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신대왕(Taksin the Great)은 톤부리왕국(Thonburi Kingdom)의 창건자이자 유일한 왕으로 성은 정(鄭), 휘는 소(昭)입니다. 그는 버마군의 침략을 몰아내어 나라를 재건하고 정복전쟁을 통해 오늘날 태국의 영토를 확립한 장본인입니다.
그는 1734년 4월 17일 아유타야왕국(Ayutthaya Kingdom)의 청나라 출신의 아버지와 몬족(Mon people)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보롬마꼿왕(King Borommakot)의 재상이자 훗날 자신의 책사가 될 뭇(Mud)의 양자로 입양되어 그에게 태국어로 '보물'이라는 뜻의 '신(Sin)'이라는 이름을 받고 7년 간 승원(僧院)에서 고급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리고 궁중에서 시종으로 일한 뒤 3년 동안 승려로 출가했다가 에까탓왕(King Ekkathat)의 명으로 딱주(Tak Province)의 행정을 맡았는데, '딱신(Taksin)'이라는 이름은 그가 다스리던 딱주의 지역명과 그의 이름 '신'을 합친 것입니다.
그러다가 1765년 버마군이 쳐들어와 아유타야왕국을 멸망시키고 에까탓왕까지 죽이자 5,000명의 병력과 100척의 함선을 이끌고 버마군을 무찌르고 수도까지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톤부리(Thonburi)로 천도하여 톤부리왕국을 세우고 1767년 12월 28일 그곳에서 왕으로 즉위합니다.
왕위에 오른 그는 치세기간 대부분을 정복전쟁에 몰두하여 국내로는 핏사눌록(Phitsanulok), 피마이(Phimai), 나콘시탐마랏(Nakhon Si Thammarat), 사왕부리(Sawangburi)를 정벌하고 란나왕국(Lanna Kingdom)을 멸망시켜 태국땅을 통일했습니다. 국외로는 하선진(河僊鎮) 총병대도독(摠兵大都督) 막천사(鄚天賜)를 제거하고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조공국으로 두며 말레이반도까지 진출해 오늘날의 태국땅을 완성했으며 버마군의 지속적인 재침공까지 막아냈습니다.
그러나 1781년 쯤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는데, 승려들에게 자신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주장하고 자기 자신을 숭배할 것을 강요하고는 이를 거부하는 고승들을 채찍형에 처한 것을 시작으로 온갖 폭정을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승려들과 신하들, 그리고 가족들까지 잔혹하게 고문하고 기근과 약탈이 나라를 휩쓸며 탐관오리들이 늘어나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아갔습니다.
보다 못해 프라야 산(Phraya San)이 세력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고, 마침 캄보디아로 원정을 나갔던 딱신대왕이 제일 신뢰하던 부하 짜오 프라야 짜끄리(Chao Phraya Chakkri) 장군이 반란을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딱신대왕은 짜끄리 장군과 그의 부하들의 의논 끝에 1782년 4월 7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며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고, 짜끄리 장군이 새 왕에 즉위하니 바로 그가 오늘날 태국의 첫 왕인 라마 1세(Rama I) 푸타욧파 쭐랄록대왕(Putthayotfa Chulalok the Great)입니다.
딱신대왕이 죽은 뒤 후손들은 그가 죽은 뒤 그의 의관(衣冠)을 모국인 중국의 광동성(广东省) 산두시(汕头市) 징해구(澄海区)에 있는 섬라정황딱신대제의관묘(暹罗郑皇达信大帝衣冠墓)에 고이 묻었으며, 그를 처형한 이들에 의해 건국된 오늘날의 태국에서도 1932년 들어선 군사정권으로부터 외적을 물리치고 영토를 넓힌 민족영웅으로 재평가받고 1981년 쁘렘 띤나술라논(Prem Tinsulanonda) 내각에 의해 대왕으로 추존되었습니다.
딱신대왕이 왕으로 즉위한 12월 28은 현재 태국에서 기념일로 지정되어 많은 태국인들과 남중국인들이 기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