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로그인

아이디
비밀번호
ID/PW 찾기
아직 회원이 아니신가요? 회원가입 하기

[개담] ‘2천년 욕받이 탄생’의 역사적 순간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의 담론

‘제2의 조조’ 같은 행태에 그저 실소만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 조조(曹操‧생몰연도 서기 155~220)는 무려 2천년 동안 뭇 사람들로부터 일관되게 욕먹는 기네스북감 인물이다.

 

조조는 살아생전에도 이미 욕받이 챔피언이었다.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신원미상 인물이 쓴 조만전(曹瞞傳)은 “그 혹독하고 잔인하고 이리저리 속임이 모두 이와 같았다”고 혹평했다. 후대의 송(宋)나라 때는 삼국지 연극에서 조조 역할을 하던 배우가 어찌나 실감나게 메소드 연기를 했던지 성난 관객들에게 맞아죽는 일도 있었다.

 

명말청초(明末清初)의 작가 포송령(蒲松齡)이 지은 괴담집 요재지이(聊齋志異)에서는 아예 ‘개’로 등장한다. 한 남성이 전생의 인연으로 조조의 며느리 문소황후(文昭皇后) 견씨(甄氏)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려 하자 저승에 있던 조조가 개 같은 모습으로 부활해 발광하며 훼방 놓는다는 에피소드다. 삼국지가 큰 인기를 끈 한일(韓日)에서도 조조는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받는다. 대표적 작품이 판소리 적벽가(赤壁歌)다.

 

조조가 이처럼 푸짐하게 욕잔치 주인공이 된 결정적 원인은 그의 ‘내로남불’이다. 대표적 사례가 협천자(挾天子)와 칭왕(稱王)이다. 유비(劉備)는 진심으로 한(漢)에 충성하고 손권(孫權)은 별다른 입장을 표하지 않은 반면 조조는 “나는 진심으로 황제를 존경해. 나 빼고 전부 역적” 외치면서 대놓고 반역을 꾀했다.

 

서기 195년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 헌제(獻帝)는 장안(長安)을 떠나 낙양(洛陽)에 돌아왔다. 역적 이각(李傕)‧곽사(郭汜)의 패악질에 지쳤던 헌제는 자신을 지켜줄 제후가 절실했다. 이에 조조는 선수 쳐서 196년 7월 낙양에 입성해 협천자하고 사공(司空)‧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됐다.

 

황제라는 보물단지를 껴안게 된 조조는 천자의 이름을 빌어 “너 역적, 너도 역적, 에브리 역적” 사형선고 남발했다. 상당수 제후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졸지에 역적마크 선명히 찍혔다. 동시에 조조는 “조국에 충성하는 내 이름은 조충신. 아아 나는 너무 충성스러워” 큰소리 뻥뻥 쳤다.

 

그러나 실상 헌제는 조조에 의해 사실상 감금상태였다. 헌제는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온갖 산해진미를 맛보긴 했으나 사방에 득실득실한 조조 프락치들이 그를 24시간 365일 감시했다. 헌제가 유일하게 속내를 말할 수 있는 공간은 ‘뒷간’이 전부였다. 게다가 헌제는 그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의견을 개진하려 하면 앞뒤로 도열한 조조 부하들이 “응?” 눈 부라리며 검에 손 갖다 댔다.

 

결국 조조는 216년 “이 충신에게 감투 좀 주쇼” 헌제를 겁박해 스스로를 위왕(魏王)에 봉했다. 당시 한나라는 고조(高祖)의 유훈에 따라 국성(國姓)이 아닌 자는 왕이 될 수 없었다. 입으로는 충신임을 주장하고 유비‧손권을 역적으로 몰면서 정작 조조 그 자신이 역적 행보를 노골적으로 걸은 빼고 박도 못할 내로남불‧조로남불이었다.

 

조X혁신당이 최근 내로남불 논란에 휩싸였다. 한미동맹을 가스라이팅(gaslighting)으로 폄훼하면서 정작 제 아들은 미국 국적을 취득한 인물, 검찰 개혁을 주장하면서 정작 검사 출신 배우자는 전관예우 의혹을 받는 인물이 비례대표 당선권 순번을 배정받은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향후 2천년 동안 욕잔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새 인물의 탄생을 목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역사적인 순간이라 해야 할지 침을 뱉어야 할지 가스라이팅 당한 듯 도통 헷갈린다. 생각해보니 후자(後者)가 맞는 것 같다. “A Twoeh” 아, 생각해보니 침 뱉으면 벌금 내야 한다. 진퇴양난이다.

 

20000.png.jpg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댓글
0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