투표인지라 미국 간섭을 배제한 사대주의적 음모의 추방에 초점을 맞춘 연설이다. ◀이승만 후보 연설문▶이번 대통령선거를 민족의 직접투표로 행하게 된 것은 민주정치발전에 많은 성공임을 우리 전국유권자에게 치하하는 바입니다. 이것으로 인연해서 민주정체(民主政體)의 영구완전보장과 국권진전(國權進展)에 중대한 책임을 전국민의 어깨에 있게 한 것을 한층 더 증명한 것이니 일반민중은 이 권리와 그 책임의 중대한 것을 더욱 깨닫고 각각 성충(誠忠)을 다해서 대통령을 직접선거하는 권리를 영영 잊어버리지 말기 바랍니다. 이번 국회에서 개헌안을 통과해서 이와 같이 된 것은 우리가 다 다행으로 아는 것이며 다소간 정치상 파동이 있었으나 그것은 다 잊어버리고 일이 바로 된 것을 다행으로 압니다. 자초(自初)로 이 개헌을 내가 주장하여 온 것인바 혹은 말하기를, 이 개헌이 못되면 내가 다시 대통령에 피선될 기회가 없을까 하여 이것을 주장했다는 언론이 있으나, 이런 비평을 피하고자 해서 출마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한 것이 또한 나의 한가지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동포가 나를 이만치 애호해서 전국의 남녀대표들이 울며 강청하고 각 교회에서는 금식기도로 진심으로 간구하며 어떤 부인은 금비녀와 금가락지 같은 자기 결혼때 물건을 자유당(自由黨) 사무실에 갖다 주어서 이번 이대통령 선거에 써달라고 하고 지금도 이름을 숨기고 있기에 이른 것을 내가 감동 되지 않을 수 없어서 필경은 여러 동포의 강청을 이기지 못하여 허락하기에 이른 것이다. 내가 처음에 바랐던 것은 나보다 연구력(年久力) 강하고 재덕이 풍부한 분이 피선되면 다행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지금 출마한 분들의 이름을 보면 다 상당한 인격이라 인정할 것이거니와, 그분들의 정견발표한 것을 보면 나의 바라던 바와는 대단히 차이가 있으니 이것은 우리 명철(明哲)한 동포들이 공정히 판단해서 결정할 줄 믿는 바이다. 나로서는 우리 민국(民國)을 오늘만 보유하자는 것이 아니오 내일을 생각치 않을 수 없는 고충하(苦衷下)에서 간단히 몇 가지만 설명하려 합니다.

◉이시영(李始榮)씨의 정견발표에는 자기가 피선되면 정치범을 다 석방하고 국방군을 축소해서 평화군(平和軍)을 편성한다하고 휴전회담을 성공 시키면 남북총선거를 시행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다 좋은 말입니다. 무엇을 정치범(政治犯)이라는지 모르지만 공산당(共産黨)을 말한다면 그 사람들은 석방하는 것이 좋을 것이고 아무쪼록 군인을 농사와 공장에 돌아가게 하고 판문점(板門店)에서 성공못한 것을 성공시키며, 또 유엔에서와 이전 미군정때 못한 남북총선거를 시행한다니 이와같이 할 능력이 있다면 나는 그분을 선거해서 하루바삐 대통령으로 해야 될 줄 아는 바입니다. 그러나 소련(蘇聯)의 지도하에서 이것을 하겠다하면 이것은 나만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목숨을 희생하고 싸운 국군들과 수백만 사상(死傷)을 당하며 싸워 나간 우리 민족들과 또 우리를 도와 싸와나간 모든 사람들이 다 이것을 허락치않을 것입니다.이시영 씨가 이것을 주장한다면 공산군의 투표를 받기 전에는 아마 다른 방식으로 투표 받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찌할 방안을 구체적으로 해서 우리가 알기 전에는 독두현령(獨頭懸鈴)의 정책만을 믿고 투표할 사람은 마치 않을 것입니다.

◉조봉암씨(曺奉巖氏)의 발포한 정견(政見)을 보면, 정치를 혁신(革新)하겠다, 독재정치를 배제해야 되겠다, 법률무시(法律無視)하는 위법정치(違法政治)를 타도하겠다, 또는 전력(全力) 권력의 특권정당을 삭제(削除)하겠다고 하였는데, 그 중에 가장 유력한 말을 한 것은 이대통령(李大統領)이 재선되면 오는 4년동안을 어찌 살겠느냐는 등 말을 한 것인데 이것이 다 정객들의 보통 하는 언론(말과 주장)인 것이니 별로 답변할 가치는 없다. 그러나 정치혁신 등은 어찌 하겠다는 구체적 성명(聲明)이 좀 있어야 듣는 사람이 믿을 수 있을 것이오, ‘독재정치’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그가 국회부의장으로 앉아서 어찌 독재정치를 허락하고 있었는지, 그동안 국회 내에서 이분이 독재정치를 말하는 그런 소리 한번 없었던 것 같으니 그러면 이것(독재)을 묵인하여 왔다는 것이고, 또 법률무시(法律無視)란 것은 이번 개헌문제에 대해서 우리를 비평하는 소리 같은데 내가 지난 4년간 법률상 문제에 대해서 많은 고통을 가진 것은 두 가지 어려운 조건이 있는데 그 하나는 우리 법률해석하는 사람 가운데 일본법규(日本法規)하는 것을 모범해서 배운 습관이 있어서 법률의 근본정신은 포기하고 문구(文句)만 주장해서 국사(國事)에 어려운 문제를 일으킨 일이 종종 있었나니, 예를 들어 말하면 그것이 다 우리 헌법대지(憲法大旨)는 ‘국가의 모든 권리는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했으니 이것이 모든 법률의 토대인데 국회원(國會員)들이 그 민중의 공의를 무시하고 위반해서 법의 정신을 포기하고 자기들끼리 자신들에게 유익한 조건만을 주장해서 대통령은 자기들만이 선거하는 것이라 고집하야, 조그만 한 문구로 인연해서 대체(大體:국가체제)를 희생하라는 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본래 나라와 그 국민을 위해서 법을 만든 것이오, 법을 위해서 나라가 있는 것이 아니며 또 백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중한 것인지 판단하면 알 것인데, 법률의 토대를 무너트리고 근본을 포기하고 지엽(枝葉)을 취한다면 이것은 물에 빠진 계수(季嫂:동생아내)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 예도(禮度)에 벗어난다하여 구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 이것을 누누이 설명해도 깨닫지 못하는 고로 이번에 정계에 파동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을 제삼자가 판결하면 누가 헌법을 무시한 사람인지를 금방 잘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조봉암의) 정견 가운데 전력(全力)과 권력의 특권계급을 삭제한다 했으니, 이것은 우리가 극히 찬성하는 말입니다. 본래 조씨(조봉암씨)는 군정시대부터 공산당원으로 알려진 분으로 소련을 배척하는 의도(意圖)로 유명했던 것입니다. 내가 이분에게 바라는 것은 공산주의로 노민(勞民)을 위해서 희생적 공헌을 할 줄 기대했으나, 나의 노력으로 농림장관(農林長官)에까지 나가게 되었는데 그 후에 두고 보니 빈곤한 우리 농민을 위해서 무엇을 하였는지 모르지만, 먼저 자기 저택(邸宅)을 굉대(宏大)하게 차리고 많은 공금(公金)을 여기에 썼다는 보도를 듣고 크게 낙망하여 그 후로는 별로 주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그의 정책이 변해서 금력세력가(金力勢力家)들과 대립이 되어 가게 된다니 빈곤한 민중을 위해서나 내가 이 의도표명(意圖表明)만은 찬성하려는 바입니다. 이박사가 피선되면 4년간을 어찌 지내느냐고 염려하는 것 같은데 물론 공산당원이나 그러한 마음을 전적으로 회개(悔改)하고 청소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런 염려가 없지 않을 것이고, 아직도 그런 공산당에 동정하는 마음이 청산(淸算)되지 않은 사람은 나 역시 그런 분에게 동정할 바입니다. 내가 유권자들에게 한 가지 알려주고자 하는 것은 공산군과 싸우는 이 마당에 공산당에 이름 가진 사람이 그 목적을 순수히 반공(反共)으라 표방해도 일국(一國)의 대통령으로 투표하는 것은 결코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차라리 이시영씨(李始榮氏)의 뜻대로 공산군에 타협이나 항복으로 공산당이 되기 전에는 나의 주장을 따라서 공산당과 싸와야할 것이며 우리가 결코 공산당의 이름가진 사람을 이후라도 대통령으로 전국민이 받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상 두 후보자의 동일한 언론은 내각책임제를 실시하자는 동일한 의도를 가지게 되니 이것은 모든 유권자들이 전적으로 거부해서 후폐(後弊)를 절대 막아야 될 것입니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기왕에 설명한 바이지만 내각책임제는 정부를 무상변동(無常變動)해서 정권이 성립되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지금 이 위기에 앉아서 국회에서 불신대안(不信代案)으로 제출해서 정부가 나가고 또다시 정부를 조직하게 되니, 지금 불란서(佛蘭西)와 같은 조변석개(朝變夕改)의 정변만 일으키게 된다면 우리로는 민국의 토대가 위험해질 것이오. 오직 그 결과는 모든 정객들이 정권을 잡으려고 위기 일으킬 것이니, 민중이 지지하는 한, 정부를 국회가 요동(搖動)해서는 아니 될 것이므로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으려는 바입니다.

나의 정책이라는 것은 지나간 4년의 경과를 보아서 다 양해가 있을 것이오. 내가 의도하는 것으로 다 성취했다고 할 수 없으나 대지(大旨)는 다 알 것이므로 잘못된 것은 공의(公意)를 따라 변경할 수 있을 것이나, 내가 조직해서 극력 발전시키려는 자유당(自由黨)의 정강(政綱)과 주의(主義)는 노민(勞民)과 농민(農民)들이 주장하게해서 이 정당이 세력가나 재력가들의 소수인의 기반이 되지 말고, 노총(勞總)과 농총(農總)에서 노민과 농민 중에서 상당한 지도자를 택해서 자유당 간부에 중요책임을 갖게 하고 국민회(國民會)와 부인회(婦人會) 남녀청년단체에서도 대표를 뽑아서 이에 참가케 하여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각각 대표된 단체들의 권리와 이익으로 추진시킴으로써 이 대중인민의 자유와 생활정도 향상시키려는 것이 나의 목적인 바, 이 주의를 절실히 각오하는 동포들은 서로 권면해서 다 같이 성심껏 보조를 일원화해서 통일을 완성하여 우리 민족의 복리(福利)와 민국(民國)의 영예(榮譽)를 발전시키기를 목적(目的)할 것이니...(중략)...보통민중이 이 정책을 달성시키기에는 각각 사대적주의(事大的主義)와 습관을 포기하고 자기들의 지식과 역량대로 노력분투해 나가야만 될 것이니 부디 그 분들의 지도를 받자는 생각을 갖지 말고 평등자유의 민주적 정신만으로 고취해 나가는 중에서 서로 보호하며 서로 제휴해서 전국민의 행복을 완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유당 모든 당원들을 이 주의(主義)를 절대 지지해서 이 정당을 공고케 만드는 것으로서 민국의 토대를 공고(鞏固)케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또 우리 자유당에서 주장하는 바 남녀동등(男女同等)은 우리 남자들이 먼저 우리 부녀(婦女)들을 존중히 여기며 또 부녀들 자신이 그 지위를 보호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니 이런 것을 정강(政綱)의 한 조건으로만 붙여 놓지 말고 실지로 실행해나가야 될 것입니다. 지방관념(地方觀念)에 대해서도 전민족이 통일만을 주장하고 통일을 방해하는 사람은 공동결심으로 저제(抵制)하고 막아 놓아야 할 것입니다. (중략)

기왕에 말 한바와 같이 나를 지지하는 일반동포들을 극히 조심해서 선거운동을 각각 자발적으로 진행할지언정 많은 경비를 써가며 어떤 단체나 개인의 재정으로 피선(被選)되었다는 누명을 받지 않기를 원하는 바이니, 나를 선거하기 위해서 몃 백만원을 썼다는 것을 내 귀에나 다른 사람 귀에 들리지 않도록 만들어 주어야 나의 지조(志操)를 보호(保護)하는 직책(職責)이 될 것입니다. 선거운동에 서로 불평도 하고 투쟁도 할 수 있으나 결코 악감정으로 들어가는 것은 서로 피)하는 것이 민국의 상당한 지도자의 의의상 직분이오. 이 정치투쟁은 이론과 공론으로 작정하는 것이오. 난동이나 완력으로 투쟁하는 것은 개명한 우리들로서는 결코 없어야 될 것이니 각각 민족국가의 영예를 위하는 사람은 이런 폐단을 절대 피해야 될 것입니다.

또다시 권고하나니 이번 선거에는 절대 자유 분위기 안에서 법률상 조리를 따라서만 진행해야 될 것이오. 선거운동에 지하공작이나 음모, 뇌물 등 불법한 일이 있는 것은 중앙이나 지방에서 일일히 조사해서 막도록 할 것이며, 정당한 방식으로 이를 막기 어려울 때에는 상당한 증거를 모아다가 선거 후에라도 다스려야 할 것이니, 이런 것은 관민 합심으로 엄절(嚴切)히 진행해야 될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 신성한 유권자는 기왕 국회원선거에도 유권자가 거의 다 나와서 투표권을 행사했다는 칭찬을 해내외에서 받았으니, 이번 이 선거에서도 일일이 투표장에 나가서 애국성심으로 투표하기 바라는 바입니다. 오직 이 투표 결과로서만이 위란(危亂) 중에 있는 우리 민국(民國)을 한 층 더 굳건히 세워 놓게 될 것입니다. (국가기록원, 1952년 연설문 중에서)

★ 조병옥, “조봉암은 공산당, 사퇴해야” 설전 이승만 후보가 유세연설에서 민국당 이시영 후보의 정견에 노출된 자기모순점을 지적하고, 공산당출신 조봉암의 표리부동 행태를 꼬집은 것과 때를 같이하여, 민국당 부통령 후보 조병옥이 무소속 대통령후보 조봉암의 사상문제를 정면으로 문제 삼고 나섰다. “조봉암씨는 공산당이다. 그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나 마찬가지이며 즉시 사퇴해야 한다. 조씨의 입후보는 공산세력과 혈투하고 있는 우리로서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용납 못할 사정이므로 그의 퇴진을 촉구한다. 그가 농림부 장관 당시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을 보더라도 공산당이 아니라고 볼 수 없다.” ([조선일보]1952년8월4일자)이와같은 조병옥의 문제지기는 선거 때문만이 아니었다. 일찍이 중국에서 공산 활동을 하다가 1925년 남로당 두목 박헌영과 함께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창당하였고 ML(마르크스-레닌)당 활동과 소련과의 깊은 연대 등 조봉암의 화려한 좌익 경력은 그가 해방후 1946년 ‘박헌영 비판’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야를 막론한 자유진영으로부터 이념적 신뢰를 얻을 수 없었다. 뿌리 깊은 조봉암 불신은 1954년 민국당이 ‘민주당’으로 야권은 통합할 때에도 여전하여 그는 왕따가 된다. 이승만도 그런 조봉암을 건국내각에서 “오직 농지개혁을 위하여“ 농림부장관으로 기용하였다가 그의 일탈행위에 금방 실망한 경험을 연설에서 폭로하고 있다.

◆ 이승만, 전남 광주 제외 전국서 압도적 득표

마침내 8월5일, 직선제 선거 투표가 끝나고 제2대 대통령에 이승만이 당선된다.이 선거 역시 유엔이 감시하였고 전국을 돌아본 언커크는 “평온한 성공”이라 보고하였다.이승만은 예상대로 압도적인 승리, 전남 광주에서만 민국당 이시영에게 뒤졌을 뿐, 전국 각지에서 골고루 총 유효투표의 72%를 획득하는 대승을 거두었다.이승만 523만8,769표, 조봉암 79만7,504표, 이시영 76만4,715표, 신흥우 21만9,696표. 특이한 것은 부통령에 함태영이 이범석을 크게 누르고 당선된 일이었다.함태영 294만3,822표, 이범석 181만5,692표, 조병옥 57만5,260표 등이다.자유당에서 이승만-이범석 티켓을 내놓아 이범석이 당선 될 줄 알았던 예상보다 100만표 이상 차이로 함태영이 압승하자, 세상은 이범석-장택상 암투관계가 증명되었다며 수군거렸다.건국 때부터 총리와 장관자리를 주고받으며 이승만 정부를 이끌어온 ‘영원한 맞수’의 선거전, 총사령탑 국무총리 장택상은 라이벌 이범석의 선거운동을 견제하며 이승만이 점찍은 함태영을 일방적으로 지원하였다고 한다. 유진산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선거판에서 ‘압철기 부송암(壓鐵驥 扶松岩)’이란 암호가 돌아다녔는데 이것은 ‘철기 이범석을 누르고, 송암 함태영을 도우라’는 장택상의 비밀지령문이었다는 것이다. ([옥계 유진산-생애와 사상과 정치] 유진산기념사업회, 1984)

★ “진리와 대의는 항상 승리” 이승만 “지쳤지만 또 싸우겠다”국민의 손으로 처음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은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하였다.“내가 원해서 된 것은 아니지만 국민 대다수가 또 한 번 수고해달라고 희망하는 모양이니 은퇴하고 싶은 소원을 버리고 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난 4년보다 더 어려울 것으로 본다. 나는 미국 친구들의 협력과 국민의 충실한 지지를 얻어 최선을 다 할 것이다.”직선제의 성공에 기쁨을 감추지 못한 이승만이 “은퇴하고 싶다”는 말을 또 하고 있다. 지난 1년간 그는 직선제를 설명하고 설득할 때마다 “나는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 몇 번 말 하였고 “직선제 헌법을 만드는 일이 평생의 마지막 목표” “이것만 이루면 그만둔다” “대통령직에 있을 때 꼭 해야겠다” 등 국민과 미국대사에게까지 되풀이 다짐해 왔다.

▶당선 성명◀ 이승만은 공식적인 당선 성명을 국민을 향해 발표하였다. 그는 왜 그동안 출마 않겠다고 했는지를 설명하면서 새로운 각오를 밝히고 있다.“첫 째 나의 나이가 출마를 거부합니다. 내 나이가 많아서 나보다 젊은 사람이 나와 더 낫게 하기를 바랐던 것인데...내가 젊었을 적에 혁명가로 나서 자유를 위하여 싸워온 이래 50년간 내 평생은 투쟁의 역사였습니다. 이제는 싸우기가 귀찮아졌습니다”

독립운동 시절 무력투쟁파와 흥사단, 공산당 등 반대파들의 집요한 방해와 중상모략, 해방후 귀국하여 미국의 좌우합작 압력과 싸울 때 배신한 김구 등 임정세력의 독주는 또 얼마나 폭력적이었던가. 그리고 소련-중공과 전쟁하면서 지금 또 국회 정파들과 싸웠으니 80을 바라보는 노인 대통령이 쉴 때도 벌써 지난 셈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언제든지 내가 무슨 일을 시작할 때에는 남들과 매양 싸우지 않고는 안 되는 형편이었으므로 이젠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나와 경쟁한 이 분들의 목적은 오직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도 괴상한 말로 세계에 전파하기를 내가 국회를 무력을 써서 해산시키고 딕테이터(독재자)가 되려한다는 둥, 허무한 소리가 이 이중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이런 헛된 말들을 듣고 민중은 대단히 분개하였고 민중의 힘으로 어렵게 개헌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진리와 대의는 언제든지 승리하고 만다는 것을 믿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평민으로 돌아가고 싶은 나의 생각을 양보해서 민족의 사명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패배자들에 대한 승리자의 말로서는 지극히 매정하게 들리지만 지극히 솔직한 고백이다. 경쟁자에의 승리가 아니라 진리와 대의가 승리했다는 이승만의 말은 이번 선거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80평생의 독립투쟁과 대한민국 건국, 평생의 염원 ‘민주화 완성’까지 7전8기 거듭거듭 확인한 자유민주주의 신념과 뼈속까지 녹아든 개신교 정신의 신앙고백이기도 하다.

◆ 최초의 직선 대통령 취임사 ”한국의 자유가 세계의 자유“

8월15일 제2대 대통령 취임식은 서울 중앙청 광장에서 열렸다.아직 환도 전이라 임시수도 부산에서 취임식 거행을 검토하였으나 이승만은 서울로 결정하였다. 역사상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 취임일뿐더러 휴전협상중의 취임식인지라 대한민국의 심장인 서울에서 최초의 ‘민선 대통령’이란 국민적 리더십의 데뷔 무대는 수도 서울이다. 즉 목숨을 건 휴전반대와 국토통일의 불변 의지를 강대국들과 참전 연합국들에게 과시하려는 투쟁의지의 깃발, 그것이었다.이날도 배은희(裵恩希) 목사의 기도로 시작한 행사에서 선서를 마친 이승만은 취임연설을 통해 일선장병과 참전국들에게 감사하고 특히 자유세계의 단결을 강조한다.

“....국제연합 제국과 우리의 가장 친한 우방인 미국이 여러 번 선언하기를 ‘자기들의 목적은 우리와 같다’고 한 것이니 즉 우리 대한이 통일 독립 민주국가로 완전히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이 통일의 목적을 완수해야 되겠다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맺힌 결심과 목적이 얼마나 공고한 가에 달린 것입니다. 한 가지 단언하는 것은 우리 한국은 분단이 되거나 점령을 당하고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유세계도 공산제국주의를 허락해서 승리하게 길러주고는 자유를 지탱하기 어려운 것입니다.공산제국주의는 전 세계의 자유 민족주의를 타도시킬 목적으로 할 것이니 기본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한국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세계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승리는 모든 나라들의 승리입니다. 만일 우리가 여기에서 실패한다면 세계 모든 자유국민에게 비극적인 실패가 될 것입니다. 자유세계의 단결은 누가 깨트리지 못합니다. 우리를 치는 힘이 클수룩 모든 반공국들의 공동안전을 위하는 단결심이 더욱 단단해질 것입니다...“

이승만의 자유철학과 글로벌 리더로서의 혜안과 지휘력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명연설이다. ‘한반도의 분단과 일부라도 공산당의 점령 상태로는 살수 없다’고 단언한다는 말은 이후 이승만이 휴전반대 투쟁에서 미국에게 일관되게 보여준 통일의지였다. 이듬해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동맹 체결에 이르기까지 ‘통일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절규는 구호 아닌 약소국 생존 키워드, 미국도 굴복할 수 밖에 없었던 ‘벼랑끝 전술’로써 목숨을 건 독립투쟁의 일환이었다.이날 취임사에서 이승만은 부산개헌파동을 설명하며 ‘민주주의에 나의 생명을 걸겠다’고 맹세하고 있다.

▶”건국 4년만에 처음 ‘공화민주국가’ 건설 완성한 것““...나의 개인 메세지로서 우리 국민과 또 친구들인 우리 연합국들에게 한마디 하려합니다.내 평생은 우리나라의 운명과 같아서 낙관적 투쟁과 인내력으로 진행해온 것인데 어떤 때는 앞에 장해가 너무 커서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가 많았던 것입니다.1882년 한미조약 이후로 우리가 밖으로는 각국의 제국주의와 안으로는 쇠락하여 가는 군주정치의 학정을 대항할 적에 희망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싸워왔던 것입니다.지금 와서는 이 싸움 시작하던 사람들이 다 없어지기 전에 민주정부를 세워 민의에 굳건한 토대 위에 세워놓고 세계 모든 친구들이 우리를 호위하고 있는 이때에....(중략).....이제야 겨우 공화민주국가로 되어 지나간 4년 만에 처음으로 민국정부를 건설케 된 것입니다.내가 60년 동안 분투노력한 이 나라를 내 생명이 끝나기 전에 안전과 자유와 통일이 민주국가라는 틀 안에서 굳건히 성립되는 것을 보자고 해왔던 것입니다. 소위 정치파동은 손바닥안의 미풍 같은 것으로서...(중략)...다행히 우리 국민이 나를 전적으로 지지한 힘으로 개헌안을 통과시켜서 이제는 대통령선거권을 국회에 맡겨두지 않고 민중의 직접 투표로 행하게 되었으므로 우리의 민주정체와 민주주의가 강력하게 굳건해진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통일과 우리의 민주정체를 위해서 나는 앞으로도 나의 생명과 헌신을 다할 것을 다시금 선서하는 바입니다...(후략)...“

‘이제야 겨우 건국 4년 만에 공화민주국가 정부를 건설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죽기 전에 60년 독립투쟁의 결실 ‘안전과 자유와 통일’을 이룬 민주국가를 세우고자, ‘손바닥 미풍’같은 정치파동을 통하여 굳건한 민주기초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킨 이승만이 풀이하는 부산정치파동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이다.

◆‘부산정치파동’은 ‘제2의 건국’...새 역사 창조적 의미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대통령의 무혈혁명“이란 정의(올리버, 앞의 책)가 아니라도 부산정치파동이 낳은 직선제 투표는 ‘국민혁명’ 그 자체였다. 우리 역사에서 ‘백성’이 언제 ‘대통령’을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뽑으리라고 상상이나 했었던가.옛날로 치면 ‘상놈이 임금을 투표로 뽑는 행위’로 치부되던 시절이다. 참고로 필자가 12살 국민 학교 6학년때 우리 집에서 눈으로 본 한 장면을 보자.”세상에...우리 같은 것이 감히 상감님을 어찌 고른다나요?“아산만 입구 당진(唐津) 바닷가 산마을에 붙은 고향집, 석유불 등잔아래 다듬이질 하는 부엌 아줌마가 양말 깁는 어머니와 나누던 대화의 한토막이다. ”상감님이 아니구 대통령요, 대통령!“ 6학년 반장 소년이 답답하다는 듯 가르쳐준다.‘그게 그거지 머, 지난 번 의원님 찍을 때두 황감했는디...” 넉달 전 꽃피는 4월 지방자치선거때 동네 이장이던 아버지가 출마하여 당선되었던 일을 말한다. “참 좋은 세상 되었다네. 이번엔 붓뚜껑으루 똑바루 찍어. 저번엔 자네 손도장 찍어서 아깝게 버렸다잖여.” 아줌마와 부엌 누나의 투표를 챙기는 어머니는 의원님 사모님이 되었다는 자부심도 잠시, 아버지 대신 머슴 두 명을 감독하는 일까지 떠맡아야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젊은 머슴 형과 함께 논둑길 풀을 뜯는 소를 몰아 외양간에 매던 어린 시절이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나온다.

그렇다면 직선제 개헌을 쟁취한 부산정치파동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이승만의 말과 행동과 현장 전개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되짚어 보고 넘어가야겠다.

◉ 첫째, 대한민국 자유민주공화주의 민주체제를 처음으로 확립한 것.◉ 둘째, 미국과 야당의 음모를 부수고 신판 친미 사대주의 고리를 끊어버린 것.◉ 셋째, 휴전협상에 순응하려는 친미 야당의 유화주의를 원천봉쇄 한 것.◉ 넷째, 민주정부를 독재로 몰아 집권하려는 좌파의 선전선동을 차단한 것.◉ 다섯째, 집권 여당(자유당)의 새로운 파벌 당쟁 씨앗을 뽑아버린 것.이승만의 취임사 말대로 부산정치파동이 열매 맺은 ’직선제 헌법‘ 탄생은 건국 4년 만에 비로소 굳건한 민주공화국 토대를 쌓은 ’제2의 건국‘ 작업 그것이다. 국제정치가 이승만의 승리!그 제2의 건국투쟁은 앞으로 2년간 더 이어진다. 다음해 ’한미동맹‘ 체결과 그 다음해 일으킨 ’사사오입 개헌파동‘이다. (부산정치파동 끝)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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