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북한 노동자들과 탈북자들을 지원·구조해온 백광순(53) 선교사가 러시아 국가기밀을 외국 정보기관에 넘긴 '간첩혐의'로 구금됐다. 백 선교사가 넘겼다는 '국가기밀'이 무엇인지, '국가기밀' 입수와 공유가 의도적이었는지는 현재로선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러시아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상대로 펼쳐온 '인질외교'(Hostage Diplomacy)가 재조명되고 있다. 러시아 인질외교는 러시아 국영매체의 보도와 러시아 정부의 공식 발표로 시작해 상대국 여론을 악화함으로써 상대국 정부의 태도 전환이라는 성과를 거둬왔다.◆러시아 "백 씨, 국가기밀 외국 정보기관에 넘겨" 주장
17일 외교가에 따르면, 지난 10여년 간 러시아를 오가며 북한 노동자와 탈북자를 지원·구조해오던 백 선교사는 지난 1월 중국에서 육로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입국한 지 며칠 만에 간첩혐의로 연방보안국(FSB)에 체포됐다.
러시아 국영 타스통신은 지난 11일(현지시간) "간첩범죄 수사 중 한국인의 신원을 확인했다"며 "백 씨가 러시아 국가기밀에 해당하는 정보를 외국 정보기관에 넘겼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백 씨에 대한 형사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가 자신을 작가라고 소개하면서 메신저로 국가기밀 정보를 받았다는 것이 확인됐다"고 전했다.
러시아 정부는 최초 보도가 나온 뒤 약 이틀 만인 13일 백 선교사의 체포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마리야 자하로바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언론브리핑에서 "한국과 긴밀히 접촉하고 있으며 영사 접견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면서도 "백 씨가 간첩죄에 해당하는 행위를 한 혐의를 받고 있기에 수사 진행 상황에 대한 추가 정보는 기밀"이라고 밝혔다.
◆'美 농구선수-러 무기거래상 맞교환' … 러 '인질외교'의 승리
전체주의 국가인 러시아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상대로 인질외교를 벌일 때 관영매체와 언론브리핑을 통해 상대국의 여론을 움직이며 협상의 주도권을 잡았다. '러시아 인질외교의 승리'라는 평가를 받는 '그라이너-부트' 맞교환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빅토르 부트는 아프가니스탄과 아프리카 등 분쟁지역의 무기 밀매에 깊숙이 관여해 '죽음의 상인'으로 불렸다. 부트는 2008년 태국 방콕에서 붙잡혀 2010년 11월 뉴욕의 한 법원에서 25년형을 선고받았다. 러시아는 그의 석방을 위해 10년 넘게 공을 들였지만 실패했다.
그러던 2022년 2월 러시아는 대전기를 마련했다. 미국 여자프로농구(WNBA) 오프시즌 동안 러시아 팀에서 뛰고자 입국하던 브리트니 그라이너를 체포하면서다. 그라이너는 대마 농축액이 든 액상형 전자담배가 수하물에서 발견돼 모스크바 공항에서 마약 밀반입 혐의로 체포됐다.
러시아는 그라이너에게 징역 9년형을 선고할 때까지 처벌 과정을 하나하나 공개하면서 미국 여론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협상 주도권을 잡았다. 결국 같은 해 7월 바이든 미 행정부는 그라이너와 부트의 맞교환을 러시아에 먼저 제안했고 약 5개월간의 협상 끝에 그해 12월 맞교환이 이뤄졌다.
미국 국내 정치권은 바이든 행정부의 '그라이너-부트' 맞교환이 국가안보를 희생시킨 '졸속 외교'라며 거세게 비판했다. 특히 죄질의 경중이 다른 마약 밀반입과 불법 무기거래를 동등하게 취급했다는 점, 2018년 러시아에서 간첩혐의로 체포돼 2020년 16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미 해병대원 출신 기업보안책임자 폴 휠런을 포함한 '2대1 맞교환'에 실패했다는 점에서 비판이 잦아들지 않았다. 미국은 2대1 맞교환을 제안했지만, 러시아는 휠런의 간첩혐의를 문제 삼으며 그의 석방을 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것조차 거부했다.
공화당 소속 마이크 왈츠 하원의원은 "러시아에 훨씬 더 오랫동안 부당하게 억류된 미 해병대 폴 휠런은 어디에 있느냐"며 "참전용사 위에 유명인사인가"라고 지적했다.
같은 당 스콧 페리 하원의원도 "(바이든이) 총을 밀수하고 미국인들을 쏘는 것을 돕는 적과 마약을 밀반입하고 농구공을 쏘는 미국인을 맞바꿨다"며 "그러는 사이 전직 미 해병대원 폴 휠런은 러시아 감옥에서 썩어간다"고 비판했다.
논란 속 죄수 맞교환은 결론적으로 양국 관계 개선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약 3개월 뒤인 2023년 3월 월스트리트저널(WSJ) 모스크바 지국에서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미국인 에반 게르시코비치가 취재 중 FSB에 간첩 혐의로 구속됐기 때문이다. 냉전시대 이후 러시아에서 미국인 기자가 간첩 혐의로 구금된 최초 사례다.
◆국가기밀은 러북 무기거래 정보? … 우크라 지원 차단 위한 인질외교 가능성
탈북자를 돕던 한국인 선교사에게 러시아가 추방이나 영구 입국제한 조치가 아닌 간첩혐의를 적용한 것 역시 이번이 처음이다. 러시아는 이례적인 강경대응을 하면서도 해당 국가기밀이 무엇인지 일절 공개하지 않고 있다. 백 선교사가 제3국 정보기관에 공유했다는 '국가기밀'이 러북 간 무기거래와 관련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는 이유다.
특히 그가 체포된 블라디보스토크는 북한 나진과 더불어 러북 간 무기거래 장소로 지목된다는 점에서 추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이 사건은 아직 정확한 사실관계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러시아 인질외교의 수단으로 활용될 여지가 있다.
자하로바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안타깝게도 우리는 한국 측에서 양국 관계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을 자주 봤다"며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한국이 서방 주도의 대러 제재에 동참하고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고 있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지적했다. 백 선교사가 제3국 정보기관에 러시아 국가기밀을 넘겼다면서 한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문제삼은 것이다.
한 외교안보 소식통은 "그간 중국과 러시아 등 전체주의 국가들이 인질외교를 적극적으로 펼쳐온 것은 사실"이라며 "전체주의 국가들은 정보기관과 보안기관들을 통해 외국인의 활동을 샅샅이 파악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해서 미국 내에서도 이견이 분분하고 유럽도 레토릭만 셀 뿐 실질적인 지원 움직임은 크지 않다"고 했다.
이어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이 의존할 수 있는 국가는 한국과 일본 등"이라며 "우리는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견지하고 있지만, 러시아 입장에서는 이번 사건을 통해 한국은 물론,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다른 국가들에 우크라이나 지원을 중단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체주의 국가들이 주장하는 '간첩혐의' … '회색지대 전술'의 일환
'러시아통'인 또 다른 외교안보 소식통은 "백 선교사가 고의로 러시아 '국가기밀'을 입수했는지는 알 수 없다"며 "선교사들이 탈북자들과 라포(rapport)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이들과 사진과 정보 등을 주고받다 러시아가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가 의도치 않게 섞여 들어갈 수 있다"고 밝혔다.
문제는 러시아, 중국, 북한 등 전체주의 국가들은 단순한 사진촬영이나 교류도 국내법에 따라 간첩혐의로 규정한다는 사실이다. 휠런과 게르시코비치에게 적용된 간첩혐의도 뚜렷하지 않다.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고자 러시아에 방문한 휠런은 휴일에 찍은 사진들이 들어있는 줄 알고 플래시 드라이브(저장장치)를 건네받았다가 간첩혐의로 체포됐다. 그는 CNN에 "나는 일어나지도 않은 범죄로 체포됐다"면서 "내가 왜 아직도 여기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토로했다.
게르시코비치는 취재 중 미국의 지시에 따라 러시아 군산 복합 기업 중 한 곳의 활동에 대한 기밀정보를 수집한 혐의로 체포됐다. 러시아 법원은 2022년 3월 자국에 방문하는 외국인이 우크라이나 전쟁 등 정책을 비판하지 못하도록 제정한 '가짜뉴스법'에 근거해 그를 러시아군에 대한 거짓 정보를 퍼뜨린 혐의로 기소했다.
이에 대해 전직 외교부 고위 당국자는 뉴데일리와의 통화에서 "전체주의 국가들은 자국의 외교적 목적을 위해 불법행위를 일삼아왔다"며 "간첩죄를 입증하기 쉽지 않으니 일종의 '회색지대(grey zone) 전술'을 펼치기도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러시아의 목적은 한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막고 북한에 '선물'을 줌으로써 포탄을 더 얻기 위한 것일 수 있다"며 "외교 당국이 교섭을 통해 러시아의 직접적인 목표를 확인하고 대응방안을 정하겠지만, 국내에서 범법행위를 저지르는 러시아인을 적발해 맞교환하는 현실적인 방법도 있다. 인질외교에 굴복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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