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들 담은 담론
자발적 존경 받은 여자와 욕받이 자처한 여자
자연스레 명품백 받은 인사, 제정신인지 의문
<청렴결백하게 백성 조세부담 낮춘 고다이바>
고다이바 부인(Lady Godiva) 이야기는 현 영국 코번트리(Coventry)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민담(民譚)이다.
설화에 의하면 고다이바 부인은 서기 11세기 무렵 코번트리(당시의 머시아)를 다스린 레프릭(Leofric) 백작의 부인이었다. 레프릭은 환갑을 넘긴 노인이었던 반면 고다이바 부인은 16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레프릭은 자신의 장원(莊園)에서 일하는 농노(農奴) 등을 살인적 세율로 가혹히 다스렸다.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매우 검소했던 고다이바 부인은 신음하는 백성들을 안타깝게 여겼다. 결국 그녀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제발 세금을 낮춰 저들을 구원해주세요” 남편에게 탄원했다.
탐욕스런 귀족이었던 레프릭은 듣는 체 마는 체 했다. 고다이바 부인이 포기하지 않고 거듭 간청하자 레프릭은 어마어마한 조건을 내걸었다. “네가 나신(裸身)으로 말(馬)에 올라 내 영지를 한 바퀴 돌면 허락하마”
다양한 패션이 유행하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중세여성에게 외간남자들 앞에서 속살 대부분을 내비치라는 건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고다이바 부인은 한창 감수성(感受性) 예민할 시기인 이팔청춘(二八靑春) 묘령(妙齡)이었다. 레프릭은 어린 아내가 차마 제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그런 무례한 조건을 내건 것이었다.
그러나 어질고 용감했던 고다이바 부인은 자신의 순결(純潔)을 희생해 백성을 살리는 쪽을 택했다. 그녀가 대낮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서 오로지 긴 머리카락만으로 주요부위 가린 채 말 등에 오르자 민가(民家)의 남성들은 결코 눈 뜨지 않을 것임을 맹세했다.
남성들은 모두 일손 놓고 집 안으로 들어가 문 걸어 잠그고 창문 가린 채 성녀(聖女)의 행진이 끝나기만을, 신분‧지위가 아닌 마음이 고귀한 백작부인의 치욕이 얼른 끝나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단 한 사람, 호기심 참지 못하고 몰래 커튼 틈으로 부인을 훔쳐본 재단사 톰(Tom)은 천벌(天罰) 받은 듯 강렬한 햇빛에 그대로 실명(失明)했다.
부인의 거룩한 희생에 진심으로 감화된 레프릭은 아내의 청 대로 조세(租稅)부담을 대폭 낮춰 백성을 살리고 선정(善政) 펼쳤다.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많은 이들이 고다이바 부인의 정신을 추앙 중이다. 지금도 코번트리의 상징은 말을 탄 여인 등이며 17세기부터 여성들이 승마해 시가지 누비는 행사가 정례화 됐다고 한다.
고다이바 부인의 거룩한 행진은 영국 화가 존 콜리어(John Collier)의 1897년작 유화 캔버스그림 ‘레이디 고다이바(Lady Godiva)’ 등으로 작품화됐다. 맹약 어기고 부인을 훔쳐봤다가 응보(應報)를 지게 된 재단사의 교훈은 ‘피핑 톰(Peeping Tom)’ 고사(故事)로 전해지고 있다.
<뇌물 강요하며 백성 고혈 빨아댄 에르제베트>
바토리 에르제베트(Báthory Erzsébet‧생몰연도 서기 1560~1614)는 헝가리 출신의 귀족여성이었다. 피의 백작(Blood Countess)이라는 별칭으로 불렸으며 후일 흡혈귀(Vampire) 전설의 모티브가 됐다.
에르제베트는 트란실바니아(Transilvania) 최대 명문가인 바토리가(家)에서 태어났다. 15세 무렵 헝가리의 나더슈디 페렌츠(Nádasdy Ferenc) 백작과 결혼했다. 지금도 구미(歐美)는 부부동성(夫婦同性)이 일반적이지만 에르제베트는 남편보다도 지위가 높았기에 바토리라는 성(姓)을 그대로 썼다.
전쟁터 누비던 남편은 1604년 전사(戰死)했다. 성주(城主)가 된 에르제베트는 고부갈등 겪어온 시어머니를 내쫓았다.
젊은 시절 상당한 미모였던 에르제베트는 나이 먹을수록 아름다움을 잃을 거란 공포에 내몰렸다. 그는 어느 날 자신의 머리 빗기던 시녀(侍女)가 사소한 실수를 하자 편집증적 화를 내며 뺨을 때렸다. 반지에 긁힌 시녀의 피가 자신에게 조금 튀었고 이를 닦아낸 에르제베트는 “예전보다 하얘진 것 같네” 착각했다. 에르제베트는 그 날로 해당 시녀를 살해한 뒤 온 몸에 ‘피칠갑’ 하고서 거울 보며 환희(歡喜)에 젖었다.
에르제베트는 이후 문자 그대로 백성들 고혈(膏血)을 빨아냈다. 그는 제 장원의 농민들에게 위계(位階)에 의한 유무형적 협박 가하며 그 딸들을 바칠 것을 강요했다. 백성들로선 선택지가 없었기에 자식을, 차마 죽을 거라곤 생각 못하고, 뇌물로 바쳤다.
처녀들은 입성(入城)과 동시에 무시무시한 고문대에 매달렸다. 이들이 사방이 쇠가시인 인간새장에 갇혀 이리저리 찔리며 피 흘리면 에르제베트는 그 밑에서 그 피로써 목욕 즐겼다. 나중엔 처녀 수십 명을 모아 최후의 만찬 먹인 뒤 옷을 모조리 벗기고 사지(四肢)를 도려내고서 그 피의 하천 사이로 헤엄쳤다. 아직 목숨이 붙은 처녀의 신음소리 들으면 극도의 오르가즘(Orgasme)도 느꼈다고 한다.
한 번 들어간 처녀들이 도통 나올 생각을 않자 백성들은 에르제베트로부터 불이익을 당하든 말든 딸들 상납을 중단했다. 그러자 에르제베트는 이번엔 귀족 여학교를 설립하고서 귀족들로부터 그 여식(女息)들 상납 받아 무참히 살해했다.
고다이바 부인과는 감히 비교하는 게 불경(不敬)스러울 정도로 제 지위 이용해 뇌물 받고 고혈 빨던 에르제베트는 결국 엄벌(嚴罰)에 처해졌다. 한 상납자의 딸은 극적으로 탈출해 이 범죄행각을 고발했다. 1610년 12월 출동한 헝가리군은 에르제베트의 성탑(城塔) 등에서 무수한 시신‧유골 그리고 서서히 피가 빨리던 생존자들 발견했다.
1611년 1월 재판에서 공범(共犯)들은 모조리 처형됐으며 정범(正犯) 에르제베트는 종신형(終身刑)에 처해졌다. 햇빛조차 들지 않는 감옥에 갇힌 그는 호사스런 목욕은커녕 겨우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밥그릇만 개구멍으로 제공받으며 용변도 감옥 안에서 해결했다. 에르제베트는 감금 4년만에 비참히 쓸쓸이 사망했다. 모방범죄 우려한 당대 당국에 의해 은폐됨에 따라 무덤 위치는 어디이고 그의 후손은 누구인지 오늘날까지도 알 길 없다.
<매관매직 있었나 없었나 해명해야>
대통령실 고위인사의 명품가방 수수 영상이 파문 일으키고 있다. 비록 해당 영상이 함정취재에 따른 위법(違法)소지가 있다곤 하나, 이를 본 상당수 국민으로선 “저렇게 쉽게 받는데 촬영되지 않은 뇌물수수는 얼마나 많을까” “얼마나 뒤에서 많이 받아먹었을까”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 사건이 정상적인 세상과는 억만 광년 떨어진 이들의, 최소한의 도덕성‧정무(政務)감각마저 결여된 무지(無知)의 소산(所産)이라고 하더라도 이해해줄 사람은 많지 않다. 만약 뇌물수수에 상응하는 대가 제공이 있었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수백만원 명품백 등과 맞바꾼 21세기판 매관매직(賣官賣職)은 공공기관의 전문성 결여, 거금 투자한 뇌물제공자의 ‘본전 뽑기’만을 야기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혈세(血稅)낭비‧세금폭탄으로 직결된다. 제 고혈 빨리면서 그 원인 제공 의혹 인물에게 박수 칠 사람은 많지 않다.
대통령실은 침묵으로 일관할 게 아니라 사실이 아닌 점 있다면 적극 해명하고,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진심으로 사죄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라도 만인(萬人)의 손가락질 받은 에르제베트가 아닌 만인의 자발적 존경 받은 고다이바 부인 정신을 따라야 한다. 제 눈‧귀‧입 닫고 아웅 한다 해서 남들이 안 보는 게 아니다. 현명한 처신 통해 국민이 자발적으로 제 눈귀 가리게 해야지 “난 모른 척 할 테니 너도 모른 척 해라” 식 태도는 안 된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