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전무퇴‧살신성인으로 외침(外侵) 막아낸 화랑들
백선엽 장군의 솔선수범‧구국정신 길이 무궁하길
필승 기본은 장졸 간 신용‧신뢰
고래(古來)로 군(軍)의 생명은 상명하복(上命下服)이다. 동시에 상하 간 ‘신용(信用)’이다. 지휘관은 휘하에게 “나를 믿고 따르면 반드시 승리해 금의환향(錦衣還鄕)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 무능한 주제에 구시대적 엘랑비탈(élan vital) 즉 ‘닥돌’만 요구하면 사기(士氣)는 극도로 저하돼 패하게 된다. 따라서 상명하복은 신용을 바탕으로 해야 성공한다.
신용을 지킨 고대의 대표적 장교집단은 화랑(花郞)이 있다. 임전무퇴(臨戰無退) 등 세속오계(世俗五戒) 중시한 화랑은 필요 시 즉각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에 나섰다. 뜻밖의 거센 저항 직면해 엘랑비탈이 필요할 경우, 화랑은 병사들 내모는 대신 자신들이 앞장서서 ‘1인 돌격’에 나섰다. 이들은 돌격 후 적진 와해시키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의 운명만을 스스로 택했다.
화랑정신은 나라와 민족 운명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선 서기 670~676년의 나당(羅唐)전쟁 때 특히 빛을 발했다. 삼한(三韓)통일 이전 신라‧고구려‧백제에게 있어서 각 상대는 서로 다른 뿌리 가진 외국(外國)이었다. 이들은 고구려‧신라처럼 중원(中原)왕조와 손잡거나, 백제처럼 왜국(倭國)과 동맹하면서 이합집산(離合集散) 거듭했다. 승자는 신라였다.
허나 당나라는 언제 그랬냐는 듯 협약 파기하고 한반도를 전격 침공했다. 병력은 인해전술(人海戰術) 고장답게 수십만에 달했다. 이제 막 전쟁 끝낸 신라 및 각 국 부흥군은 ‘영끌’해봐야 수만에 불과했다. 설상가상 국고(國庫)는 바닥 직전이고 민군(民軍)은 모두 지쳐 있었다.
나당전쟁의 비결 또한 ‘신용’
기적 같이 전황(戰況) 뒤집은 건 역시나 장졸(將卒) 간 ‘신용’이었다. 화랑 김원술(金元述‧생몰연도 ?~?)은 성골(聖骨) 다음 순위 왕위계승권자 신분인 진골(眞骨)이었음에도, 672년 석문전투(石門戰鬪)에서 죽지도 못하고 패하자 자결해 본분을 다하려 했다. 삼한통일 과정에서 당나라에 투항한 연남생(淵男生) 등 사례에서 보듯, 고대에 귀족계층 자진(自盡)은 그 시도조차도 매우 드문 사례였다.
비록 원술은 부친으로부터 “저 혼자 살아 돌아왔다니 수치스럽다. 내 아들이 아니다” 족보에서 삭제됐으나, 그의 솔선수범 본 병사들은 사기백배해 675년 매소성전투(買肖城戰鬪)에 백의종군(白衣從軍)한 원술을 뒤따랐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이근행(李謹行)의 20만 대군 격파해 전쟁 주도권을 쥐게 된다.
향가(鄕歌)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로 잘 알려진 화랑 죽지랑도 나당전쟁에서 크게 활약했다. 그는 나당전쟁 개전(開戰)과 동시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로 진격해 7개 성지(城池)를 탈환했다. 웅진도독부는 당나라가 의자왕(義慈王) 태자 부여융(扶餘隆‧615~682)을 앞세워 옛 백제지역에 세운 괴뢰국이었다. 승리 배경엔 상당수 백제 유민(流民)들이 신라에 협조한 게 컸지만, 죽지랑의 임전무퇴‧솔선수범도 크나큰 역할을 했다.
나당전쟁을 총지휘한 김유신(金庾信‧595~673)도 화랑 출신이었다. 그는 상술한 아들 김원술을, 아버지로서가 아닌 국가지도부로서, 내침으로써 내외(內外)의 모범 보였다.
김유신이 만약 그 때 아들을 감쌌더라면 병사들은 “저치들 전쟁에 우리만 죽어나가네” 사기가 급락하고 탈영(脫營)이 속출했을 터였다. 허나 아들에게 사실상의 사회적 사형선고 내림에 따라 남편‧자식 잃었던 민군은 상하(上下)가 일심동체(一心同體)가 돼 목숨 돌보지 않고 싸웠다. 당나라도 “저런 장졸들이 있으니 이기긴 어렵다”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당나라는 전쟁 전부터 이미 김유신의 능력 꿰뚫어보고 그를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 식읍(食邑) 2000호에 봉해 꼬드기려다 실패했다. 고려 때 편찬된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김유신이)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지략과 장보고(張保臯)의 용맹이 있었다 해도 중국서적이 아니었다면 모두 사라져 후세에 알려지지 못했을 것”이라며 삼한통일 후 역대 중원왕조들도 김유신을 대단히 고평가했음을 드러냈다.
김유신의 명성은 현해탄(玄海灘) 건너 일본에도 전해졌다. 나라시대(奈良時代) 때인 760년 발간된 후지와라씨(藤原氏) 전승(傳承) 도지가전(藤氏家傳)은 김유신에 대해 “고구려 연개소문(淵蓋蘇文), 백제 성충(成忠), 당나라 위징(魏徵)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준걸(俊傑)”로 기록했다.
반만년 한민족의 임전무퇴 정신 계승되길
지난 ‘잃어버린 5년’ 과정에서 철저히 매도(罵倒)당하고 격하(格下)됐던 고(故) 백선엽 장군(1920~2020)이 현 정부 들어 부활하고 있다. 오늘(29일)은 육군사관학교가 과거 삭제됐던 ‘백선엽 웹툰’을 복구했다는 소식 들린다.
이상하리만치 북한‧중국 등 편들면서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일부 세력들 빼고, 많은 국민들에게 고인은 6‧25 당시 나라를 구한 구국영웅(救國英雄)으로 기억되고 있다. 독보적인 지휘력과 구국의 집념, 특히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에서 앞장서서 돌격했던 거성(巨星)으로 추앙받고 있다.
고인은 북한 김일성의 기습남침(南侵) 발발하자 유엔연합군과 함께 낙동강전선(前線)을 사수했다. 백선엽 장군은 1950년 8월 3~29일 다부동전투(多富洞戰鬪) 당시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1사단을 지휘해 북한군을 방어했다. 만약 그 때 전선이 뚫렸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없고 우리 모두 봉건지주(封建地主)적 혈통세습독재 겪고 있었을 게 분명하다.
다부동전투 승리 원동력은 다름 아닌 ‘화랑정신’이었다. 2010~2011년 중앙일보 연재 회고록(回顧錄) 및 주변 여러 증언에 의하면, 고인은 북한군 파상공세(波狀攻勢) 앞에 아군병력 철수상황에 직면했다. 지치고 굶주린 병사들은 포기 직전까지 갔다. 이에 고인은 488고지(高地) 탈환을 위해 권총을 빼들고 병사들 선두(先頭)에 섰다.
백선엽 장군은 돌격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 “모두 그간 잘 싸워줘서 고맙다. 허나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곳이 없다. 밀리면 망국(亡國)이다. 미군(美軍)은 우릴 믿고 싸우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남아(大韓男兒)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앞장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 1사단은 한 달에 걸친 북한군 3개 주력(主力)사단 공세를 막아내 마침내 낙동강전선을 지켜냈다.
고인의 손자뻘인 필자도 한 때 수년 동안 대한민국 안보(安保) 위해 대북(對北)방송 업무 했던 터라, 고인에 대한 존경심이 평소 매우 컸다. 그에 비례해 고인의 명예가 훼손되는 과정이 너무나 안타깝고 또 분했었다. 고인께서 영면(永眠)에 드시고 난 뒤이나마 업적이 복권(復權)되는 게 반갑고 또 반가울 따름이다. 대한민국은 하나뿐인 우리 나라.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고인, 나아가 반만년 한민족의 구국정신 계승해 대한민국이 길이 무궁(無窮)하길 바라고 또 바란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백선엽 장군의 선봉돌격은 현대전에서 그 예를 찾아보기 아주 드문 놀라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