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원래 가려 했던 궁정동 안전가옥 술자리를 갑작스럽게 취소하였다.
그리고 이로 인해 김재규는 암살에 실패하게 된다.
결국 김재규는 이 사실을 미처 듣지 못하고 술자리에 참석하였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왔는데,
이에 결국 김재규는 이리 죽나 저리 죽나라고 생각하며 차지철을 총으로 쐈고, 그렇게 10.26 사태는 단순한 차지철의 사망으로 끝난다.
이후 범인으로 잡힌 김재규는 총애하던 부하를 잃은 박정희의 분노로 인해 사형당할 것 같았으나, 임기 말의 쇠약해진 박 대통령은 우유부단했고, 결국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게 된다.
이렇게 순식간에 정계에서 차지철, 김재규라는 두 거물이 사라진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고, 의지하던 부하마저 잃어 정진석으로 더욱 약해진 박정희는 며칠동안 대통령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정도로 충격을 받기도 했고, 이 권력의 공백 기간동안 민주공화당은 2인자였던 김종필이 장악, 정무는 사실상 잠시 최규하가 보았다.
그리고 얼마 뒤 휴식을 취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차지철 암살 사건에도 불구하고 이어지고 있던 민주화 데모에 대한 대책회의를 소집하는 것이었다. 회의를 소집한 박 대통령은 시위 진압을 논의했으나 전보다는 소극적이었다. 여기서 차지철이 있었더라면 탱크를 통한 강경 진압을 이야기했겠지만, 차지철은 없었고, 김계원, 최규하 등은 "무모한 진압은 반대"라는 견해를 보이자 결국 박 대통령은 고민 끝에 진압을 보류하고 더 생각해보기로 한다.
10.26 암살 미수 사태와 차지철의 죽음 이후 큰 충격을 받은 박 대통령은 새로운 사업 추진보다는 기존에 추진하던 사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자신이 원래 의지했던 차지철이 사라지자 새로 임명된 경호실장 정동호에게 조금씩 의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렇게 박정희의 신임을 얻은 정동호 경호실장은 마치 차지철처럼 온갖 부서에 간섭하고 갑질을 하였고, 이에 반발한 최규하 국무총리, 신현확 경제기획원장 등은 정동호를 처벌하기 위해서 부도덕공직자 특별처벌법 제정을 호소하기 시작, 정동호는 이것이 자신을 노린 것이라 판단하여 반발, 그렇게 말년의 박정희 대통령은 점차 권력의 중심에서 부하들의 권력다툼으로 서서히 약화되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사히 1979년을 넘긴 박 대통령은 1980년 백지 계획을 실행, 수도를 서울에서 세종으로 이전하며 서울 공화국 현상을 타파하고자 했으며, 새로 이전한 연기군(세종)에 집중개발을 하는 한편, 백곰 사업으로 미사일을 성공적으로 개발, 이어서 미국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핵개발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2차 오일 쇼크로 인해 경제가 흔들리고 물가가 폭등하자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대책을 세워야 했으나 이를 잘 해결하지 못하고 계속되는 민주항쟁으로 인해 나라까지 혼란스러워지니, 밖으로는 냉전이 데탕트에 접어들고, 안으로는 권력 다툼과 민주화 운동이 섞여 매우 혼란스러워졌다. 그리고 미국에서 박정희 암살까지 계획한다는 설까지 돌며 경제재제를 서서히 가하기 시작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로 인해 다시 한번 한국의 작은 입지에 좌절하였다. 그러나, 그만큼 핵개발은 놓을 수 없었기에 결국 핵개발에 대한 마음을 굳힌다.
그리고, 1980년이 지나고, 1981년, 핵개발이 완료된다.
2027 홍준표 대통령 당선
2028 남북통일 및 김정은 사형 집행
2029 한미정상회담을 통한 한미동맹 강화 및 중국과 러시아 영향력 견제
2030 미국 독일 일본과 같이 G4 가입 그리고 한국 선진국으로 도약
2031 세계적인 대기업 대폭 한국에 유치
2032 당선 당시 60프로였던 홍카 퇴임할 때 지지율 81프로로 박수받으면서 물러나심
저도 소설 잘 쓰나요? ㅋㅋ
괜찮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