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수습 솔선수범에 금수들 악소문 시달린 주아부
오늘날 양효왕들, 입 닫고 정계 첫 봉사 洪 본받아야
대쪽 같은 주아부
예나 지금이나 재난수습에 나선 이를 격려하고 돕지는 못할망정 갖은 트집 잡아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도출(導出)해내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은 있어왔다. 전한(前漢)의 명장(名將) 주아부(周亞夫‧생몰연도 ?~기원전 143)도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다.
주아부는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亂) 진압에서 솔선수범(率先垂範)했다. 그러나 정적(政敵)들은 주아부가 재해수습 과정에서 ‘황제의전’을 받았다거나 ‘폼만 잡았다’는 식의 헛소문을 퍼뜨렸다. 나아가 이를 “죽어서라도 모반(謀反)하려는 것 아니냐”는 황당무계한 주장과 연결지었다.
주아부는 전한 개국공신(開國功臣)인 무후(武侯) 주발(周勃)의 아들이었다. 부친의 군사적 재능, 강직한 성품을 이어받았는지 주아부는 각종 재난에서 크게 활약했다.
기원전 159년 북방 유목민족 흉노(匈奴)가 전한 일부지역을 침략하자 주아부는 출정했다. 한나라 5대 황제 문제(文帝)는 군심(軍心)을 위로하기 위해 전방을 찾았다. 다른 장수들이 이끄는 부대는 진문(陣門)을 활짝 열어젖히고서 천자를 영접했으나, 오직 주아부의 세류영(細柳營)만은 달랐다.
주아부는 전투태세를 유지토록 휘하에 지시했다. 또 문제의 사신이 부절(符節‧신분증)을 보여주자 비로소 진문을 개방했다. 천자가 들어서자 군중(軍中)에선 말 타고 내달릴 수 없는 규칙을 들어 하마(下馬)할 것을 요구했다. 천자가 걸어 들어와도 엎드리는 대신 완전무장한 채 가볍게 고개만 숙였다. 주아부는 군법(軍法)에 명시된 전시(戰時)상황 절차를 철저히 준수했다.
다른 범용(凡庸)한 황제였다면 이 무례한 신하를 당장 물고(物故)를 내고도 남았을 터였다. 그러나 문경지치(文景之治)를 이룩한 명군(明君) 문제는 도리어 기뻐했다. 그는 “이런 철통같은 부대가 있으니 짐(朕)이 근심할 게 무엇 있으랴”며 크게 감탄했다.
문제는 태자(太子)에게 위급 시 주아부를 찾을 것을 당부했으며, 주아부에겐 대장군(大將軍)‧표기장군(驃騎將軍) 못지않은 군권(軍權)의 거기장군(車騎將軍) 작위를 내렸다. 약 300년 뒤 후한(後漢) 말 조조(曹操)도 질서정연한 서황(徐晃)의 부대를 보자 “주아부의 기풍(氣風)을 갖췄다”고 찬탄할 정도로 주아부는 명장의 대명사처럼 자리 잡았다.
재난수습에 앞장서다
문제 사후(死後) 6대 황제 경제(景帝)가 취임하면서 주아부의 삶에는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기원전 154년 여러 황실(皇室) 종친(宗親) 출신 제후왕(諸侯王)들이 일으킨 오초칠국의 난이 발발했다. 주동자는 한고조(漢高祖)의 조카로서 오왕(吳王)에 봉해졌던 유비(劉濞‧기원전 216~기원전 154)였다.
유비는 종가(宗家) 격인 숙부집안과 여러모로 악연이 깊었다. 문제 시절 유비의 아들 유현(劉賢)은 수도 장안(長安)을 찾아 문제의 태자 유계(劉啟)와 함께 육박(六博‧주사위놀음 비슷한 놀이) 대결을 했다. 당초 분위기는 화기애애했으나 승부욕이 과열되면서 사달이 났다. 놀이에서 지게 된 유계는 분개(憤慨)해 판을 엎었다.
그런데 육박판이 하필 유현의 머리에 맞아 유현은 그 자리에서 요절(夭折)했다. 졸지에 어이없이 아들을 잃게 된 유비 부부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크게 당황한 문제는 사과했지만 유비는 그 때부터 칭병(稱病)하며 입궁(入宮)하지 않았고 조회(朝會)에도 불참했다.
경제 즉위 후에도 악연은 지속됐다. 조정대신으로서 경제의 두터운 신임을 받던 조조(鼂錯‧?~기원전 154)는 삭번(削藩)을 주장했다. 제후왕들로부터 행정권‧군권‧봉지(封地)를 몰수해 군국제(郡國制)를 폐지하고, 황제가 직접 전국각지를 직할(直轄)통치하는 군현제(郡縣制)를 확립하자는 것이었다.
사실 군현제 자체는 나쁠 게 없었다. 제후왕에게 상당량의 자치권, 작위 혈통세습을 허용하는 군국제는 언제든 반란을 야기해 백성을 전란(戰亂)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반면 황제 대리인 격이자 임기에 제한이 있는 태수(太守)‧현령(縣令)을 통해 황제가 직접통치하는 군현제는, 물론 암군(暗君) 권력독점에 의해 어느 군국‧군현 가릴 것 없이 온 천하가 폭정(暴政)에 휘말릴 위험은 있지만, 또 치세(治世)가 아닌 혹세(惑世)에선 결국 삼국지(三國志) 같은 사태가 빚어지지만, 명군 치세라는 가정 하에서 변란 가능성은 낮다.
실제로 전한은 7대 황제 무제(武帝) 이후 군현제를 확립해 후한 말에 이르기까지 상당 기간 태평한 세월을 열었다. 제후왕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이들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았다. 전한 중~말기 각 제후국 살림은 태수‧현령과 마찬가지로 황제가 직접 임명한 국상(國相)이 도맡았다. 병권(兵權)은 황제가 따로 임명한 도위(都尉)가 잡았다. 만약 제후왕이 국상‧도위 업무에 월권(越權)한다면 이는 황제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됐다.
조조의 개혁안이 문제가 된 건 너무나 급진(急進)적이었다는 것이다. 삭번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먼 훗날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서기 927~976)은 개국공신들을 모아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시게 한 뒤 인정과 협박으로 구슬러 술김에 낙향(落鄕) 약속을 이끌어내는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을 통해 겨우 삭번에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조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권력을 반납하라고 제후왕들을 을러댔다. 최종목표는 단연 막강한 경제력‧군사력을 가진 오왕 유비였다. 아들을 잃어 이를 갈던 차에 일족 전체를 길거리로 내쫓으려 하자 유비는 폭발했다. 유비는 무려 10개국을 규합해 내전(內戰)에 착수했다. 오초칠국의 난이 시작되자 태위(太尉) 주아부는 황명(皇命)을 받들어 진압을 위해 출정했다. 여담이지만 조조는 머잖아 유비를 달래려는 경제에 의해 처형됐다.
끝내 부러진 대쪽
반란군 기세는 대단했다. 당초 10개국이었던 연합국은 변심(變心)한 제왕(齊王) 유장려(劉將閭), 휘하 쿠데타에 감금된 제북왕(濟北王) 유지(劉志), 재상(宰相)에게 병권을 빼앗긴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으로 인해 7개국으로 줄었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았다. 반란군 병력은 호왈 20만에 달했다. 설상가상 오나라 남쪽 이민족인 동월(東越)도 힘을 보탰다. 반란군은 무서운 속도로 수도 장안에 육박(肉薄)했다.
바야흐로 ‘초한(楚漢)전쟁 2탄’ 격인 절체절명(絕體絕命)의 위기였지만, 무능한 조정대신들은 현실성 없는 대책만 읊어대거나 책임전가에만 혈안이 됐다. 조조는 “나는 후방을 지킬 테니 당신이 나가 대적하라”며 황제를 등 떠밀었다. 원앙(袁盎)이란 자는 “조조의 목을 주면 유비는 물러갈 것”이라고 황제에게 속닥였다.
경제는 한고조와 달리 싸움 한 번 안 해본 인물이었다. 사생결단(死生決斷)으로 거병(擧兵)한 유비는 그깟 코흘리개 목 하나에 항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며, 실제로 조조의 수급(首級)이 도착해도 코웃음 칠 뿐 군사를 물리지 않았다.
이 와중에 오로지 주아부만이 “내가 책임진다”는 자세로 현실성 있는 재난수습책을 마련할 뿐이었다. 그는 이름 난 협객(俠客) 극맹(劇孟)을 휘하로 거둬 반란군 측 장졸‧백성 인망(人望)을 사려 했다. 또 부친의 문객(門客) 등도위(鄧都尉)를 만나 계책을 구했다.
등도위는 “오군(吳軍)은 정예병이니 정면대결하면 승패는 짐작할 수 없습니다. 유비는 분명 양(梁)나라를 전력으로 칠 테니 장군은 멀리 물러나 적을 방심케하면서 오군 보급로를 취하십시오. 그러면 대사(大事)는 한 싸움에 결정지어질 것입니다”고 말했다.
현실적으로도 이 방법밖엔 없었기에 주아부는 계책을 받아들였다. 사실 ‘망치와 모루’ 전술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필승(必勝)전략이기도 하다. 양나라에게 모루 역할을 맡길 수밖에 없었던 게 본래 모루는 수성군(守城軍)처럼 단단해야 강철의 충격을 이겨낸다. 주아부는 조섭(趙涉)이라는 현인(賢人)의 조언도 수용해 전격전(電擊戰)도 벌였다.
결국 오초칠국의 난은 주아부의 활약 앞에 단기간에 완벽하게 종료됐다. 주아부는 그 공로로 승상(丞相)이 돼 조정을 다스렸다. 그러나 난신(亂臣)들은 강직‧유능한 주아부를 용납하지 않았다. 이들은 반란진압 과정에서의 주아부 태도를 걸고 넘어졌다.
유비 본대(本隊)를 방어했던 양효왕(梁孝王) 유무(劉武)는 입조(入朝) 때마다 가벼운 입을 불퉁거리며 주아부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렸다. 어떤 내용인지 기록에는 명확하지 않지만, “내가 옆에서 봤는데 재난수습 때 주아부는 내게만 반란군 요격을 맡겨놓고 자신은 하는 척만 하더라” “극맹‧등도위 및 백성들로부터 황제의전을 받았다” 등등이었을 공산이 크다. 경제의 동생이었던 유무는 후일 자신의 황태제(皇太弟) 등극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조정대신 10여명 암살을 교사(敎唆)할 정도로 교활‧탐욕스런 인물이었다.
결국 헛소문에 넘어간 여론은 주아부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경제는 어느날 주아부를 불러 식사하면서 자르지도 않은 큰 고깃덩이를 줬다. 고기를 자를 도구도, 젓가락 등 수저도 없었다. 주아부가 당황해하자 경제는 “이 정도로 큰 고기도 그대에겐 부족한가”라고 물었다.
재난수습 관련 ‘사진촬영용’ ‘황제의전’ 등 헛소문은 더 큰 헛소문으로 번졌다. 어느덧 노쇠한 주아부는 사후를 대비해 순장(殉葬)용 갑옷‧방패 수백 개를 공방(工房)에 주문했다. 무덤에 산 사람을 함께 묻는 악습(惡習)은 병마용(兵馬俑)에서 드러나듯, 이세황제 호해(胡亥) 같은 예외도 있긴 하지만, 진(秦)나라 때 이미 철폐됐다. 때문에 부장품(副葬品)을 마련하는 건 당시 시대상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런데 이는 “주아부가 반란을 획책한다”는 이상한 풍문(風聞)을 일으켰다.
정위(廷尉‧재판장 격) 앞에 끌려간 주아부는 “갑옷 등은 그저 부장물일 따름인데 이 무슨 헛소리냐”고 반문(反問)했다. 누가 봐도 정교한 군용(軍用)이 아니었기에 정위는 할 말이 궁해졌다. 이리저리 눈알 굴리던 정위는 역사에 길이 남을 궁색한 변명을 댔다. “부장품이 맞긴 한데. 그러면 죽어서 저승에서 모반하려 한 것 아니냐!” 아연실색(啞然失色)한 주아부는 닷새나 굶으면서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피 토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우려되는 ‘주아부 효과’
홍준표 대구시장이 수해(水害) 조기수습을 위한 봉사활동에 나설 예정이다. 이를 두고 야권 등 일각 난신들이 또 어떤 트집을 잡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고조된다. 이들은 마치 양효왕 유무처럼 홍 시장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홍 시장은 2017년 7월 충북 청주 상당구 수해피해 지역을 찾았을 당시 촬영된 한 사진을 두고 사진촬영용 봉사, 황제의전 의혹 등 말도 안 되는 고충을 겪은 바 있다. 홍 시장은 “(이번에는) 아예 운동화를 신고 하겠다”며 헛소문 사전예방 의지를 다졌다.
그러나 “죽어서 반역”처럼 헛소문은 더 큰 헛소문을 낳고, 헛소리가 진실로 둔갑하는 건 쉽지만 해명에는 수많은 기력소모가 필요한 법. 전후사정(前後事情)에 상관없이 일순간의 장면만 담아내는 사진 특성상 이번 봉사활동 현장사진 등이 과거 논란 등과 겹쳐 어떠한 ‘주아부 효과’를 야기할지 알 수 없다는 근심은 여전히 가시지 않는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유무들에게 엄중히 충고한다. 얕은꾀는 당장의 정적제거에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그들 자신의 무능(無能)과 꼬인 심사와 범죄행각까지 가려주진 못한다. 유무는 주아부, 대신 10여명을 차례차례 제거했으나 결국엔 악행의 꼬리가 드러나 민심(民心)으로부터 버림받았다. 황족(皇族)임에도 수도에서 내쫓긴 유무는 만인(萬人)의 손가락질 속에 열병이 들어 6일만에 목숨 잃었다. 반면 주아부는 2000년도 더 지난 오늘날까지 깨끗한 이름을 남기고 있다.
대한민국판 유무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아무리 꼬인 심사가 한층 뒤틀리더라도 유권자 무서운 줄 알고 자중(自重)하면서 홍 시장의 재난수습에 힘을 보태고, 나아가 편히 앉아서 입만 놀리는 대신 홍 시장처럼 진심으로 봉사활동에 나섬으로써 오명(汚名)을 자초치 않는 것이다. 괜히 주아부가 ‘세류영’ 등으로 칭송받고, 유무가 금수(禽獸)만도 못한 천하의 패륜아로 욕먹는 게 아니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지금 상황에서 봉사 나가면 소위 '윤핵관'이나 '대깨윤'들은 "뻔뻔하게 어디 기어 나오냐" 혹은 "침묵은 반란의 일부" 또는 "대구시장이 어디 딴데 간섭하냐"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들의 생각은 혹여나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에 빗대 윤대통령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이고 준표형님은 모반을 일으킨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라는 헛된 망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과장된 표현일 수 있겠지만 걱정이 됩니다.
본 칼럼 요지는 특정 정치진영이 아닌 여야 모두의 자중을 요한다는 것입니다. 갖은 구설수의 야권은 한층 자중하길 바랍니다.
홍시장님에 대한 당내 견제와 비방이
도를 넘은지 한참입니다.
총선이 얼마남지 않은 이 때에
떨어지는 지지율 회복을 위해서라도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참 답답합니다.
그리고 홍시장님도 저들의 구설수에 오르내리지 않는 처신과 당과 대통령에 대한 비판은 좀 세련되게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시장님 지지층이 지지·고언을 아끼지 않다 보면 종래엔 사필귀정이 되리라 개인적으로 확신합니다.
저는 의견이 좀 다른데, 저들은 더욱 더 완악(頑惡)해질 것이라는 걱정이 듭니다. 그래서 패망해도 남탓하며 끝까지 정신승리에 목매는 자들인 것 같습니다.
그간 여러 게시판에서 말씀하시는 것 읽었습니다만, 본 댓글에서 말씀하시는 건 특정 야당의 본성 아닌가 싶습니다. 만악의 근원인 특정 야당스러운 정신만 이 땅에서 사라지면, 근원을 뿌리뽑으면 모든 게 해결될 듯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