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 엄단해 나라 일으킨 칭기즈칸
편향 논란 KBS 수신료 제도개편에 환영↑
“내 말이 곧 공명정대한 진리다”
고대국가 상당수는 제정일치(祭政一致)가 보편적이었다. 임금이 샤먼(Shaman‧주술사)을 겸하거나, 임금이 샤먼의 계시를 얻어 국정(國政)을 이끄는 풍경이 흔했다. 고조선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제사장(祭司長)이었다는 설이 있다. 일본 야마타이국(邪馬臺國) 여왕 히미코(卑弥呼)도 샤먼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중국 상(商‧은)나라 등도 샤먼 점괘에 따라 나라를 다스렸다. 갑골문(甲骨文)에는 “점을 쳤다” “포로를 이용해 불로써 제사(산 채로 화형)지내려 한다” 등 내용이 무수하게 나온다. 영토가 황하(黃河) 중류 또는 중하류 일대에 그쳤던 상나라는 중원(中原)의 여러 부족을 납치한 뒤 인신공양(人身供養)했다.
여담이지만 갑골문은 약 100년 전 우연찮게 대량 출토(出土)됐다. 갑골문은 죽간·종이가 없던 시절 거북이 배딱지나 동물뼈에 새겨 넣은 원시적 형태의 상형문자(象形文字)다. 상‧주(周)시대 이후 수천년 간 역대 많은 농민들이 밭 갈고 우물 파는 과정에서 갑골문을 발견했지만 농부고 관료고 이게 뭔 글자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때문에 갑골은 용골(龍骨)이라는 한약재로 쓰였다.
그러던 중 19세기 말 왕의영(王懿榮) 등이 심상찮은 물건임을 깨닫고 연구에 착수해 허난성(河南省) 안양시(安阳市) 소둔촌(小屯村)이 원산지임을 알아냈다. 20세기 초부터 많은 팀들이 소둔촌을 조사한 결과 수천년 전 상나라 수도 은허(殷墟)가 지하 저 깊은 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당초 전설상 국가로만 여겨졌던 상나라는 은허 발견으로 실존했음이 밝혀졌다. 은허유적은 200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우리도 하루빨리 고조선 수도로 알려진 아사달(阿斯達)을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21세기 지금도 제정일치 국가는 존재한다. 라흐바르(Rahbar‧최고지도자)가 실권을 쥐는 이란이 대표적이다. 이란에서 대통령은 허울 좋은 자리일 뿐 최고 이슬람성직자인 라흐바르가 모든 국지대사(國之大事)를 결정한다. 지금의 라흐바르는 ‘혁명수출가’ 아야톨라 호메이니(Ayatollah Khomeini)의 뒤를 이은 알리 호세인 하메네이(Ali Hosseini Khamenei)다.
혓바닥 운동의 달인 코코추
중세에도 아직 문명화가 덜 된 부족들은 샤머니즘(Shamanism)을 숭배했다. 유럽은 드루이디즘(Druidism)의 켈트족(Celts) 등이, 미주대륙은 아즈텍(Aztec) 다신교(多神敎) 등의 아메리카원주민(Indigenous peoples of the Americas‧인디언)이, 아시아는 텡그리즘(Tengrism)의 몽골족(蒙古族‧Mongols) 등이 대표적이다.
금(金)나라 등의 분열정책 아래 이합집산(離合集散) 일삼던 초원민족들을 통합한 인물은 잘 알려졌다시피 칭기즈칸(成吉思汗‧Chingiz Khan) 보르지긴 테무진(孛兒只斤鐵木眞‧Borjigin Temujin‧생몰연도 서기 1162~1227)이다. 칭기즈칸은 수백년 뒤 등장하는 대영제국(British Empire)에 앞서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인류역사상 최대 영토의 대몽골제국(大蒙古帝國), 즉 예케 몽골 울루스(Yeke Mongol Ulus)를 설계했다.
칭기즈칸은 작은 씨족(氏族)의 족장 예수게이(Yesugei)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수게이는 자신이 죽인 타타르족(Tatars) 장수 테무진 우게(Temujin Uge)의 이름을 따서 아들 이름을 지었다.
예수게이가 타타르족에 의해 암살되자 어린 칭기즈칸은 일족(一族)으로부터 버림받았다. 부족민들은 젖먹이를 새 족장으로 추대하는 대신 또 다른 강자를 찾아 이리저리 흩어졌다. 유목민(遊牧民)에게 있어서 “힘 있는 자로부터 보호받고 그를 따르면서 약자를 터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칭기즈칸도 후일 자신의 이복동생을 활로 쏘아 죽인다.
황량한 들판에 내버려진 칭기즈칸 가족은 굶주린 늑대들의 좋은 먹잇감이 됐다. 한 때 타 부족의 노예가 될 뻔한 칭기즈칸은 천우신조(天佑神助)로 달아나 목숨을 건졌다. 2005년작 드라마 칭기즈칸에선 아버지의 부하였다가 배신한 이가 주술적 이유로 칭기즈칸을 죽이려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복수를 다짐한 칭기즈칸은 부친과 교분이 있던 케레이트(Kereit)의 옹칸(Ong Khan‧또는 완칸)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두 사람은 부자(父子)의 예를 갖췄으며 옹칸은 칭기즈칸을 거둬들였다. 이 와중에도 칭기즈칸의 부인 보르테 카툰(Borte Khatun)이 메르키트(Merkit)에 납치돼 겁탈당하는 등 사달이 이어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칭기즈칸‧보르테 부부의 장남 주치(Juchi)는 칭기즈칸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에 평생 시달려 결국 대칸(大汗)을 물려받지 못하게 된다.
초원을 어느 정도 정리한 칭기즈칸은 1189년 몽골칸에 추대돼 드디어 ‘칭기즈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텡그리즘 샤먼이었던 코코추(Kukuchu‧또는 쿠쿠추)가 큰 역할을 했다. 코코추는 줄곧 테무진만이 오직 초원의 주인이 될 자격이 있다고 선전하면서 긍정적 여론을 이끌어냈다. 몽골에서 샤먼의 점괘는 곧 하늘의 계시(啓示)였다.
칭기즈칸은 옹칸 등과 함께 초원정복에 나섰다. 이후에는 숙적 자무카(Jamukha), 배신한 옹칸, 투르크계 유목민족 나이만(Naiman) 등도 모조리 격파해 명실상부 초원의 패자(霸者)가 됐다. 칭기즈칸은 1206년 신성한 오논(Onon)강에서 쿠릴타이(Khuriltai)회의를 열어 예케 몽골 울루스 개창(開創)을 선언했다. 초원 북부의 이름 모를 부족들, 키르기스(Kirghiz)‧오이라트(Oirat) 등 눈치 보던 부족들도 속속 초원의 제국에 복속됐다.
세치 혀로 흥한 자, 혀로 망하다
대몽골제국이 바야흐로 남서(南西)로 뻗어갈 그 찰나, 현란한 언변으로 유명했던 샤먼 코코추의 입이 문제를 일으켰다.
칭기즈칸은 두 번 다시 초원이 분열돼 민족상잔(民族相殘)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법령을 정비하는 한편 확고한 중앙집권제(中央集權制)를 구축하려 했다. 이에 불만이라도 품었는지, 배가 불러 터져 할 일이 없었는지, 코코추는 이제는 칭기즈칸을 겨냥해 뱀 같은 혓바닥을 놀리기 시작했다. 목적은 황족(皇族) 간 내전 유도였다.
코코추는 어느날 무리를 이끌고 칭기즈칸의 동생 카사르(Hasar)를 공격해 일방적으로 폭행했다. 카사르는 초원통합 과정에서 목숨 걸고서 막대한 공을 세운 바 있었다. 옹칸과의 대결 때는 가짜로 항복한 뒤 형이 쳐들어오자 내응(內應)했다. 나이만과의 교전 때도 큰 용맹을 과시했다.
칭기즈칸은 이러한 동생이 혹 두 마음을 품을까 내심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얻어맞은 동생이 달려와 “대칸께서 처벌해 달라”고 하소연하자 매정하게 거절했다. 카사르는 죽을 각오하고 도왔던 형의 차가운 태도에 크게 실망했다.
코코추는 때를 놓치지 않고 점괘를 얻었다며 “카사르가 모반(謀反)하려 한다”는 허위보고를 올렸다. 동생에 대한 견제심리에 샤먼의 절대성(絕對性)까지 겹치자 칭기즈칸은 진위여부도 알아보지 않은 채 동생을 잡아들였다. 그리고는 옷을 벗기고 수레에 매단 뒤 무자비한 채찍질을 가했다. 대로(大怒)한 어머니 호엘룬(Hoelun)의 꾸짖음에 겨우 매질을 멈췄지만 칭기즈칸은 끝내 동생의 부락 상당수를 빼앗았다.
일설에 의하면 코코추는 칭기즈칸에 대한 비방도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다. 기록엔 명확치 않지만 “저렇게 형제도 괴롭히는 놈이 백성을 어떻게 대할지는 안 봐도 뻔하다” “칭기즈칸이 백성을 도탄(塗炭)에 몰아넣고 있다”는 내용도 포함됐을 수 있다. 드라마 칭기즈칸은 이러한 설을 차용(借用)했다.
보다 못한 보르테는 남편에게 “당신이 멀쩡히 살아있는데도 (코코추의 횡포가) 이러할진대 당신이 죽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나”라고 일침(一鍼)을 놨다. 드라마에서 코코추는 카사르뿐만 아니라 타 부락에게서도 강제로 재화(財貨)를 거둬들이는 모습으로 연출됐다. 그제야 정신 차린 칭기즈칸은 그 길로 코코추의 영지(領地)를 몰수해 돈줄을 끊어버렸다. 나아가 코코추의 허리를 꺾어 죽여버렸다.
“내 말이 곧 공명정대(公明正大)한 진리다”며 강제징수‧허위선전 일삼던 ‘몽골판 공영방송’의 난잡한 혓바닥은 그렇게 잘렸다. 칭기즈칸은 야삭(Yassa)이라는 법전(法典)을 만들어 법치주의(法治主義)를 전격 확립했다. 특히 ‘내맘대로 공영방송’에 놀아나는 낡은 악습(惡習)을 전격 폐지했다. 법전 집필자는 훗날 칭기즈칸 일대기를 기록한 원조비사(元朝祕史) 저자로 알려진 시기 쿠두쿠(Shigi Qutuqu)였다.
내부를 안정시킨 칭기즈칸은 서하(西夏)‧서요(西遼‧카라키타이)‧금나라‧호라즘(Khorezm)왕국 등을 차례차례 정복해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의 후손들은 원(元)나라‧차가타이칸국(Chaghatai Khanate)‧주치울루스(Juchi Ulus‧킵차크칸국)‧일칸국(Il khanate) 등 유라시아대륙에 걸친 4대 칸국을 건설하고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시대를 열었다. 몽골인은 물론 고려인‧색목인(色目人) 등도 중용(重用)됐으며 고려청자 등은 실크로드(Silk Road)를 통해 서역으로 팔려나갔다.
강제징수 철폐가 언론탄압?
정치적 편향성 논란 등으로 말 많던 공영방송 KBS의 ‘마르지 않는 샘물’이 점차 말라붙는 듯한 분위기다. KBS 수신료를 전기요금에서 분리시켜 징수하는 내용의 방송법시행령이 6일 차관회의를 통과한 것이다. 개정안은 다음주 한덕수 국무총리가 주재(主宰)하는 국무회의에서 심의의결될 예정이다. 이후 대통령 재가(裁可)를 거쳐 이달 중순 공포(公布)될 전망이다.
그간 KBS 수신료는 전기요금에 합산돼 청구됐기에 많은 국민이 반강제로 납부해야만 했다. 이렇게 ‘등 따시고 배 부르던’ KBS를 두고 하라는 공정보도는 안 하고 중립성‧객관성 등 언론 본연의 의무에서 크게 벗어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져왔다.
근래에는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 관련 피의자 신분인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한 프로그램에 출연시켜 자신에 대한 수사를 둘러싼 “검찰독재 정권” 주장, 후쿠시마(福島) 방류수 관련 “한일 밀약” 등 발언을 그대로 내보내 물의를 빚었다. 여야 균형을 맞춘다며 함께 출연시킨 한 여권 인사를 두고서도 균형이 전혀 맞춰지지 않았다는 우려가 나왔다.
돈줄이 줄어들 위기에 처한 KBS는 내부적으로 난리가 벌어졌다고 한다. 일부에선 현 정부여당의 언론탄압이라는 주장이 나오지만 그간 KBS 행보를 지켜봐온 여론은 전혀 그렇지 않다. 지난 3월9일~4월9일 국민제안 홈페이지 의견수렴에서 총 투표수 5만8351표 중 96.5%(5만6226표)가 징수방식 개선에 찬성했다고 한다. 당장 필자 주변만 해도 강제납부 철폐를 환영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칭기즈칸은 코코추의 돈줄을 끊고 암덩어리를 제거함으로써 제국의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KBS 수신료 분리징수는 상당히 가벼운 조치라 할 수 있다. KBS는 이를 기화(奇貨)로 진정한 국민의 공영방송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언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지 않는 한 KBS의 굵은 허리만 더욱 꺾일 뿐이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걷은걸 토해내도 시원찮은데 볼멘소리라니!
회초리가 필요한 때입니다.
TV 안 본지 10년이 넘어가는데 수신료는 꼬박꼬박 내야하는 불합리성
kbs가 조속히 정상화되길 바랍니다. 여러 현안 해답에 있어서 홍 시장님과 여러 청꿈 식구분들께 많은 걸 배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