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정부는 연이는 사건사고로 인해 지지를 상당수 잃어 50%대의 지지율을 유지해가고 있었고, 결국 돌파구를 찾지도 못하고 연이은 공약 포기와 '김종필 선언' 등으로 정부의 앞날은 더욱 불투명해졌다. 또한 기업들과의 신뢰도 잃었기에 이회창 정부 시기 정계와 재계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마찰을 일으켰다. 결국 이회창 대통령은 우선 현재의 지지율에 안주하여 민생과 경제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조용히 이 대통령이 민생에 집중하는 동안,
연이은 한나라당 출신 지자체장들의 비리 연루로 열린 대규모 보궐선거에서 모든 지역을 민주당이 싹쓸이해버렸고, 이로 인해 한나라당의 지방권력이 약해지는 한편,
곧이어 김종필 국무총리가 총리직에서 자진 사임하고 갑작스럽게 한나라당을 탈당, 역사대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고야 만다.
이는 다양한 김종필의 불만이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기업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고 했던 자신에게 기업에 대한 유화책을 발표시킨 것이 김종필을 불쾌하게 만든 것이다. 이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자유민주연합이 32%, 새정치국민회의가 27%, 한나라당은 25%로 이회창 정부는 집권여당의 지지율마저 박살나며 더욱 어려워졌다.
그리고 얼마 안가 이회창 정부 최악의 사건, "김대업 사태"가 터졌다. 김대업이라는 남성이 녹취 테이프를 증거로 하여 이회창 대통령의 자녀가 병역 비리를 받았다고 주장한 것인데, 이는 그래도 깨끗하다고 평가받던 이회창에게 똥을 뿌리는 것과 같았다.
이 사건 이후 이회창의 지지율이 14%로 대폭락할 정도로 정국을 뒤흔들었으나, 막상 녹취 테이프가 조작증거임이 밝혀졌고, 김대업도 허위사실 유포로 체포되었지만, 이회창의 지지율은 25%에서 더 올라가지 못했다.
이로 인해 이회창 대통령은 병역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나라를 혼란스럽게 한 데에서 국민에게 송구함을 감출 수 없다"라며 대국민사과를 해야 했다.
한편 새정치국민회의 대표 노무현은 청렴하고 포용력있는 모습으로 소위 '노풍'을 일으키며 젊은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받기 시작했고, 노무현의 주도 아래 민주당은 서서히 물갈이되기 시작하며 당권파였던 구 동교동계가 힘을 잃기 시작했다. 이 즈음 여론조사에서 민주당은 지지율이 40%를 일시적으로 돌파하기도 했다.
그렇게 이회창 정부는 끝없이 추락하나 싶었지만,
이회창 정부가 기사회생하게 되는 '북풍'과 '민주당 분당'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ㅊ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