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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15대 대선, YS는 누구를 지지했을까
15대 대선을 앞둔 1997년, 당시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YS)이었다. 당시 당대표 인선은 총재가 지명하는 형태였다. 신한국당 총재이자 대통령이었던 YS가 지명한 대표는 곧 차기 대통령으로 지지한다는 의미였다. 당시 YS는 이홍구 전 대표, 이한동·이수성 등을 후보군으로 생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내가 당 대표의 인선을 중요시한 이유는 무엇보다 총재인 내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원들 앞에 새로 당 대표를 내세우는 것은 곧 그 사람을 내가 우리 당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고 있다는 뜻을 공표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중략) 1997년 초 국정 분위기 쇄신을 위해 대표를 교체해야 하는 사정이 생기지 않았다면 원만하게 당을 관리해온 이홍구 전 대표에게 계속 그 역할을 맡길 생각도 있었다. 이한동·이수성 씨도 대임을 맡는다면 훌륭하게 국정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김영삼 회고록 下, 305~306쪽.
YS가 지지한 인물은 이회창 전 국무총리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후보 교체론, IMF, DJ 비자금 수사 등에서 입장차를 보이며 갈라섰다.ⓒ뉴시스
고민 끝에 YS가 지지한 인물은 이회창 전 국무총리였다. 이회창은 문민정부 시절 감사원장 및 국무총리로 박탈됐으며, 1996년 총선에서 신한국당 전국구 1번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당대표로 지명된 지 4개월 후, 이회창은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로 결정됐다. 9명의 대통령 후보 가운데, 2차 결선 투표에서 2300표 차로 이인제를 꺾고 최종 당선됐다.
그러나 곧바로 이회창은 두 아들에 대한 병역 비리 의혹이 불거졌다. 신한국당 당내 경선이 끝나자, 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자민련)에서 공세를 퍼부었다. 전당대회 직후 50%에 가까운 지지율을 얻었던 이회창은 병풍(兵風)으로 20%대로 급락하기 시작했다.
결국 상황이 뒤바뀌었다. 후보 리스크가 발생하자, 2위로 밀려났던 이인제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인제는 직·간접적으로 후보 교체론을 내세웠고, 당은 이회창 대 이인제로 분열됐다. 갈등 끝에 9월 13일 이인제는 신한국당 탈당 및 대선 독자 출마를 선언하기 이른다.
‘누구를 후보로 내세우든 어렵지 않게 당선될 수 있으리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305쪽)’고 생각했던 YS도 후보 교체론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이에 YS는 이인제의 탈당을 막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회고록에 기술했다. 특히 그는 1971년 신민당 대통령 경선에서 김대중 후보(DJ)에게 패배하고도, 약속대로 DJ의 당선을 위해 전국을 다니며 최선을 다했다는 경험을 들려주며 설득했다고 언급했다.
나는 8월 27일 이인제 경기도지사를 청와대로 불러 단둘이서 점심을 하면서 대통령 선거 독자 출마를 강력히 만류했다. 이날 회동에서 나는 “12월 대선에서의 정권 재창출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당력이 집중돼야 하며, 이 지사가 당의 단합을 위해 적극 노력해 주기 바란다”며 독자 출마를 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강조했다.
-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下, 328쪽.
그러면서 YS는 이인제 탈당의 가장 큰 원인으로 이회창을 지목했다. 그는 이인제를 끌어안으려는 이회창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이인제 지사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는 나의 설득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이 있었다. 이인제 지사를 끌어안으려는 이회창씨 본인의 노력이었다. 이에 이회창 후보 본인이 이인제 지사를 직접 포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중략) 전당대회가 끝난 후 나는 매주 한 번씩 이회창 대표와 주례 회동을 할 때마다 이인제씨를 그의 집으로 직접 찾아가 설득하라고 여러 차례 충고했다.
(중략) 나중에는 내가 이회창씨에게 이런 얘기까지 했다. “지금 이인제는 당신 머리 위에 있다. 여론조사를 보아도 당신은 지금 이인제씨에 비해 형편없는 열세인데, 하루빨리 이인제씨를 직접 집으로 찾아가서 만나야 한다. 빨리 이인제씨를 만나라. 만나서 약속해라. 이회창씨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 국무총리든 무엇이든 이인제씨가 원하는 자리를 주겠다고 하라.”
내가 이렇게까지 일러주었는데도 이회창은 “가겠다”는 말만 하고 끝내 이인제씨의 집을 찾아가지 않았다. 말을 물가까지 데리고 갈 수는 있어도 물을 먹일 수는 없는 것처럼, 본인이 시행하지 않으니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下, 329~331쪽.
이회창을 지지했던 YS지만, 후보 교체론이 대두된 이후 신뢰가 악화됐다. YS는 “이인제를 비롯한 당내 비주류들을 추스르고 끌어안지는 못했다”며 “이회창씨의 미숙한 정치적 판단력이 한심스럽기까지 했다(333쪽)”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회창의 주장은 달랐다. 그는 이인제를 찾아가 만나고자 무척 노력했다고 반박했다.
나는 이인제 지사를 찾아가 만나고자 무척 노력했다. (중략) 나는 진심으로 그에게 협력을 구하고 함께 3김 시대 후의 새로운 정권을 창출하자고 말했다. (중략) 하지만 그는 나의 제의에는 즉답을 하지 않고 당 개혁안만 얘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 사람은 자기 갈 길을 가기로 이미 결심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 이회창 회고록2, 162쪽.
이인제의 탈당에 따른 위기 속에 YS는 이회창에게 당 총재직을 조기 이양 방침을 밝혔다. 조기 이양을 통해 이회창 체제로 안정시키고, 당내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이회창도 계파에 관계없이 각계 세력을 모두 포용해 당직 개편을 단행했다.
이후 YS와 이회창은 IMF 경제 위기 및 DJ 비자금 수사와 관련해 충돌하면서 갈라섰다. 이회창은 경제 위기에 대해서는 “정부가 위기의식을 갖고 적극적으로 필요한 개입 정책을 써야 하는데도 기본적 경제 지표가 괜찮다는 이유로 방관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174쪽)”고 비판했다.
또한 YS가 DJ의 비자금 수사 중단을 발표하자, 이회창은 “집권당 후보가 정치 혁신의 카드로 내세운 비자금 폭로를 집권당의 대통령이 뒤엎어 버리는 것은 나에게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가한 것(175쪽)”이라 봤다.
그러나 YS는 “대통령 선거를 불과 2개월 앞둔 시점에, 김대중씨의 부정축재를 수사하게 되면 전라도 지역은 물론 서울에서도 폭동이 일어날 것이고, 그럴 경우 대선을 치를 수 없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며 “이회창씨의 생각은 경쟁자를 선거에서 배제하려다가 선거 자체를 없애 버리게 될 무모한 발상이었다(343쪽)”고 반박했다.
결국 입장차를 좁히지 못했다. 이회창은 YS에 탈당을 요구하며 홀로서기를 택했다. 이에 YS는 반발하며 두 사람은 완전히 갈라섰다.
나는 김 대통령에게 탈당을 요구했지만 그와의 결별까지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당의 명예총재로 있고 당내 민주계 세력의 대부와 같은 위치에 있으면서 당의 대선 후보인 나를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훼방만 하고 있으니 국민의 눈에 어떻게 비치겠는가.
- 이회창 회고록2, 178쪽.
10월 21일 검찰이 비자금 수사를 유보하겠다고 발표하자, 이회창 후보는 바로 다음날인 22일 기자회견을 갖고 명예총재인 나의 탈당을 요구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나에게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김대중 비자금 사건을 터뜨리더니, 이제는 내가 만든 당에서 날 보고 나가달라는 말이었다. 가뜩이나 흔들리는 지도력을 수습하고 당을 결속시켜야 할 판국에 당을 또다시 내분으로 내모는 발상이었다.
-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 下, 347쪽.
이렇듯 신한국당 내부 분열과 당 후보와 대통령 간의 갈등 끝에, 대선 승리는 DJ에게로 넘어갔다.
출처 : 시사오늘(시사ON)(http://www.sisaon.co.kr)
이인제
당시 IMF 때문에 한나라당은 김영삼 지우기에 몰두했는데 이회창은 김영삼 인형두고 불태울정도로 김영삼 싫어했음. 그래서 YS는 차라리 김대중이 되면 되라는 생각으로 김영삼이 이인제 까지 꼬득인거임. 그래서 표갈되서 김대중이 당선된거고
김대중이 안됐음 김영삼은 철저하게 정치보복 당하고 정치적이든 도덕적이든 갈기갈기 찢겨졌을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