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갤럽이 지난 5월 24일 발표한 여론조사는 아주 재미있다.
한국갤럽이 지난 5월 21~23일 전국 성인 100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이 여론조사(95% 신뢰 수준에 ±3.1%, 응답률 15%) 결과를 보면, 문재인 대통령 직무 수행에 대한 긍정평가는 46%로, 그 전주보다 2%포인트 오르고, 부정평가는 44%로 전주보다 3%포인트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문 대통령 지지 이유가 흥미롭다.
갤럽 여론조사는 언제나 긍정평가 혹은 부정평가의 이유를 묻는다. 그런데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지지 이유 1위가 바로 ‘모름·무응답’이다. 이유 없이 지지하는 현상은 감성적 영역인 연예계에서는 발생할 수 있다. 어떤 아이돌이 다른 아이돌보다 좋은 이유를 말하라고 할 때, “그냥 좋아요”라는 답변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이성적 과정이어야 할 정치에서 이런 답변을 듣는다는 것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매우 ‘희귀한 일’이다. 물론 이런 현상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과거 정권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목도할 수 있었다. 단, 현 정권에서 이런 현상이 훨씬 빨리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 정권 말기에서나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왜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인가.
우리나라는 조급증이 보편화된 나라다. ‘빨리빨리’ 문화로 불리는 우리 국민의 조급증은 긍정적인 측면도 분명 내포한다. 우리나라 인터넷 쇼핑 배달 속도는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다. 주문한 사람이 오히려 미안한 감정이 들 정도로 빨리 배송되는 경우도 있다. AS 속도도 세계 수준급이다. 유럽에서 오래 유학한 경험으로 볼 때, 유럽 사람들은 거의 꿈도 꾸지 못할 정도의 ‘빛의 속도’ 배달과 훌륭한 서비스를 우리는 매일 경험한다. 이런 세계 수준급 서비스는 ‘빨리빨리’ 문화가 창출한 걸작이다.
우리 국민의 ‘빨리빨리’ 문화는 정치계에도 투영된다.
대의민주주의는 최소한 지금까지만 놓고 볼 때 가장 민주적인 제도다. 직접민주주의는 인구 규모와 커뮤니케이션 발달 정도 그리고 교통수단에 대한 접근성과 지리적 규모 등이 적절할 때나 제대로 작동된다. 게다가 일반 국민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힘든 사안에 대해서 국민의 ‘직접적 판단’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복잡하게 분화되고 전문화된 현대사회에서 직접민주주의가 최선의 민주주의 형태라는 주장은 동의하기 힘들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대의민주주의는 현재 존재하는 민주적 정치 질서 중 가장 잘 검증된 효과적인 제도다.
물론 대의민주주의도 단점은 있다. 대의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가장 큰 한계는 바로 ‘시간적 지연’에 의해 국민의 불만 혹은 불안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시간적 지연’이란 대의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요소인 책임성과 책임 귀속성에 의해 발생하는 ‘욕구 실현의 지연’을 의미한다. 유권자는 선거에서 자신의 정치 사회적 욕구를 가장 잘 실현시켜줄 적합한 인물을 선택하는데, 그 정치인이 선거에서 당선되더라도 유권자는 그 정치인이 진짜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지를 알 수 없어 일단은 지켜봐야 한다. 자신의 욕구 실현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해 선택했지만, 일단 당선된 후 바람과는 상반된 정치 행위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기대와 다르게 행동한다 하더라도 유권자는 당장 그 정치인을 어떻게 할 수 없다. 이런 경우 유권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다음번 선거에서 심판하는 것이다. 이를 대의민주주의에서는 책임 귀속성이라 한다.
다음 선거에서 심판하려면 유권자는 기다려야만 한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당선되기를 바랐던 정치인이 선거에서 패했다. 이 경우 역시 다음번 선거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여기서 ‘시간적 지연’이 발생한다. 즉, 유권자는 자신의 정치적·사회적 욕구 실현을 위해 특정 정치인을 선택하지만, 그 정치인이 당선되든 안 되든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서 일단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위 ‘대표자’와 ‘대표되는 사람’ 사이의 시간적 간극은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다.
그뿐 아니라 대의민주주의는 다양한 형태의 토론과 타협을 위한 시간도 필요하다. 따라서 대의민주주의는 욕구 충족과 사회적 문제 해결에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대의민주주의 ‘시간적 지연’ 현상은 의회민주주의 비효율성을 부각한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빨리빨리’ 문화가 만연된 곳에서는 이런 시간적 지연이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실망을 가중시킬 수 있다. 이는 제도적 국가·비인격적 국가에 대한 일반 대중의 실망으로 이어진다. 비인격적 국가란 사람이 아닌 제도에 의해 운영되는 일반적인 근대국가를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특정 정당 혹은 특정 정치인이 자신의 카리스마를 앞세우며 ‘시간적 지연’을 비판하고, 이런 대의민주주의의 문제점을 ‘기존 기득권의 정치’ 때문에 발생했다는 식으로 몰아붙이며, 자신은 ‘기득권 정치’를 타파해 ‘즉각적인 문제 해결’을 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을 펴면, 일부 대중은 이런 정치인 혹은 정치 집단에 적극 호응하게 된다. 이런 주장에 일부 국민이 쉽게 현혹되는 이유는, 이들 정치인이 자신의 능력을 ‘과대포장’ 혹은 ‘허위포장’하기 때문이다. 자신은 청렴하고, 사회에 존재하는 유형과 무형의 위기 상황으로부터 국민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식으로 포장한다. 이런 ‘허위’ 혹은 ‘과대’ 포장을 토대로, 특정 정치인은 자신의 카리스마를 만든다. 일반 대중은 이런 카리스마를 가진 정치적 지도자를 추종하게 된다. ‘만들어진 전지전능’에 현혹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근대적 비인격적 국가’는 ‘중세적 인격화된 국가’로 변한다. 한마디로, 일부 대중은 제도에 의존하는 ‘근대적 비인격적 국가’를 거부하고 대신 ‘인자하고 자상하며 청렴한 지도자’를 곧 국가 그 자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상황이 초래되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퇴보한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이 두 존재는 모두 제도에 의존해서 운영되는데, 이런 식으로 특정 정치인에 의존하는 현상이 나타나면 제도가 무력화될 수밖에 없다. 정권에 찬성하는 측과 정권에 반대하는 측 모두가 이런 식으로 정치를 바라보게 된다면, 민주주의와 법치주의 대신 혼란과 상대에 대한 증오가 그 자리에 둥지를 틀게 된다. 혼란과 상대에 대한 증오는 정치를 실종시킨다. 정치란 상대를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타협할 파트너로 바라봐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칸 영화제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한국 영화 100년 역사상 가장 큰 쾌거를 달성한 순간이다. 우리나라 영화가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되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국제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 국민의 영화에 대한 관심과 애착이 바탕이 됐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노년 영화팬 기억에 선명히 남는 영화들이 있다.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제임스 딘이 주연한 ‘이유없는 반항’이 바로 그런 영화에 해당될 것이다. 청소년 시절 반항기는,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한 일이다. 그런 시절의 반항은 이유가 없거나 이유가 불분명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청소년기 혹은 사춘기의 반항은 이유가 없을 수 있다. 이런 이유 없는 반항의 시기를 거쳐야만 인간은 좀 더 성숙해질 수 있다.
하지만 정치적 과정에서 특정 정치인을 이유 없이 좋아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정치적인 호불호는 분명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다. 막연한 기대감 때문에 혹은 그냥 잘할 것 같아서, 아니면 그가 청렴하다고 믿기에 좋아한다면 이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행위는 아니다.
정치를 표면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 내면을 보려고 노력했으면 좋겠다. 그래야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정치적 판단을 기대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우리 정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다. ‘이유 없는 지지’는 민주주의를 퇴보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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