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통신위원회가 과도하게 정치화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최근 임기를 마치고 물러난 안형환(60) 전 방송통신위원회 부위원장이 자신의 후임 인선이 '여야 간 정쟁거리'로 전락하고 있는 현실에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안 전 위원은 지난 19일 뉴데일리와 진행한 퇴임 후 첫 인터뷰에서 "부끄러운 점이 있지만 방통위원이라는 자리에는 '당적'이 없는 사람이 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특정 성향'의 사람이 들어서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자신도 정당의 추천을 받아 방통위원이 됐지만, 방송통신 분야의 '공공성'과 '전문성'을 살리기 위해선 점진적으로 '정치적 후견주의'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소신을 밝힌 것.
안 전 위원은 2020년 3월 당시 야당이었던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이 추천한 인사였다. 국민의힘은 안 전 위원을 추천한 정당이 국민의힘의 전신이므로, 국민의힘에 안 전 위원의 후임 추천권이 있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더불어민주당이 "안 부위원장을 당시 야당이 추천했으니 현재 야당인 민주당이 추천해야 한다"며 최민희 전 민주당 의원을 안 전 위원의 후임으로 추천하면서 여·야 3대 2 구도가 깨진 상태다.
대통령 직속 합의제 기구인 방통위는 대통령이 2명을 지목하고, 여당과 야당이 각각 1명과 2명을 추천해 총 5명의 상임위원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안 전 위원과 김창룡 전 위원(문재인 전 대통령 지명)이 임기 만료로 물러난 가운데 최 전 의원이 새롭게 합류하면서, 방통위 여·야 구도가 1(김효재)대 3(한상혁·김현·최민희)으로 바뀌게 됐다.
최 전 의원이 '야당 몫 상임위원' 자리를 꿰차면서 방통위의 여·야 구도가 깨진 것도 문제지만, 최 전 의원이 과거 '편파·비하성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사례가 많아 '공정성'과 '중립성'을 견지하고 방송·통신 분야 규제 업무를 수행해야 할 방통위원으로서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정치권에서 제기됐다.
국민의힘은 최 전 의원의 공직선거법 위반 등 전과 기록을 들어 추천 철회를 촉구하고 나선 상태. 대통령실도 적격 인사인지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비치면서 '안개 속 인선'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안 전 위원은 "대통령 직속 합의제 행정기구인 방통위는 여야가 서로 견제하는 구도를 유지해야 한다"면서도 "대통령의 국정철학과 발맞출 필요가 있다"며 '정파성'이 강한 최 전 의원과, 문재인 전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잇고 있는 한상혁 방통위원장의 현재 '처신'에 문제가 있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내비쳤다.
안 전 위원은 공영방송 기자로 활동하다 국회의원까지 지낸 인물이다. 1963년 전남 무안에서 출생해 목포고를 거쳐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 케네디대학원 행정학 석사를 마쳤다. 이후 1991년 KBS에 입사해 17년간 기자 생활을 했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 서울 금천구에 출마해 당선돼 여의도에 입성했다.
경력을 살려 한나라당 대변인, 2012년 18대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 등을 지냈다.
-3년이라는 시간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을 것 같은데 소감은?
"임기를 마치고 나왔으면 좀 홀가분한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사실 그런 느낌이 들지 못해 굉장히 아쉽다. 언론에서도 보도하듯 방통위 사정이 뭔가 아직도 정리되지 못한 혼란스러운 상태다. 그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직원들도 심적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저만 빠져나온 것 같아 굉장히 미안하다. 또 저에게 소임을 맡겨 준 우리 공동체에도 미안한 감정이 든다."
-내부에선 어떤 혼란스러운 상황이 있었나.
"본부 직원 가운데 30~40여 명이 여러 사건으로 검찰, 감사원, 총리실, 대통령실 등에서 조사를 받았다. 엄청난 수다. 게다가 지금 상임위원 5명 중 2명이 임명되지 못한 상태에서 언론에선 방통위가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고 있다는 보도가 쏟아진다. 직원들의 사기가 많이 떨어져 있다. 지금 이런 상황이 내일이면 해결될 것이란 희망도 보이지 않는 암담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한상혁 방통위원장의 사법 리스크가 혼란을 부추겼다는 지적이 있다.
"한 위원장도 본인 나름대로 여러 고민이 있을 것이다.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부분도 많았을 것이다. 다만, 대통령이 바뀌었음에도 대통령 직속 기구의 장 자리를 지키며 많은 논란과 어려움, 혼란을 제공한 것이 사실이다. 이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다."
-평소 통합과 화합을 강조하던데, 지금 방통위는 어떤가.
"스스로 이런 얘기를 하기 부끄러운 점이 있지만 방통위원이라는 자리에는 당적이 없는 사람이 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파성을 벗어나 가능한 중립적으로 방송과 통신에 대한 정책을 집행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인사들로 뽑아야 한다. 특정 성향의 사람이 들어서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각 정당에서도 충분히 고려해 인사 추천을 해야 옳다고 생각한다. 그게 화합의 길이다."
-후임 인사가 불투명하지 않나.
"임명은 인사권을 가진 이들이 적절히 알아서 판단을 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한상혁 위원장과 관련해 이 얘기는 꼭 하고 싶다. 대통령은 국민으로부터 행정부를 이끌 권한을 위임받은 자리다. 선출된 대통령이 헌법 정신에 따라 행정부에 대한 전권을 행사한다. 정치적 중립이 필요한 부처엔 위원회를 두고 여야가 추천권을 행사해 행정부에 대한 견제 기능을 갖도록 한다. 그래서 방통위도 대통령과 여당이 3명, 야당에서 2명, 3대 2 구도를 규정한 것이다. 적절히 견제하면서도 대통령의 정책이 집행되고 지속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 임기와 위원회 구성원들의 임기가 어긋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서구권 국가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위원장이 임기와 상관없이 정권이 교체되면 스스로 물러나기도 하더라. 신임 대통령이 새로운 위원장을 임명할 수 있도록 하면서도 자연스레 구도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위원장의 결단이 필요해 보인다."
-여소야대 정국에서 어려웠던 점도 있었을 것 같다.
"대통령제의 문제 중 하나가 그런 것 같다. 의원내각제와 달리 대통령제에선 행정 권력과 입법 권력 이 두 개의 권력이 존재한다. 어쩔 수 없는 한계다. 대통령의 최고 역할 중 하나는 공동체의 지속이다. 공동체가 분열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게 큰 임무다. 국회나 대통령이나 이런 점을 다시 고민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우리 사회가 너무나 많은 분열과 갈등을 겪고 있다. 특히 정치권이 앞장서서 싸우고 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대한민국 국민 약 절반가량은 거의 한 달 이상 뉴스를 보지 않더라. 당선자를 찍지 않은 유권자들 상당수가 신임 대통령이 잘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한다. 대통령이 잘돼야 나라가 잘된다. 분열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임기 중 정권이 바뀌었는데, 방통위에도 변화가 있었나?
"잘 모르겠다. 정권이 바뀌었음에도 이전 정부에서 임명한 위원장이 이렇게 오래 자리하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다 보니 지금과 같은 방통위 관련 문제들이 터진 것이다. 2008년에 생긴 방통위의 역사가 비록 짧지만 정권 교체기마다 몇 개월 사이에 새로운 인사들로 대체되면서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그게 문제를 키웠다. 찾아볼 수 없는 선례를 만든 셈이다."
-어쨌든 방통위는 새로 꾸려질텐데… 바라는 점이 있다면?
"방통위는 방송과 통신에 관한 규제 감독을 하는 중앙행정기관이다. 방송통신은 또 급속하게 변하는 최첨단 분야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이 산업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심판 역할을 해야 한다. 방송통신 산업이 원활히 성장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규제 감독하는 기관이다 보니 가끔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는 구성원도 있을 것 같다. 과거 방통위 직원들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규제 감독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방송사나 통신사를 힘으로 누르고 억제하는 기능을 해선 안 된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라고 강조하곤 했다. 방통위가 과도하게 정치화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공영방송에 대한 정의도 필요하다. 현재 우리나라엔 '공영방송'이라는 말이 어느 방송 관련법에도 없다. 그저 KBS, EBS 등 이런 곳들을 공영방송이라 칭할 뿐이다. 그래서 공영방송에 대한 정의가 내려질 필요가 있다. 일각에선 MBC가 과연 공영방송인가라는 지적이 있다. 물론 MBC가 공영방송이 아니라는 게 아니다. 공영방송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 꽤 애매모호하다. 지금 방통위에선 '공영방송 협약 제도'를 준비하고 있다. 가칭 '시청각미디어 서비스법'도 준비하고 있다. OTT 등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하는 시장 환경에서 미디어를 정의하면서도 공영방송은 또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재정비해야 한다.
이 얘기도 꼭 하고 싶다. 공영방송은 독립성이 가장 중요하다. 정치권력이나 거대 자본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단, 독립하되 독립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이런 고민이 지금 공영방송에 부족하지 않나 싶다. 공영방송의 가장 큰 존립 근거는 공익성 추구다. 그리고 공익성을 추구하기 위해 공정해야 한다. 공정하기 위해선 정치권력이나 거대 자본으로부터 영향력을 받지 않도록 독립해야 한다. 순서가 이렇게 되는 거다. 독립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공익과 공정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는 분들이 무조건적인 독립을 외치는 건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공영방송 종사자들이 스스로 공익과 공정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정리해야 한다.
우리나라 언론의 여러 심각한 문제 중 하나다. 언론 종사자들이 특정 이념, 정치 세력과 이익 집단화하고 있다. 굉장히 불행한 일이다. 특정 정치 세력이 잘 되면 내가 잘된다는 생각. 이익을 자신과 일체화하는 것. 정말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모든 언론인이 다 이렇다고는 하지 않겠다."
-임기 동안 이뤘던 일과 이루지 못해 아쉬운 일은?
"지역방송발전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적이 있다. 그래서 지역방송의 어려운 상황을 안다. 지역 방송사들을 방문하면서 그들의 의견을 듣고 생각과 정책 대안을 반영하려고 노력했던 것들이 떠오른다. 사소하지만 여러 건의 규제 완화 시도도 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러나 방송 산업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큰 틀의 변화를 이루지 못해 아쉽다. 지금 방송통신 산업은 다른 산업까지 견인할 만큼 중요하다. 그러나 정치권 등에선 '산업'이 아닌 '방송' 영역에만 과도한 관심을 쏟고 있다. 특히 '방통위를 장악하면 우리가 언론을 흔들 수 있겠다'는 그릇된 생각이 대표적이다. '미디어 산업'이라는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 자꾸 '어떻게 해야 우리 쪽에 유리할까'만 따지다 보니 중요한 정책들이 추진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변화를 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게 제일 아쉽다."
-정계 복귀라던가 향후 구체적인 계획은?
"하하하. 방통위 부위원장직을 마치고 나온 지가 이제 2주 남짓 지났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겠다고 선언하기엔 좀 이르다. 지금은 일단 쉬면서 여러 구상을 조금씩 하고 있다. 한 3~4개월 동안 구상한 책이 하나 있어서 집필할 계획이다. 올해 하반기에 상황을 보고 우리 공동체에 어떤 걸 기여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해보도록 하겠다. 사실 우리 공동체로부터 굉장히 혜택을 많이 받았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삶을 살겠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리 사회가 '자유'에 대한 고민을 한 번 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인류의 가장 큰 존재 목적, 그리고 진보의 방향은 자유다. 민주주의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자유를 위한 수단의 개념이 '민주'다. 전체적인 자유와 법치, 공정, 그리고 이를 위한 민주의 개념이 원활히 작동해야 한다. 이런 고민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런 담론을 토론할 수 있는 문화가 필요하다. 당연히 정치권에서도 이런 논의를 다시 했으면 한다."
http://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3/04/19/202304190013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