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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영웅을 지워버린 비겁자들을 고발하다! (feat.홍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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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퀴즈출연건축학도

1940년 6월의 프랑스는 패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군대는 패주했고, 정부는 수도를 포기하고 도망갔으며, 수백만의 시민들이 피난길에 올랐다.

내각은 임시수도 투르에 모였다.

그때는 이미 독일군이 파리에 입성했던 때이며, 남쪽에선 이탈리아가 공세를 개시했다는 전보가 날라왔다. 한 달 전 스당이 관통당해 프랑스군 주력이 섬멸당했을 때, 전세는 이미 거기서 결정된 것이었다.

총리 폴 레노는 고민에 빠진다.

'누군가가 책임을 지고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

곧 그는 스페인 대사로 가 있던 필리프 페탱에게 귀국을 명령한다.

페탱, 그는 누구인가?

그는 1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켜낸 장군이었다.

특히 최대 규모의 전투였던 베르됭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페탱은 프랑스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폴 레노는 그러한 국민적 영웅만이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페탱에게 후임 총리 자리를 권했다.

그러나 그 자리는 누가 보더라도 독이 든 성배였다.

독일은 휴전을 명분으로 프랑스에 가혹한 조건을 요구할 것이고, 결국 누가 오더라도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자리였다.

스페인 총통 프랑코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패탱의 귀국을 간곡히 만류했다.

"장군, 가지 마십시오. 나이 핑계를 대세요. 당신은 베르됭의 승리자였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다른 사람이 패배한 전쟁에 빌려주지 마십시오."

그러나 페탱의 결심은 단호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제가 조국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그렇게 페탱은 독이 든 성배를 기꺼이 받았다.

 

귀국 후 새 총리로 선출된 페탱은 곧바로 독일과의 휴전 협상에 나섰다.

협상은 가혹했다. 파리를 포함한 프랑스 국토 5분의 3을 독일 관할로 넘기고, 독일에 물적, 인적 자원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패탱이 쓸 수 있는 카드는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군대마저 항복을 요구하고 있었다.

결국 6월 22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프랑스 3공화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남쪽의 휴양 도시 비시에 새 정부가 들어섰다.

해외로 도주한 항전파 세력들은 왜 항복했냐며 전쟁에 관여하지도 않은 페탱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페탱에겐 작게나마 남아 있는 프랑스의 주권과 4천만 프랑스 국민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그 어떤 대의보다도 중요했고,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독일의 끈질긴 참전 요구를 거절하였으며, 나치가 유대인을 색출하기 위해 만든 다비드의 별 표식도 금지시켰다.
독일군 2명이 살해당한 일의 분풀이로 히틀러가 프랑스군 포로 100명을 처형하려 하자, "그렇다면 나를 먼저 죽여라"고 으름장을 놔 보복 처형을 막아내기도 했다.

독일이 200만 명의 노동자를 요구하자, 11만 명의 프랑스군 포로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64만 명의 자원자만을 보낸 일화도 있다.

하지만, 이미 망해버린 국가의 수반으로서 페탱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독일이 프랑스에서 유대인을 잡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많은 국민들을 징용해 가는 것도 막을 수 없었다.

1942년, 독일군이 휴전 협정을 무시하고 남아있는 프랑스 영토로 진군했을 때도 페탱의 미약한 힘으로는 이를 막아낼 수 없었다.

그들이 지휘한 전쟁의 책임을 대신 지고 있는 페탱에게 해외의 항전파들은 왜 그들을 막지 못 했냐고 고함친다. 그들에게도 양심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런 대내외적 압박과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그는 꺼져가는 프랑스의 숨을 불어넣기 위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독일에 협조하지 않는 페탱의 태도에 분개한 히틀러는 1944년 페탱을 독일로 압송했으며, 전쟁이 끝난 1945년 5월에야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영웅을 환영하는 시민들의 꽃다발이 아니라, 배신자를 처단하라는 함성뿐이었다.

패전의 직접적인 책임이 있으면서도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해외로 도주한 항전파들은 개선장군이 되어 있었으며, 부족한 힘으로나마 국민들을 보호하고 조국을 재건하고자 했던 사람은 독일에 부역한 매국노가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하늘에 태양이 두 개 있으면 안 되는 것처럼, 영웅도 2명일 순 없었다. 비겁자들은 감히 영웅을 처단하고자 재판을 열었다.

어제까지 독일군과 와인을 나눠 먹으며 그들에게 아첨하던 자들이, 오늘은 재판의 방청객으로 나와 "반역자 페탱을 죽여라!"라고 외치고 있었다.

재판이 막 시작하려던 찰나, 페탱의 수석 변호인은 재판장 몽지보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이윽고 변호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이 재판에 나온 3명의 재판관과 검사인 검찰총장이 비시정권 치하에서 페탱에게 충성서약을 했던 사람들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재판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검찰총장은 외국 군대의 통제 하에 이뤄진 서약이기에 효력이 없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재판은 재개되었다. 검찰은 페탱에게 국가 반역 혐의를 적용하여 기소하였다.

페탱은 항변했다. "나는 조국을 위해 봉사하는 데 일생을 바쳤으며 합법적으로 권력을 승계했다. 나는 군대를 이끌고 1918년의 승리를 장식했다. 그리고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이었던 1940년의 그 날, 프랑스는 다시 나에게 의지해 왔다. 나는 아무것도 요구한 적이 없고 바란 것도 없었다. 다만 국민이 나에게 간청했을 뿐이다... 당신들은 그러한 조건 하에서 통치해야 하는 어려움을 이해할 수 있는가? 매일 비수가 목구멍을 겨눈 상태에서 나는 적의 요구와 싸워야 했다. 검찰은 단지 나를 공격하는 데 여념이 없겠지만 역사는 내가 여러분을 보호했음을 말해줄 것이다…. 드골 장군이 우리의 국경 밖에서 투쟁하였다면 나는 안에서 프랑스를 보존함으로써 해방을 위한 길을 준비하였다…. 그러므로 어떠한 프랑스인도 합법적인 국가원수로부터의 명령에 복종했다는 죄로 구속되거나 선고를 받아서는 안 된다. 당신들은 무고한 사람을 재판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말하려 한다. 당신과 온 세계에, 당신들이 죄 없는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라고. 나는 조국을 믿는다."
 

일순간에 재판장은 고요해졌다. 페탱의 단어는 그들의 비난을 압도하였다. '그 시대에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을 했다' 확신에 찬 페탱의 어조에 매국노를 확신하던 그들의 생각에도 의문이 생긴 것이다. 선과 악은 때로는 그 경계가 너무도 희미하다.

그러나 재판을 뒤집을 순 없었다. 처음부터 정치 재판이었다. 24명의 배심원 중 12명은 좌익 레지스탕스, 나머지 12명은 전직 의원. 모두 페탱의 적들이었다. 그가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그를 찬양하던 정치인들이 재판의 증인으로 나와 그를 비난하였으며, 개중엔 그에게 후임 총리 자리를 권했던 전직 총리 폴 레노도 있었다. 결국 그가 페탱을 찾은 이유는, 자신의 패전 책임을 뒤집어씌울 희생양을 고른 것이었다.

결과는 사형. 700여 년 전 잔 다르크에게 그랬던 것처럼 조국은 또다시 영웅에게 죽음을 명령했다.

허나 정치적 부담을 우려하여 종신형으로 감형하고, 대서양 일드외 섬의 교도소에 무기한 수감시킨다.

결국 1951년, 페탱은 95세를 일기로 외로운 섬에서 쓸쓸히 옥사한다.

그 누구도 1919년의 영광스러운 구국의 영웅, 원수 필리프 페탱을 부정하진 않는다.

그러나 1940년의 치욕의 괴뢰 정부 수반 필리프 페탱에 대해선 지금까지도 논쟁이 분분하며, 프랑스인들이 가장 꺼려하는 대화 주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는 역사에 영웅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굳이 그 불명예의 자리에 오른 것일까? 왜 영웅으로 남길 거부한 것일까? 분명한 것은 그가 부귀영화를 위해 자리를 맡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조국으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아 온 그가, 생을 마감할 무렵에 마지막으로 조국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숨이 꺼져가던 조국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관여하지도 않는 전쟁의 책임을 기꺼이 짊어졌고, 그렇게 해서라도 사랑하는 조국을 적의 손아귀로부터 지켜내고자 하였다.

 

"제가 만약 프랑스의 칼이 될 수 없다면, 저는 방패라도 되고자 하였습니다." 1944년, 독일로 압송당할 때 그의 마지막 대국민 연설에서 그가 4년 동안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가치가 무엇이었는지 찾을 수 있다. 80여 년 전 프랑스 현대사 최고의 비극, 조국의 완전한 패망을 막고자 끝까지 고군분투한 노병을 패망의 역적들이 처단한 이 아이러니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2017년,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건으로 한국의 보수 진영은 완전히 괴멸되었다. 여당이라는 자들은 서로에게 탄핵의 책임을 덮어씌우기 위해 사분오열했고, 민주당은 20년 집권이라는 야욕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 대다수 국민들은 보수 우파의 이념 자체를 사라져야 할 '악'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대선이 임박했지만, 누구도 나서려 하지 않았다. 당의 해체를 막기 위해서라도 후보를 내야 했지만, '어차피 질 선거인데, 왜 괜히 나가서 정치 생명 깎아 먹냐?' 이런 생각이 당시 당내에 팽배했다. 이때 한 남자가 기꺼이 그 독이 든 성배를 받아든다.

홍준표, 그는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치열하게 노력해 검사가 된 그는, 검사가 된 후에도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권력형 비리와 용감하게 맞선 이 시대의 양심이었다. 부당한 압력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수사를 강행한 정의로운 검사 홍준표의 모습은 한국 방송 역사상 최고의 인기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다뤄졌으며, 국민들은 그런 그에게 '모래시계 검사'라는 애칭을 지어줬다. 그런 그가 국민적 비난을 각오하고서 당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후보를 자청한 것이다. 그는 애초부터 박근혜 정부에 가담하지도 않았고, 당시엔 중앙당에서 활동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탄핵 정국에 일말의 책임도 없었다. 이번 선거에 굳이 나서지 않더라도, 다음 기회를 얼마든지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확고했다. '무너진 당을 재건하고, 흩어진 보수 세력을 결집한다.' 이 목표를 위해 그는 자신의 정치 자산을 모두 내놓았다.

 

자살행위였다. 비리로 시작된 선거에서 부정부패로 낙인찍힌 당의 대표로 선거에 나온 것이다. '청렴'과 '정의'를 정치 자산으로 가지고 있던 홍준표에겐 치명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선거에서 승리하면 몰라도, 그 당시 대선은 문재인과 안철수의 2파전이었다. 누구도 홍준표를 유력 대선 후보로 여겨주지 않았다. 탄핵의 책임도 지지 않고 무책임하게 도망친 바른정당의 비겁자들은 뻔뻔하게도 아무 책임 없는 홍준표에게 사퇴할 것을 연일 종용했다. 조롱이었다. 그러나 여론은 그런 조롱에 동조하는 듯 보였다. 홍준표의 지지율은 4%, 막말로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홍준표의 진실된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고, 어느 순간 무시할 수 없는 지지층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대선 전 마지막 여론조사에선 안철수를 극적으로 꺾고 2위에 안착한다. 대선 결과 홍준표는 24%의 표를 득표하여 2위에 랭크한다. 비록 보수 심판이라는 대세론을 꺾을 순 없었지만, 적어도 탄핵이라는 핵폭탄을 맞고 임종 직전에 이른 당을 회복한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홍준표의 다음 목표는 당의 재건이었다. 탄핵으로 만신창이가 된 당의 재건을 위해 홍준표는 전력을 경주하였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보수는 다시 일어섰다. 정부와 집권여당을 견제하는 제1야당 본연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국정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위장 평화쇼가 또다시 그의 발목을 잡는다. 홍준표는 가면극의 실체를 폭로하고자 했으나, 국민들은 연극의 불청객을 무대에서 내쫓는다. '정의로운 검사' 홍준표의 이미지는 '통일'이라는 달콤한 상상을 감히 방해하는 구태 정치인으로 변해 있었다.
 

각오했지만, 너무도 쓰라렸다. 정계 은퇴설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어제까지 당 대표 홍준표에게 잘 보이고자 알랑방귀 끼던 이들이 오늘은 홍준표를 '구태 정치의 산물'로 낙인찍고 그에게 돌을 던지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들의 책임을 무마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총선 당시엔 탄핵과 보수 몰락의 가장 큰 책임이 있는 황교안이 공천권을 빌미로 홍준표의 목에 칼을 겨눴다.

그러나 홍준표는 끝내 살아 돌아왔다. 지난날 수구 정치인으로 몰려 정치판을 떠나야 했던 그는 뒤늦게서야 진정성을 인정받으며 국민들로부터 정치적으로 복권된 것이다. '선진 조국 건설' 그가 조국을 위해 봉사하는 이유이자 목적이고 꿈이었다. 홍준표는 이제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한번 대통령에 도전한다.

 

하지만 페탱이 당했던 것처럼, 비겁자들이 또다시 홍준표를 두들겼다. 지난날 보수 몰락의 선봉장이었던 좌파 검사 윤석열은 아이러니하게도 보수의 유력 대선후보가 되어 있었다. 반공보수를 몰아내고, 국힘의 전신인 한국당을 해체시키겠다고 주장했던 2018년의 하태경은, 몇 년 만에 투철한 반공 투사로 변신해 그가 해체시키겠다고 공언하던 당에 돌아왔다. 돌아온 하태경은, 어이없게도 조국 사태 당시 조국 일가의 범죄에 대해 가장 강경한 목소리를 내던 홍준표를 '조국수홍'이라는 프레임으로 엮어 넘어졌다. 유력 후보 윤석열의 이쁨을 받기 위한 치졸한 공격이었다.

당내 국회의원과 당원들도 윤석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려웠던 시절, 누가 당을 지키려 했고 누가 당을 파괴하려 했는지, 모두가 기억하지 못했다. 혹은 기억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들에게 있어 일신의 안위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기에, 그래서 억지로 '방패의 기억'을 지워버렸을지도 모른다. 과거 보수우파 몰락의 단초를 제공했던 '민심의 반역자들'은 끝내 보수의 도살자를 보수우파의 대선 후보로 선출했다. 홍준표가 들었던 방패의 보호를 받던 사람들마저 그의 밑에서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 80년 전, 이역만리의 영웅이 생의 마지막 불꽃을 살러 지켜낸 조국이 그를 배반한 것처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 지키고자 했던 당은 결국 그를 배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그들을 용서했다. 배신자들마저 포용했다. 정권 교체라는 대의 앞에서, 지난날의 원망과 과오를 덮어 두고 그들과 손을 잡기로 결심한 것이다. 모래시계의 영웅은 또다시 자신을 희생하기로 각오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이 땅의 자유를 회복할 수 있다면, 그는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지금쯤 비겁한 자들은 홍준표가 굴복했다며 축배를 들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하라. 페탱을 몰아낸 자들도 민심을 외면한 대가로 혁명에 의해 처단됐다. 당이 가장 어두웠던 시절, 끝까지 당을 지키고자 했던 이가 누구였는지 기억하라. 만약 당신들이 지난날 영웅의 희생을 잊는다면, 오늘의 희희낙락이 장차에는 피눈물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라.

 

어려웠던 시절, 殺身成仁의 정신으로 결연히 일어나 온몸으로 보수우파를 지켜낸 홍형께 경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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