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망명생활은 1912년 3월 서울을 떠나서 1945년 10월 귀국할 때까지 33년7개월쯤 된다. 그중 26년간 하와이, 마지막 4년10개월을 워싱턴에서 보냈다.‘망명 혁명가 이승만의 하와이’를 제대로 조명하자면 책이 몇 권이나 필요하다. 미국의 국가체제에 매인 교민 교육과 한국 교회를 미국으로부터 독립시키는 일, 교민사회를 지배하는 한인단체의 부조리 척결,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싼 동지들과의 갈등, 중국에 매달린 임시정부와의 관계, 반공노선의 탄생, 일본과 미국 사이에서 벌인 독립투쟁, 태평양 전쟁기 소련-미국과의 대결 등, 하나같이 폭넓은 연구를 요구하는 역사의 반전이 거듭되기 때문이다.이 연재는 이승만의 건국까지 ‘스탈린과의 전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므로 ‘하와이 26년’ 기록 가운데 교육분야부터 간추린다.
◆ 도쿄의 한국YMCA 단합...회관 건립기금 마련1912년 3월26일 서울을 떠난 이승만은 일본에서 열흘간 머물며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東京朝鮮基督敎靑年會:도쿄조선YMCA)의 기반을 획기적으로 다지는 작업을 벌인다. 거기 총무를 맡고있는 옥중동지 김정식(金貞植)와 함게 ‘가마쿠라 춘령회’(鎌倉春令會)에 참석, 일주일간 의장이 되어 회의를 진행하며 ‘기독교적 신앙과 애국적 단합’을 역설, 지역별로 분열된 조직을 통합하도록 정신교육을 실시한다. 그 결과 '학생복음전도단'을 발족 시켰으며 218명의 유학생들이 통합YMCA회관 건립을 위한 모금을 벌였다. 뒷날 그 회관은 3.1운동에 앞선 ‘2.8독립운동’의 기지가 되었다.이때 일본 유학생들이 조만식, 송진우, 이광수, 김성수, 안재홍, 최린, 신익희, 조용은, 김병로, 현상윤, 이인, 윤백남, 전영택. 김필례, 장덕수, 주요한 등으로 이승만을 ‘국제적 인물’로 존경하고 기대한 청년들이었다.
일본을 떠난 이승만은 미국 미니애폴리스에 도착, 5월1일부터 29일까지 ‘기독교감리회4년총회’에 참석한다. 일부대표들이 한국감리교회를 중국감리교협의회에 통합시키려 하는 음모를 포착하고 이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였다. “한국교회의 독립이 한국의 독립에 긴요하며 한국의 독립이 국제평화 유지에 필수이므로 세계 기독교인들이 단결하여 지원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美대통령 후보 윌슨과 ‘한국 해방’ 논의...민주당 지명대회 참관
★6월19일 뉴저지 주지사 윌슨이 직접 이승만을 별장으로 불렀다.미니애폴리스 회의를 마친 이승만은 윌슨의 둘째딸 제시를 만나 면담을 신청해두었었다.윌슨을 만난 이승만은 프린스턴대학이 출판한 자신의 논문집을 윌슨에게 주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28대 대통령에 출마한 윌슨은 미국의 외교정책과 관련하여 이승만의 아이디어를 물었다. 이승만은 지체 없이 ‘약소민족의 해방론’을 펼치며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한국의 해방을 세계에 호소하는 성명서를 준비 중인데 “유력한 대통령 후보께서 성명서에 동의서명을 해달라”고 요청했다.윌슨은 정중히 거절하여 말했다. “나 개인으로서는 서명뿐만 아니라 당신의 일을 돕고 싶소, 그러나 미국 대통령으로서 그 성명서에 도장을 찍을 때는 아니오만, 우리가 함께 일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니 그것을 믿으시오. 그렇잖아도 나는 당신의 나라 한국을 포함한 모든 약소국각들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중이라오.”이승만은 예상대로였지만 다시 한 번 졸라 보았다.“미국의 현상유지 정책을 떠나서 정의인도가 지배하는 세계를 위해 나의 편이 되어주십시오”“물론이오. 하지만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이오. 당신의 갸륵한 뜻은 명심하리다.”그러면서 윌슨은 지방순회강연을 할 수 있도록 여러 사람을 소개해주면서 덧 붙였다.“이 박사, 당신은 나 한사람의 서명만 받으려하지 말고 미국 국민들로부터 마음의 서명을 모두 받도록 하시오.”
이상 대화내용은 건국후 1949년 이승만이 구술하고 시인 서정주가 집필한 [우남 이승만전:雩南 李承晩傳]에 나온 대로 요약한 것이다.
미국 동부를 한바퀴 돌아 다시 윌슨을 찾았다. 미국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볼티모어에서 열리고 있던 때, 윌슨은 바쁜 중에도 이승만을 초대하여 가족 만찬을 함께 하였다. 지명대회에서 투표를 거듭하다가 44번째 투표에서 마침내 윌슨이 후보로 결정되었다. 이때까지 이승만은 윌슨 곁에 머물며 미국 대통령 선거제도를 직접 체험한다.
하와이 정착...아버지 별세..."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이승만이 하와이에 정착한 것은 당시 미국 땅에서 교민이 가장 많은 5천여명이나 되기 때문이다. 드넓은 미국 본토에는 1천여명 뿐인데 하와이에는 이민 노동자들이 한때 7천명도 넘었다가 줄어들었지만 독립운동 기지로서 가장 좋은 곳이라 옥중동지 박용만과 합의 선택하였다.1913년 2월3일 호놀루루에 도착한 이승만을 많은 교민들이 환영해주었는데 충격적인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친 별세’ 전보, 아버지는 전해 12월5일 세상을 떠났고 아들이 석달 뒤에서야 알게 된지라 충격은 매우 컸다. 75세 이경선 옹은 아들이 떠난 뒤 며느리와 ”한지붕 아래 살수 없어“ 집을 나왔다. 이상재가 YMCA 뒤편에 구석방을 얻어 주어 병약한 몸을 연명하다가 눈을 감는다. 그의 시신은 지게에 지워져 고향땅 황해도 평산에 묻혔고, 연고자는 박승선(朴承善)이 된다. 며느리 박씨 부인은 이승만이 도미한 뒤 남편 이름에서 ‘승’자와 시아버지 이름에서 ‘선’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상처가 얼마나 컸던지 이승만은 “아버지가 생각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고 써놓았다.([청년이승만 자서전] 이정식 지음}
한편 하와이 양대 유력지 중 하나인 [호놀루루 스타 블리틴](Honolulu Star-Bulletin)은 슬픔에 잠긴 이승만을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기사를 낸다.“오늘날 한국에 이승만 박사보다 더 위대한 종교지도자는 없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한국인”이라면서 신문은 하와이 최대 교회에서 초청강연회를 연다는 선전까지 해주었다.
◆[한국교회핍박] 저술 “동양 최초의 기독교 나라 될 것”
호놀루루의 한국자유교회(담임목사 신용균) 소유 오두막에 거처를 주선 받은 이승만은 [한국교회 핍박]이란 책부터 쓴다. 이 책의 집필 목적은 다음과 같다.첫째, 일본의 ‘105인사건’ 조작과 기독교 탄압의 경위둘째, 일본이 한국 기독교를 무서워하는 배경과 이유셋째, 하와이 동포들과 세계에 전하는 이승만의 신앙과 정치적 비전.
이승만은 한일병탄 뒤의 한국인들을 5개 부류로 나눈다. ①양순한 다수의 백성 ②이완용, 송병준 등과 일진회(一進會) 등 일본에 충성하는 노예들 ③ 주색잡기 부패 대관들과 상류층 ④소수의 배일(排日)하는 사람들 ⑤전국 각지의 기독교 지도자들. 이 중에서 ⑤의 사람들을 일본이 가장 두려워하여 기독교를 뿌리 뽑고자 105인사건을 날조하였다고 설명한다.
왜 일본이 기독교 교회를 겁내는지 이승만은 8가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❶교회는 한국인들이 자유로이 모일 수 있는 장소❷교회의 활동력. 죽는데서 살기를 바라는 예수교의 오묘한 이치❸교회의 합심되는 능력, 곧 신앙의 단결력❹교회의 국민보건 보호. 마약-도박-술-담배 추방❺교회가 청년들을 교육함❻우상 숭배 거부. 일본의 신도와 신사 배척❼선교사들의 도덕적 영향력❽기독교의 혁명사상 전파력
바로 이 여덟 번째 기독교의 혁명성을 설명한 이승만은 “예수의 가르침이 곧 혁명사상”이라며“일본의 핍박은 하나님이 한국인들로 하여금 동양에 첫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게 하려는 것”이라 강조하였다. ([한국교회 핍박] 이승만 지음, 청미디어, 2008)
이 책의 집필 중에 열린 두 개의 대규모 선교집회에 연달아 참석한 이승만이 “찬미에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강연에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외치는 부흥사적 열변을 계속하자, 하와이 교민사회가 “우리의 지도자 나셨다”며 새로운 지식인 박사의 등장에 열광하였다. 미국 감리교 선교부는 “값비싼 진주를 발견”했다고 본부에 보고한다.한달 남짓에 탈고한 [한국교회핍박]은 박용만이 주필이 된 신한국보사(新韓國報社)에서 출간하였다.
★“하와이 8도는 조선 8도”---이승만은 [태평양 잡지]에 이런 글을 쓴다.“이 여덟 섬에 한인이 아니 간 곳이 없으니 가위 조선팔도라, 섬도(島)자와 길도(道)자가 뜻은 다르나 음은 일반이니 과연 조선이라 이를 만한지라. 장차 여기서 대조선을 만들어 낼 기초가 잡히기를 바랄지니, 하나님이 10년전에 이리로 한인을 인도하신 것이 무심한 일이 아니되기를 기약하겠도다....(중략)....이곳을 태평양의 낙원이라 하나니. 우리 고초중에 든 민족에게 이곳이 낙원 되기를 바라노라.” ([태평양잡지] ‘하와이 군도’ 1914년 6월호).조선 8도에서 좌절한 ‘예수 믿는 자유공화국’ 세우는 꿈은 이제 하와이 8도에서 실천함으로써 ‘기독교 정신의 대한민국’ 건국의 독립기지로 삼겠다는 포부이다.
◆한국기독학원---‘미국화’교육에서 ‘한국화’ 교육으로!
하와이에는 이미 미국 감리교가 운영하는 ‘한인기숙학교’가 있었다. 운영이 곤란해진 상태에서 이승만이 나타나자 책임자 와드맨은 8월에 교장직을 제의하고 이승만은 수락한다.학교를 맡은 이승만은 하와이 군도를 순회하며 동포들의 실상을 점검하며 본격적인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이승만은 즉각 학교 이름을 ‘한인중앙학원’(Korean Central School)로 바꾸고 자신의 교육 프로그램을 하나하나 실천에 옮긴다.★첫째 ‘남녀 공학’을 실시하였다. 한성감옥에서 부르짖던 ‘여성 교육’이다.섬을 순회하며 딸의 교육을 외면한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들을 설득, 어린이들을 데려왔다.특히 ‘사진결혼’으로 무작정 이민왔던 여성들의 호응은 뜨거웠다. 얼마 안가서 여학생 숫자가 40명이 넘었다. 기숙사가 필요하다. 부모들이 열광적으로 성금을 거두어 주어 인근에 방을 구하여 기숙사도 마련하였다.★‘미국화’ 교과목을 전면 개편, ‘한국인 주체성 교육’으로 전환하여 한글과 한문, 한국 역사, 한국 지리 등을 가르쳤다. 이 모든 것은 이승만이 20대시절 한성감옥에서 썼던 ‘미국흥학신법‘ 논설로 주장한 바를 실행한 것이다.그러자 미국 감리교 측이 이승만의 ’민족교육‘을 반대하고 나왔다.이승만은 사표를 던진다. 동시에 미국감리교 산하의 교회 행정직에서도 탈퇴하였다.1915년 7월, 늘어나는 여학생들을 위해 동포들의 모금을 통하여 기숙사를 갖춘 ’한인여학원‘을 설립하고 이사장이 되었다. 남학생들까지 급증하자 3년후 1918년 ‘한인기독학원’(The Korean Christian Institute)이라 개명한다, 더 큰 학교가 필요해지자 막대한 자금이 문제였다. 여성단체가 구성되고 학부모들이 앞장서 대대적인 모금에 나서 무려 1만 달러 넘게 모았다. 기존의 땅을 매각하고 3.5 에이커(약 4,200평) 대지를 구입, 학교와 기숙사를 신축한다.
★이승만은 4가지 교육지침을 발표하였다.첫째, 교육과 기독교 지향의 학생활동(To promote Educational and Religious Activity). 둘째, 한국인의 주체성 확보.(To retaining Korean Identity). 셋째, 젊은이들의 지도력 양성 (To promote Leadership among the Young Peaple). 넷째, 사회교육의 진흥(To promote Social Education). 이는 하와이 미래 세대가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미국 사회의 지도층이 될 수 있도록 교육하려는 이승만의 교육철학을 보여준다. 실제로 졸업생들 중에 그런 지도자들이 여럿 나왔다. 뒷날 미국 주재대사가 된 양유찬을 비롯하여 경제계, 건축계, 과학계에 진출한 인재들이 많다.
★학교 이사진을 하와이사회의 유력한 미국인들로 구성하였다. 한국기독학원이 미국사회에 인정받을 수 있으며 졸업생들의 사회진출에 힘이 되고 ‘인종차별’을 될수록 배제하려는 뜻에서다. ★교사진도 미국인이 대부분, 한국 과목도 영어로 진행하였다. 따라서 한국기독학원 졸업생들은 미국 공립 고등학교에 쉽게 진학할 수 있었다.★보이 스카웃(Boy Scouts)도 조직하였고, 야구등 체육과 음악 교육도 빼지 않았다. 악대를 만들어 이승만의 친구인 하와이왕립군악단 단장출신이 지도해주었다.★수업료는 전액 무료, 기숙사도 실비만 받았다. 또한 학생들은 일하면서 학비를 버는 기회도 제공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뒤 이승만은 [대한독립혈전기](大韓獨立血戰記)를 편찬하여 교재로 삼았다. 국내외에서 일어난 독립만세 투쟁기를 가르쳐 학생들에게 독립일꾼 정신을 심었다.
1920년 학생수가 갈수록 늘어나자 이승만은 학교를 팔고 칼리히 계곡에 4,000에어커 땅을 사서 학교와 기숙사를 크게 확장한다. 이때 비용이 8만 5천달러, 하와이 모금으로만 감당할 수 없던 이승만은 ‘학생고국방문단’ 20명을 조직, 일본치하의 조국에 보내 모금을 추진하였다. 고국에선 이상재를 비롯한 유명 인사들이 극진히 환영하고 부유층에선 민박을 제공하였고, 남학생들은 야구를, 여학생들은 무용과 음악을 공연했다. 이승만 반대세력은 이 고국방문단에 대해서도 비난하는데 결과는 여러 면에서 성공적이었다.
▶인하공대 설립◀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후 6.25전쟁의 휴전이 다가오자 1952년 12월 김법린 문교부장관에게 지시한다. “인천에 미국의 MIT 같은 공대를 세우자” 그것은 그 해가 하와이 이민 50주년이라, 인천(제물포)을 떠나 하와이로 간 이민을 기념하는 사업을 하자는 것,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 ‘한국기독학원’ 일체를 매각하고 교민들의 성금과 예산을 보태서 ‘인하공대’를 설립하였다. 인천仁川)과 하와이(荷蛙伊)의 첫 글자를 합쳐 ‘인하(仁荷)공대‘ 이름도 지었다. 설립자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개교한 인하공대에 원자력공학과도 최초로 설치, 휴전후 산업발전과 에너지 대책까지 세웠다.
◆[태평양잡지] 창간---“길게 준비하는 것, 싸우지 않고 이기는 법”
태평양 한가운데 하와이에 발행하는 잡지, 그 보다는 ‘태평양 시대’의 도래를 전망하는 미국 엘리트 사회의 트렌드를 간파한 이승만이 그에 먼저 올라타는 취지에서 [태평양잡지]로 이름지어 창간한다. 표지도 한글로 직접 쓰고 영문 이름 ‘The Korean Pacific Magazine’과 영문 목차까지 만든 이유이다. 창간호 1913년 9월호부터 자본주의 경쟁원리를 도입, 동포들의 성금에 의존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판매대금으로 발행한다고 선언한다. 일찍이 23세때 [매일신문] [제국신문]을 창간 운영했던 언론인 이승만은 [태평양잡지]도 역시 한글전용, 창간 목적도 계몽을 통한 ‘독립 성취’ 그것이다.
“본 잡지의 주의가 아무쪼록 우리 인민을 육체와 지혱와 신령상으로 두루 발달시켜 모든 일이 날로 자라서 전진하게 하고자 하나니...(중략)...만일 우리의 원하는 것이 성취하는 날이 있고저 할진대 오늘 일만 생각해서는 될 수 없으며, 지금 당한 일만 제일로 치고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으리니, 이것을 깊이 깨달아 길게 준비하는 것이 가하다 하노라”
“길게 준비하는 것”---이것은 이승만 특유의 ‘외교독립론’의 기초라 할 것이다.“전쟁을 아니하고 내것을 찾을 수 없는 줄도 깨닫지 못함이 아니라. 그러나 우리는 피 흘리지 않고 될 전쟁을 준비하고자 하나니 처음 듣는 말이라 괴이하게 여길 터이나 이것을 이루는 방법이 두 가지 있나니, 하나는 우리 용맹을 기름이오, 또 하나는 의리를 배양함이라“요컨대 기독교정신의 용기를 기르며 섣불리 싸우자고 나서 국제여론에 왕따 되지 말고 기독교 국가들과 의리를 키워나가자는 것이었다.
잡지의 내용은 소설까지 다양했지만 역시 국제정세와 독립역사에 관한 글이 가장 많았다. 미국의 공화사상, 미국 헌법의 발전, 파나마 운하, 일본 해군의 협잡, 멕시코와 각국, 필리핀 독립, 아일랜드 자치운동, 미국의 평화운동, 브라질 유람, 비행선 시대 등 한국독립과 민주주의 교육, 태평양 시대의 이슈들이 주를 이루었다. 뒷날 [태평양주보]도 발행하였다.특히 1923년 발표한 반공논문 시리즈 ‘공산당의 당부당’에 관한 설명은 이 연재 뒤에 나오는 해당사건 편에서 다룬다.
◆한국기독교회---독립운동의 영적 파워 생산기지
한인중앙학원의 교장과 미국감리교 하와이 지방회 교육분과위원장을 맡아 일하던 이승만은1915년 6월 두 가지 직책을 모두 사퇴한 이유는 앞에서 밝혔다. 미국 감리교측의 친일적 행태를 이승만이 여러번 비판하자 새로 부임한 프라이 목사가 ”학교일만 하라“고 나왔다.학교 문제는 위에서 설명한 대로 독자적인 한국인교육으로 새 출발에 성공하였지만 교회문제까지 한꺼번에 해결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이승만은 다시 한번 여러 섬을 돌며 ‘독립된 한국인 교회’를 세우자고 역설했다.드디어 1916년부터 이승만을 따르는 교인들이 학교 기숙사에 모여 예배를 시작하며 교인들이 늘어나 스스로 ‘신립교회’(新立敎會)라 부른다. 그해 크리스마스 전 23일 각 섬의 대표14명이 모여 ‘한인기독교회’(Korean Christian Church)로 결정, 공식출범함으로써 이승만은 한국인 학교에 이어 한국인교회까지 세우는 쾌거를 이룬다.
장로와 집사가 없이 평신도 중심의 민주주의 원칙을 따르는 이 교회는 창립자 겸 선교부장인 이승만이 지도하는 이사원(理事院)이 인도하는 자치교회였다. 3.1운동후 임시정부의 집정관총재 또는 임정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정치활동을 열정적으로 보좌한 인물들은 민찬호(閔燦鎬) 이종관(李鐘寬) 장붕(張鵬) 등 목사들과 안현경, 이원순(李元淳) 등 이사들이다예배당 건물도 없이 떠돌던 한인기독교회는 10여년간 건축헌금을 모아 마침내 1938년 4월24일 릴리하 가(Liliha Street)에 경복궁 광화문을 본뜬 3층 기와집을 준공한다. 3개의 아치문을 가진 이 건물은 지금도 교회로 살아있다.
배재학당 시절부터 꿈 꾸고 한성감옥에서 [독립정신] 실천강령을 만든 이승만이 망명객이 되어서 마침내 태평양시대 한 복판에 세운 기독학교와 우리 교회--”기독교를 근본 삼는 자유 독립“의 민족공동체 구축을 위한 ‘정신혁명’ 실험이 일단 성공을 거둔 작품이었다. 언젠가 조국 3천리 한반도를 일본으로부터 다시 찾아서 반드시 이룩해야할 꿈을 살려줄 독립운동의 영적 파워 생산기지들이다.
사사건건 이승만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 한인기독교회를 세운 것을 두고도 ”이승만이 동포사회를 분열시켰다“고 욕을 한다. 도대체 그들에게 ‘독립’은 무엇이고 무슨 방법론이 있었던가?이제 무장투쟁 독립론의 박용만을 만나볼 차례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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