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첫 100만 동원 부견‧전진, 자만에 자멸
총선 앞 與 중진들 “자만 안돼” 준엄한 경고
‘靑 입성’ 부견을 기다린 총선
진(晉)나라는 후한(後漢) 말 삼국시대를 통일한 사마씨(司馬氏) 왕조다. 400년 한나라에 염증 느낀 상당수 백성은 위촉오(魏蜀吳)가 아닌 사마씨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서진(西晉) 세조(世祖) 사마염(司馬炎)은 청담사상(淸談思想)에 찌들어 나라를 도탄으로 몰고 갔다. 해당 사상은 무위지치(無爲之治)를 문자 그대로 해석했다. 대다수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은 청담사상 추종하며 오석산(五石散)이라는 마약에 취하거나, 남성이 여성복 입고 화장하며 일손을 놨다.
조정에선 밑바닥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휴식 있는 저녁” “저녁 있는 삶” “워라밸(work-life balance)” 등 뜬구름 잡는 소리만 횡행했다. 먹고 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이 동요(動搖)하고, 설상가상 주변 이민족(異民族)들까지 대거 침공함에 따라 오호십육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기간 서기 304~439)는 개막했다.
진나라는 장강(長江) 일대로 쫓겨나 동진(東晉) 정권을 수립했다. 광활한 장강 이북 영토는 백성들 환호 속에 전진(前秦)의 차지가 됐다. 동진은 멸망 일보직전인 반면 ‘100만 대군’ 보유한 전진 세조(世祖) 부견(苻堅‧생몰연도 서기 338~385)은 사실상의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전진에게 남은 건 마치 오늘날의 총선처럼 장강 이남 백성들 선택을 받아 ‘제1야당’ 동진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당대 식자(識者)들 사이에서도 “천하를 통일하는 건 전진”이라는 관측이 높았다. 티베트계 저족(氐族) 출신 부견은 이민족하면 흔히 떠올리는 ‘근육뇌’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저돌적이면서도 한편으론 포용력 있는 정치‧외교로 자신 생전에 이미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를 열었다.
선비족(鮮卑族) 모용부(慕容部)‧토욕혼(吐谷渾) 등 타 이민족들은 속속 전진에게 복속됐다. 왕맹(王猛) 등 서진 원주민 출신 영웅호걸들도 부견에게 충성을 다했다. 얼굴에 난 수염 뽑고 분칠한 채 백성들 약탈하던 여러 호족(豪族)도 부견에게 정리됐다.
“전략부터 치밀히 세워라”
전진 국력(國力)은 막강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훗날 오호십육국시대를 끝내는 수(隋)나라보다 약 200년 앞서 ‘100만 대군(大軍)’을 동원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오늘날 청와대 격인 고도(古都) 장안(長安)에 정착한 부견은 자연히 남쪽으로 고개 돌렸다.
당초 전진에선 ‘신중론’이 거셌다. 앞뒤 재지 않고 돌진하는 대신 전략을 세워 동진을 쳐야 한다는 여론이었다. 혹자(或者) 표현 빌리자면 말 그대로 백관도, 어머니도, 동생도, 자식도, 며느리도, 사위도, 누렁이도 입 모아 “머리를 씁시다” 외쳤다.
당대에 명망 높던 고승(高僧) 석도안(釋道安)도 “아서라” 말렸다. 상술한 왕맹도 사망 직전까지 “신중하라” 주문했다. 통일전쟁은 때가 되면 반드시 치러야 할 일이지만, 압승(壓勝) 비책부터 마련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입장이었다. 참고로 전진은 고구려에 대한 불교 전파, 신라와의 국교(國交) 등 우리와도 밀접한 역사가 있다.
사실 석도안‧왕맹 등의 말은 하나도 틀릴 게 없었다. 부견도 처음엔 머리 긁적이며 자중(自重)했다. 허나 왕맹 사후(事後) 사달은 기어이 벌어졌다. 주융(朱肜) 등 일부 신하들은 “폐하는 천하무적” “지금 장강 이남은 부견신드롬 한창” “백성들 광장 모여 ‘부견님 날 가져요’ 집단시위 중” 등 미확인 속보(速報) 내보냈다.
원래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습성이 있다. “독약은 달고 비약(祕藥)은 쓰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천하가 이미 제 것이라 착각한 부견은 재까닥 “좋아 빠르게 가” 호령(號令)했다. 겉으로만 전진에 복종하는 척 하던 모용수(慕容垂) 등 타 이민족들도 “우유빛깔 부견님” 외치며 부추겼다. 참고로 모용수는 부견이 동진에 박살나자 기다렸다는 듯 후연(後燕)을 세우고 독립하게 된다.
“자만은 곧 패배” 정확했던 예측
부견이 장강 민심 얻기 위해 동원한 병력은 상술한 것처럼 ‘100만’ 이상이었다. 사서(史書)에 기록된 이 대군은 호왈(號曰)이 아닌 사실이었을 것이란 게 오늘날 학계 중론이다. 인류 최초의 100만 대군인 이 원정군(遠征軍)은 선봉 20여만, 치중부대(輜重部隊‧병참부대) 포함한 보기(步騎) 약 87만 등으로 구성됐다.
반면 이에 맞서는 ‘제1야당’ 동진은 10여만에 불과했다. 누가 봐도 전진의 완승(完勝)으로 끝날 게임이었다. 부견도 “난세(亂世)에서의 패배는 곧 멸족(滅族)”이라는 점 까마득히 잊고 의기양양히 웃었다.
그런데 반전(反轉). 결론부터 말하자면, 앞서 모용수 부분에서도 암시했으나, 남북조가 격돌한 비수대전(淝水大戰)은 ‘부견‧전진의 참패’로 끝났다. 원인은 역시나 백관도, 어머니도, 동생도, 자식도, 며느리도, 사위도, 누렁이도, 백구도, 냥이도 지적한 것처럼 ‘자만심(自慢心)’이었다.
망해가는 나라‧세력에도 반드시 능신(能臣) 셋은 있다고, 당시 동진에는 재상 사안(謝安)이란 인물이 있었다. 비수대전 벌어지자 대도독(大都督)으로 임명된 사안은 전장(戰場)을 총괄지휘하는 한편, 야전(野戰)은 동생 사석(謝石), 조카 사현(謝玄) 등에게 맡겼다.
전진‧동진은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했다. 허나 정면승부에서 동진이 절망적이라는 건 삼척동자(三尺童子)도 알았다. 이에 동진 측은 부견에게 “우리 둘 다 싸우다 지쳤다. 그 쪽이 군사를 잠깐 물리면 우리가 그곳으로 갈 테니 거기서 멋지게 한 번 대결하자”고 제안했다.
100만 대군 지휘하는 부견은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의 마음엔 “어떻게 하면 천하통일 대업(大業)을 드라마틱하게 이뤄 전설(傳說)을 남길까” 뿐이었다. 마치 서진의 ‘약쟁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현실과 백만광년 떨어진 이상(理想)에만 젖은 부견은 “나는 관대하다” 끄덕이며 거짓말처럼 군사를 후퇴시켰다.
부견과 달리 밑바닥 군심(軍心)은 흉흉해질 대로 흉흉한 상태였다. 부견에게 실망하고, 장거리원정에 지치고, 가족들 그리워진 병사들은 지도부의 “후퇴” 명령을 일시후진이 아닌 종전(終戰) 의미로 받아들였다. 명령체계가 명확했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겠으나, 전진은 이미 과거 서진처럼 어지러울 대로 어지러워진 상태였다.
장교들의 “동작 그만” 호령에도 병사들은 적을 등진 채 고향 앞으로 돌격하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진에서 전진으로 투항한 항장(降將) 주서(朱序)는 “동진이 이겼다!” “동진군이 우리를 추격한다!” 소리쳤다.
與 중진들의 경고
그 다음 수순은 안 봐도 뻔하다. 주서의 헛소문은 삽시간에 부풀려져 병사들 사이에 퍼졌다. 놀란 졸병들은 병장기(兵仗器)조차 내버린 채 달아나며 무질서하게 뒤엉켰다. 상당수 병사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아군에게 목숨 잃었다. “이거 실화냐” 눈을 의심하던 동진군도 정말로 추격에 나서서 전진군 등짝을 꿰뚫었다.
이 승률 희박한 도박에 나선 사안도 놀라긴 매 한가지였다. 동진 승전보(勝戰報)가 올 무렵, 사안은 애써 침착한 척하며 막부(幕府)에서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이윽고 자신이 도박에서 이겼다는 소식 오자 사안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우리 애송이들이 이겼다는구려” 한마디 하면서도, 기쁨을 주체 못해 바둑돌 두는 손이 떨렸다고 한다. 그는 바둑이 끝나 손님을 전송하자 그제야 미친 듯 춤추며 환희(歡喜)에 울부짖었다고 한다.
부견은 일장춘몽(一場春夢)에서 그치지 않고 상술한 대로 죽임 당했다. 그간 복종시켰다 믿었던 여러 이민족 반란에 수도 장안마저 버려두고 달아는 그는, 끝내 강족(羌族)의 후진(後秦)에게 붙잡혀 참수됐다. 전진은 비단 부견 사망에서 그치지 않고 건국 40여년만인 서기 394년 멸망했다.
국민의힘 주류(主流)에서 내년 총선 낙관론(樂觀論)이 적지 않은 분위기다. 진심인지 아니면 누군가에 대한 ‘충성경쟁’ 차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당수 주류는 ‘수도권 승리’ 주장하며 으쌰으쌰하고 있다. 일부는 ‘엄카(엄마카드)의 힘’으로 이제 막 중앙정계 입문(入門)한 이들이다.
허나 나경원 전 원내대표 등 중진(重鎭)들 사이에선 “예전 우리 선거 실패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자만이라고 생각한다. 180석 운운하다가 완전히 실패한 20대 선거(총선)가 있었다. 늘 조심해야 한다”는 고언(苦言)이 잇따른다. 부견은 누가 봐도 천하의 주인이 될 것 같았으나 어처구니없는 자만에 목숨 잃고, 그 세력마저 덩달아 소멸한 바 있다. 비수대전은 결단코 재현(再現)되어선 안 된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자만하는게 아니라 자기들끼리만 누리는 못된 의미의 정예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