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대 태종
고려 말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들은 조선이 건국되자 예전과 상황이 많이 달라졌음을 금세 알아차렸다.
조선은 약한 국방력을 가졌던 고려와는 너무도 달랐다.
과전법을 통한 경제적 안정을 토대로 강군을 보유한 조선이 두려워진 일본 국왕 원의지는 1411년(태종11년), 더는 조선을 침략할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조선에 사절단과 함께 코끼리를 선물로 보냈다.
코끼리를 처음 본 태종과 관료들은 크게 당황했다. 일본 국왕이 보내온 동물을 돌려보낼 수도 없어서 말을 관리하던 사복시에 코끼리를 맡겼다.
사복시는 마구간을 확장해 코끼리 집을 만들고, 사료로 콩을 먹였다. 문제는 코끼리가 하루에 콩을 81L나 먹는 다는 사실이었다.
활용 가치도 없으면서 곡식을 많이 먹는 코끼리는 왕실 재정을 어렵게 만드는 천덕꾸러기로 전략하고 말았다.
이듬해 공조전서 이우가 괴이한 모양의 코끼리가 있다는 소식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코끼리를 구경하러 왔다.
흐느적거리는 긴 코와 나무껍질 같은 피부를 보고 이우가 코끼리의 추함을 비웃으며 침을 뱉자, 화가 난 코끼리는 이우를 밟아 죽였다.
재판 과정에서 병조판서 유정현은 "코끼리는 이익도 없이 1년에 수백 석의 콩을 먹습니다. 그런데 사람까지 죽였으니 마땅히 코끼리도 죽여야 하나 이는 의도치 않은 살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국왕이 보낸 선물이라는 점을 고려해 전라도 해도로 이 코끼리를 유배 보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태종은 유정현의 의견을 따라 코끼리를 섬으로 유배보냈다.
유배지에 온 죄인을 관찰하고 보고해야 하는 책무에 따라 전라도 관찰사가 섬에 있는 코끼리에 대한 보고서를 올렸다.
"코끼리가 날로 수척해지고, 사람만 보면 눈물을 흘린다."라고 적힌 보고서를 읽은 태종은 미물이 고생하는 것에 안쓰러움을 표하며 코끼리를 뭍에 올라와 살게 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전라도 관찰사의 재량으로는 코끼리 사료를 감당할 수 없었다. 1420(세종2년), 전라도 관찰사는 더는 감당할 수 없다며 코끼리를 충청 / 경상도와 돌아가면서 키우자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에 따라 삼도를 돌며 고된 생황을 하던 코끼리는 공주에서 노비를 죽이는 살인을 또 저질러 다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후 세종이 물과 풀이 좋은 곳에서 코끼리를 병들어 죽게 하지 말라는 기록을 마지막으로 조선 최초의 코끼리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일본이 보낸 자객 동물 아냐? 이것????????-
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