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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산만한 ‘한 지붕 네 가족’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 담은 담론

결속력 따위 개나 줬던 吳 사례 재현되나

 

손권(孫權)의 오(吳)나라는 후한(後漢) 말 삼국의 한 축을 담당하던 나라다. 특징이라면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구축됐던 조조(曹操)의 위(魏)나라, 유비(劉備)의 촉한(蜀漢)과 달리 ‘봉건제’ 성격이 짙었다는 점이다.

 

집권 초중반기의 손권은 최종 결정권을 가진 리더가 아닌 여러 호족(豪族)연합체의 정신적 구심점 같은 존재였다.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도 주화파(主和派) 호족들이 손권의 출병(出兵)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해당 전투에서 손권이 동원한 병력은 중앙군과 몇몇 주전파(主戰派) 호족의 가병(家兵)을 합친 약 3만에 불과했다.

 

때문에 위‧촉에선 상상할 수 없는 내분‧하극상이 오나라에선 밥 먹듯이 벌어졌다. 대표적 사례가 감녕(甘寧‧생몰연도 ?~서기 219)에 대한 여몽(呂蒙‧178~219)의 ‘공격 시도’ 및 호종(胡綜‧185~243)에 대한 주환(朱桓‧177~238)의 ‘암살 시도’다.

 

여몽은 오하아몽(吳下阿蒙)‧괄목상대(刮目相對) 고사의 주인공이다. 원래 그는 아는 거라곤 주먹질밖에 없는 골수 무인(武人)이었다. 열다섯 살 무렵 매형 등당(鄧當)을 따라 오군(吳軍)에 종군한 여몽은 등당의 측근이 자신을 모욕하자 앞뒤 재지 않고 곧장 죽여버릴 정도로 호전적이었다. 여몽의 단순무식함은 성인이 돼서도 그대로였다. 많은 이들이 여몽의 머리를 두들기며 “금강석보다 단단하도다” 감탄했다.

 

손권의 참모였던 노숙(魯肅)도 여몽을 그저 채석장에 굴러다니는 흔한 돌멩이로만 알았다. 그러나 무게중심 잡으려 머리 달고 다니던 여몽은 어느 날 깨달음을 얻고 병서(兵書)를 부지런히 탐독했다. 여몽은 급기야 노숙의 전략에 훈수를 두는 경지까지 올랐다. 노숙은 “내가 알던 오나라의 아둔한 여몽이 아니다”며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봤다. 여몽의 벼슬은 후일 잔릉후(孱陵侯)에까지 이르렀다.

 

감녕은 금범적(錦帆賊)으로 불린 장강(長江)의 수적(水賊) 우두머리 출신이었다. 촉 땅에서 나는 화려한 비단으로 돛을 달고 허리에는 금방울을 매고 다닌 것으로 유명했다. 사람들은 거친 성격에 사람 해치기를 좋아하는 감녕을 두려워했으며 방울소리만 나도 달아나기 바빴다.

 

무려 20년 동안이나 악행 저지르던 감녕은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개심(改心)하고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을 가까이했다. 처음엔 촉 땅에서 머물다가 형주(荊州)의 유표(劉表)를 따른 그는 중용되지 못하자 오나라에 투항했다.

 

유수(濡須)에서 조조‧손권이 전쟁을 벌이자 감녕은 단 100명의 병사만 이끌고 위군(魏軍) 진영을 휩쓸어 천하에 이름 떨쳤다. 이 일화에서 담소자약(談笑自若) 고사가 유래됐다. 감녕의 최종 작위는 절충장군(折衝將軍)이었으며 송(宋)나라 때에 이르러 물을 다스리는 신(神)으로 떠받들어졌다.

 

그런데 정사삼국지(正史三國志) 오서(吳書) 감녕전(甘寧傳)에 의하면 어느 날 감녕의 주방에서 일하던 시동(侍童)이 죄를 짓고 여몽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여몽은 감녕의 체면을 봐서 돌려보내거나 형부(刑部)에 넘겨 국법(國法)대로 처리하는 대신 ‘투항’을 받아들였다.

 

감녕이 예물을 갖춰 여몽의 모친을 배알한 뒤에야 여몽은 시동을 돌려줬다. 그러자 감녕은 시동을 나무에 묶어 활로 쏴 죽인 뒤 배 위에 드러누웠다. 여몽은 ‘감녕이 자기네 하인을 처벌했다는 이유’로 노해 ‘군사’를 모아 북을 치고 ‘감녕의 영지(領地)’로 ‘진군(進軍)’했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이던 그 때 여몽의 모친이 맨발로 달려 나와 제정신이 아닌 아들에게 옳은 말씀을 하셨다. “주공께서 너를 육친(肉親)처럼 대하는데 어찌 사사로이 군사를 일으켜 (우군인) 감녕을 죽이려 하느냐. 네 행동이 신하된 자로서 가당키나 하느냐” 어머니의 꾸짖음에 그제야 여몽은 출병을 단념했다.

 

위‧촉에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리더 손권의 허가도 없이 개인적 원한만으로 사병(私兵)을 모아 동료를 치려 한 여몽의 행동은 오나라의 결속력이 얼마나 허약하고 위계(位階)가 서지 않았느냐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이었다.

 

주환과 호종의 이야기는 한 층 더 가관이다.

 

주환은 오군(吳郡) 지역의 유력가문 중 하나인 주 씨 일족이었다. 휘하에는 그가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모두 외고 있는 1만 가병을 거느렸다. 주환은 이민족 산월(山越)을 제압하고 위나라의 명장 조인(曹仁)‧조휴(曹休)를 격퇴하는 등 큰 활약을 했다. 벼슬은 전장군(前將軍)·청주목(靑州牧)에 이르렀다.

 

주환은 진(晉)나라의 학자 간보(干寶)가 지은 믿거나 말거나식 괴담집 수신기(搜神記)에도 등장한다. 주환에게는 한 여종이 있었는데 이 여성은 밤이 돼 잠만 들면 머리가 분리돼 창밖으로 날아갔다. 주환이 보니 남은 몸뚱이는 시체처럼 차가웠고 겨우 숨만 쉬고 있었다. 이에 주환이 이불을 덮어주자 새벽녘 돌아온 머리가 이불 때문에 몸통에 붙지 못하고 애처롭게 울기만 했다. 주환이 이불을 걷어내자 머리는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갔다. 크게 놀란 주환은 여종을 집에서 내쫓았다. 알고 보니 이 여자는 낙두민(落頭民)이라는 이족(異族)이었다.

 

아무튼 주환은 자존심이 지나칠 정도로 높았다. 특히 손권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 걸 어마어마한 모욕으로 여겼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호종이 상관으로 부임해왔다.

 

호종은 여러모로 유능한 인물이었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편모슬하(偏母膝下)에서 자라난 그는 14세 나이에 오나라에서 벼슬길에 올랐다. 손권이 한나라 조정으로부터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제수되자 호종은 국정(國政) 기밀을 다루는 등 손권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한나라가 멸망하고 손권이 칭제(稱帝)하자 호종은 후에 봉해졌다.

 

그런 호종이었음에도 주환은 “저 따위가 감히” 길길이 날뛰었다. 나아가 마치 손권 엿 잡수시라는 듯 리더의 최측근 호종을 ‘죽이려’ 들었다. 암살이 실패하자 주환은 호종을 도운 측근을 기어이 참해버렸다. 자신을 뜯어말리는 부관의 목도 날려버렸다. 그럼에도 손권은 주환을 벌하지 못하고 노골적인 하극상을 불문(不問)에 부쳤다. 주환은 ‘황제’ 손권의 수염도 제 자식 머리카락 만지듯 막 만져댔다고 한다.

 

제3지대의 4개 신당이 최근 합당(合黨)을 선언했다. 합당의 최종 걸림돌은 당명(黨名)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새로운 당명 공모도 검토했으나 결국 이준석 대표의 개혁신당을 통합신당 이름으로 쓰기로 했다. 지도부는 투 톱 체제로 가기로 했다.

 

이렇듯 초기부터 신경전 난무하는 듯한 산만한 분위기의 통합신당이 과연 얼마나 결속력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을 표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조만간 여몽‧감녕‧주환‧호종과 같은 한 지붕 네 가족의 동상이몽(同牀異夢)이 공개적 다툼으로 번지지 않을까 하는 전망이 적지 않다.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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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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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주한
    작성자
    2024.02.10

    혹시라도 요상한 소문 날까 말씀드립니다만.. 본 개담의 등장인물 이름은 '주환'이고 제 이름은 '오주한'입니다. 불미스런 호사가들 입담 없으시길.. 저는 해주 오가 문양공파 성씨의 주한입니다. 족보를 깊이 봐야겠지만 파는 일단 그런 줄로 알고 있습니다.감솨합니다. (_ _*)

  • 켈켈켈

    한 지붕 네 가족 정도면 잡탕밥이 아니라 개밥 수준이겠죠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