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대 대선을 앞두고 각 정당들은 대선후보 경선을 시작하였고, 이 중 가장 주목을 받고 치열하게 흘러간 경선은 한나라당 대선 경선이었다.
한나라당에서 대선후보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중립을 선언한 가운데, 지난 총선을 승리로 이끌고 임기 말 정권을 든든하게 이어줄 거라 기대가 높은 지지율 1위 이회창, 그리고 그를 패기로 맹추격하는 지지율 2위 이인제, 민정계와 김종필계의 지지를 한몸에 받는 지지율 3위 김종필, 이 외에도 이홍구, 김덕룡, 박찬종 등이 경선에 참여했다. 경선 과정에서는 이회창-이인제-김종필 3강 구도에서 이회창-이인제 2강, 김종필-박찬종-이홍구 3중 체제로 정비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과거 각종 김영삼 정부의 논란에 엮여있던 이홍구가 결국 책임을 통감한다며 중도 사퇴, 대신 신진 정치인이던 박찬종이 이인제의 표를 일부 가져가며 대안으로 떠올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회창, 이인제 두 후보의 네거티브전도 치열해졌는데, 이회창 측은 이인제가 상도동계 출신인 점을 들어서 "현 대통령의 힘을 빌려 3김 팔이 정치를 한다", "3김의 잔재"라며 공격했고 이인제 측은 반대로 이회창을 "대쪽이 아니라 아집", "과거 대통령의 말도 듣지 않고 큰 마찰을 빚으며 시끄럽게 했는데, 이번에는 당까지 시끄럽게 하려 한다"며 김영삼과 비교적 가까운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당원들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이것은 이인제의 실수였는데, 당시 당심은 김영삼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었고 이 때 이회창이 위기에 빠진 당을 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위기였는데, 이인제의 공격은 이러한 당원들에게는 먹히지 않고 오히려 이인제를 회의적으로 보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점차 박찬종이 대안으로 떠올라 지지율이 급상승하고, 이인제의 지지율은 내려앉는 분위기가 되었고, 경선은 이회창에게 유리하게 흘러간다.
1997년 7월 21일, 박찬종이 결선 직전 투표에서 끝내 이인제를 이기지 못해 탈락하고, 이회창과 이인제가 결선에 진출하였고, 결선 투표 결과,
이회창이 한나라당 제 15대 대통령 선거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다.(이회창 69.87%, 이인제 30.13%)
그러나 경선에서 패배한 뒤에도 이인제는 물러나지 않았는데, 이인제는 경선 불복을 선언하며 자신의 측근들과 지지자들에 모든 걸 걸고 탈당하여 신당 "국민신당"을 창당하고 15대 대선후보로 출마한다. 그러나 첫 여론조사 결과 이회창 53.5%, 이인제 9.8%, 야권 후보(김대중 등) 총합 3.1%로써
이인제의 상황을 꽤나 암울해 보였다.
한편 한나라당 창당으로 인해 유일한 민주당계 정당인 된 새정치국민회의에서는 김대중이 수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김대중만한 인물이 없었던 관계로 김대중이 새정치국민회의 15대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렇게 대진표는 실제 역사처럼 한나라당 이회창VS국민신당 이인제VS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3자 구도로 진행되게 된다.
하지만 말이 좋아 3자 구도지, 사실상 혼자 50%가 넘는 지지율을 확보한 이회창의 독주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선거 막판에 이를 뒤집기 위해서 이회창 후보의 "전두환 사면 공약"을 공론화시켜 논란으로 만들기 위한 두 후보의 치열한 걸고 넘어지기로
이회창은 곤혹을 치르게 되는데, 토론회에서 두 후보가 시도 때도 없이 협공해대니 이회창은 당황했고, 이를 전국민이 지켜보게 되었다.
평가는 상반되었는데, "이회창을 당황하게 할 정도로 협공한 두 후보가 악질적이다"라는 의견과 "전두환 사면은 문제가 맞는데 이회창 후보가 대답을 회피하려 했다"라는 의견으로 갈리게 된다. 이 토론회 직후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33.5%, 이인제 11.5%, 김대중 14.5%로 야권 후보들의 지지율이 올라가고, 특히 김대중은 노련한 토론 솜씨로 진보층을 결집시키며 3.1%에서 14.5%라는 지지율로 가파르게 상승한다.
그러나 이회창은 자신의 대세론이 꺾일 정도로 타격을 입지는 않은 점을 이용하여 "내가 없었다면 이 당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
"나만큼 경쟁력있고 믿을만한 후보가 없다", "야당 후보들은 전두환 사면 건 말고는 내세울 게 없다", "어차피 내가 공약 한 번 바꾸면 한 마디 못하는 이들"이라며 강경한 발언을 쏟아냈고 "누가 나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라는 유명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연설 직후 열린 토론회에서는 그야말로 초박빙 승부를 보여줬는데, 이회창은 시작부터 이인제에게 "자신의 공약을 검증해볼 생각은 없는가"라며 요구하고, 이인제는 "전두환 사면 공약이나 재검토하시라", "나는 어느 후보보다 참신하고 자신이 있는 사람이다"며 신경전을 이어가고, 김대중이 이회창에게 "전두환 사면 건만 문제가 아니다, imf로 나라 경제를 파탄낸 정부를 과연 이 후보가 이어가서 나라에 득이 될 것이 뭔가?"라고 질문하자 이회창이 "그래서 내가 imf 책임자인가? 나는 누구보다 3김 청산을 주장해 왔다는 건 그대가 제일 잘 알 것"이라며 받아치는 듯 토론 내내 설전이 오갔다.
그러나 이 토론회에서 가장 피해를 본 이는 김대중이었는데, 이회창의 주장에 반박도 못하고 친북 논란을 반박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주목을 받은 이 토론회 이후 30%대로 추락했던 이회창의 지지율은 50%에 가까워지며 민심 회복에 성공, 이인제와 김대중은 각각 20.6%,19.6%를 얻으며 1강 2중 구도가 확정된다.
그리고 1997년 12월 18일, 세 후보가 그토록 고대하던 15대 대선이 실시되었다.
초반에는 호남 지역이 먼저 개표를 시작한 탓에 김대중 후보가 앞서다가 이인제와 김대중이 엎치락뒤치락했고, 그러다가 점점 개표율이 높아지자 이회창이 1위를 탈환하여 점차 굳어져 갔다.
그리고 개표 결과, 이회창 후보의 대통령 당선이 확정되었다.
최종 득표율은 55.9%였다.
ㅋㅋㅋ이인제가 실수한거였네
소설을쓰네요 ㅗ
말 그대로 소설일 뿐인데 왜 이렇게 흥분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