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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완용은 어떤 사람이였나?

정은지 청꿈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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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은 처세술에 뛰어나고 영민했던 인물이었다. 이완용과 교류했던 미국인 선교사 알렌은 그를 한마디로 요약하면서 머리가 잘 돌아가고 영민하지만, 영혼이 없는 것 같은 기계 같은 사람이라는 평을 내렸다. 다만 의외로 검소한 습관을 지향했다고 한다. 낭비가 심하기로 유명한 궁중식단의 병폐를 비판하고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가져왔던 사람이 이완용. 당시 궁중식단의 경우, 거하게 상을 차린 후 윗사람이 다 먹지 못한 음식들은 그대로 아랫사람에게 주었다. 먹다 남긴 거나 먹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덕을 나눠준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이러한 비효율성을 타파하고 덤으로 음식물 쓰레기도 줄이고자 했다.이런 문화는 일본에도 존재해서 덴노의 점심 저녁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식사가 차려졌다고 한다. 특히 메이지덴노는 점심때 양식을 즐겨서 시종들이 가장 기대하는 시간이었다고



행적과 성격과는 관련 없이 서예에 능해 조선 후기의 명필가로 꼽히기도 한다. 그의 필체에 대해 예술의 전당 학예연구사인 이동국 씨는 이완용은 행서와 초서가 뛰어났다"고 밝힌 바 있으며, 그 동안 공개된 이완용의 필적을 보면 그는 행서를 즐겨 쓴 편이다. 행서는 정자체인 해서와 흘림체인 초서의 중간 서체로 미적인 감각이 뛰어난 우수한 글씨체라 할 수 있다.


그의 자서전인 <일당기사(一堂紀事)>에 의하면 경북 김천 직지사의 대웅전 및 천왕문 2008년에 문화재청이 직지사 대웅전을 보물로 지정하는 과정에서 이완용이 현판을 썼다는 이유로 논란이 된 바 있었다.창덕궁 함원전 등에 걸린 현판 10여 종의 글씨를 썼다고 기록했다. 또 독립문 현판의 '獨立門'이라는 글자는 그가 쓴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친일파 연구가 정운현은 "필체는 이완용이 아니라 동농 김가진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삶의 상태가 상태인지라 글씨의 수준과는 별개로 가격은 바닥을 긴다.''' 물론 그가 원체 명필이었던 까닭에 아예 휴지값까진 아니다. 유퀴즈온더블럭에 출연한 수집가의 증언에 의하면 보통 2~30만원, 비싼건 40만원 선에 거래된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나라를 팔아먹지 않았다면 최소 '''수백만 원에서 천만 원'''은 했을 글씨라는 말도 된다. 서예는 글씨를 얼마나 잘 썼느냐도 중요하지만, 글쓴이의 인품·평판도 값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글씨가 쓴 사람의 성품과 평판이 반영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완용과 완벽한 대척점에 있는 안중근의사의 경우, 뤼순 감옥에서 남긴 글씨들은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었으며대한민국 원화 기준 억 단위는 가볍게 찍는다 안중근의 글씨가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안중근의 올곧고 청아한 성품과 민족에 대한 충성심 견리사의 견위수명 이로움을 보았을 때에는 의로운지에 대해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당했을 때에는 목숨을 바쳐라 국가안위 노심초사_국가의 안위를 위해 애쓰고 걱정하다, 위국헌신 군인본분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다등의 글귀에서 확인할 수 있다.이 글씨에 그대로 묻어났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와 적대적 포지션에 있는 일본 순사들이나 간수들도 글씨 한 점 얻어가려고 했는데, 이는 안중근 의사의 행적과 태도, 지식이 주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기 때문이다.


안중근이 가진 특유의 기개와 고귀함은 이상적인 남성, 특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성이라면 막연히 동경하고 추구하는 무인의 성품 그 자체였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사무라이를 비롯한 에도 시대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던 당시 일본인 입장에서는 완벽한 무인, 사나이로 보였던 셈이다. 당대 재판을 맡은 검사, 변호사, 간수가 모두 그를 존경한다고 했을 정도였다. 판사도 안중근의 미완성 유고작인 동양평화론 집필을 마칠 때까지 사형 집행을 연기하려 했지만 본국에서 직접 집행 통보가 내려오면서 연기하지 못했다상소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걸려있어서, 판사가 안중근을 속인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김구의 글씨도 수천만 원이고, 비교적 덜 유명한 신익희의 작품도 최소 수백만 원의 가격에 거래된다. 반면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의 글씨는 고작 30~40만 원이며,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관료로서의 능력은 출중하나, 그것을 매국에 악용해 아무리 명석한 사람이라도 외환의 죄 돌이킬 수 없는 악행들을 저지르면 어떤 평가를 받는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후술하겠지만, 이완용은 주위에서 총명하다는 평을 많이 들었고 판단이 명확했으며 처세술에 능한, 흔히 말하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데 최적화된 사람'이었다. 이완용과 비슷한 시기에 같이 매국 행위를 해 조선귀족 직위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도 이후 처신을 잘못하거나 재산 관리에 실패하여 일제강점기 중에 몰락하거나 패가망신한 사람도 많았다. (매국도 능력이 없으면 못 한다) 하지만 명석한 두뇌를 '''매국 행위와 개인의 이득을 위해 타인에게 크나큰 피해를 가하는 일에 사용했으니''' 두고두고 비판을 받는 것. 아무리 개인의 능력이 백날천날 뛰어나 봤자 기본적인 인간 됨됨이가 글러먹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사람이다. 


이와 같은 악질적인 친일 행각으로 인하여 국내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매국노라 하면 바로 이완용이 연상될 정도로 '''매국노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을 확고히 했다. 그가 사망한 지 100년이 된 현재까지도 국가와 민족을 배신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비판받고 있다.


현대에 와서조차 대한민국 국민들은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을사오적 중 나머지 넷은 몰라도 이완용만큼은 대부분 알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누군가를 이완용에 비유하는 것은 거의 서양 국가에서 누군가를 나치] 아돌프 히틀러에 비유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모욕으로 통한다. 심지어 중국에서도 우페이푸가 량스이를 비판할 때 모욕적 표현으로 쓰는 사례가 있었다.


이완용과 동시기에 똑같이 매국노 짓을 한 송병준 헤이그 밀사사건 이후 어전 회의에서 고종황제의 면전에 대고 '메이지 덴노께 사죄해야 한다', '자결을 하라!'는 등의 망발을 퍼부었으며 이후 고종이 폐위되고 순종황제가 즉위하여 이완용 내각이 들어선 후엔 농상공부대신 · 내부대신을 역임하며 국권피탈을 위한 상주문 ·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행적만 보면 이완용과 맞먹는 수준의 매국노다. 하지만 대중적인 인지도는 이완용만 못한데, 왜냐하면 그 독한 친일파 종자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의 악질이라 일제 입장에서도 전면에 내세우기 어려웠던 작자여서 은근슬쩍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본래 신분도 천해서 배운 것 없는 무식쟁이라 말 그대로 똥오줌 못 가리고 양아차 짓을 서슴지 않고 다녔고, 그래서 꼴에 먹물 좀 먹었다고 말귀는 알아듣고 최소한의 눈치가 있는 이완용이 더 부리기 쉬워 이 쪽을 더 이용해 먹었다 같은 경우도 이 정도로 욕을 먹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면 생전에 이완용이 얼마나 대표적이고 악랄한 매국노였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심지어 그의 후손들도 국가를 상대로 환수된 재산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하고, 승소까지 한 다음 외국으로 도망가는 악행을 저질러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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