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의 담론
비슷한 케이스로서 책임을 졌던 장한
韓, 더 이상 미련 갖지 말고 결단해야
동서고금 막론하고 어제까지만 해도 아군을 학살하던 적군 수괴(首魁)급 인사를 거둬들여 총사령관급으로 임명한 사례는 매우 보기 드물다.
20년 가까이 정치부에 몸담고서 고사성어 뒤지며 글밥 먹은 필자가 당장 생각나는 경우도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그리고 한 전 위원장 케이스와 비슷한 진(秦)나라 말기의 인물 장한(章邯‧생몰연도 ?~기원전 205) 정도가 전부다.
장한은 진나라의 고관대작이었다. 그는 당초 재무장관 격인 소부(少府)를 지냈다. 그러다가 가혹한 정치 앞에 농민반란인 진승오광(陳勝吳廣)의 난이 발발하자 2세 황제 호해(胡亥)의 명을 받아 군(軍)을 이끌고 일망타진에 나섰다. 호해는 “사람이 먼저가 아니다” 외치던 폭군 중의 폭군이었다.
장한은 ‘제일검’ 자랑하며 농민군을 무자비하게 때려잡았다. 진승‧오광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물론 난을 틈타 부활한 여러 나라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항우(項羽)를 자식처럼 키운 그의 숙부 항량(項梁)도 장한의 제물 중 하나였다.
그러나 잘나가던 장한은 내부적으로는 호해의 최측근이었던 환관 조고(趙高)와의 파워게임에서 밀리던 상황이었다. 조고는 아예 원군을 청하기 위해 수도 함양(咸陽)으로 달려온 장한의 부장 사마흔(司馬欣)을 은밀히 죽이려 들기도 했다. 이대로 있다간 이겨도 죽고 져도 죽겠다고 여긴 장한은 사마흔‧동예(董翳) 등과 함께 항우에게 투항했다.
자연히 항우 휘하 제장(諸將)들은 부모‧형제‧친지를 무수히 해친 이 진나라의 앞잡이를 단칼에 처단하려 했다. 그런데 항우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통일 이전의 옛 진나라 영토를 셋으로 쪼개고서 장한 등을 무려 ‘왕(王)’에 봉했다. 장한은 삼진왕(三秦王) 중 하나인 옹왕(雍王)의 감투를 얻었다.
항우는 제 딴에는 ‘제일검’ 장한을 통해 인심(人心)을 얻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진나라 백성은 물론 천하 여러 사람들 눈에 장한은 그저 적에게 빌붙어 잘 먹고 잘 사는 소인배‧배신자일 뿐이었다. 게다가 장한이 귀순 때 대동한 20만 진병(秦兵)은 항우에게 산 채로 생매장 당했기에 만인(萬人)에게 장한은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대학살 공범’이었다. 20만 중에는 진나라 토박이뿐만 아니라 천하 곳곳에서 강제 징집된 각지 사람들이 있었다.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의하면 한(漢)나라 대장군 한신(韓信)은 삼진 평정에 앞서 한왕(漢王)에게 다음과 같이 단언했다. “삼진 평정은 식은 죽 먹기다. 장한 등은 비겁하게 살아남아 항우의 졸개가 됐으니 (전쟁‧대학살 등에서) 죽은 병사들의 가족은 장한 등을 원망하며 일체 돕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한신이 삼진 분봉(分封)으로부터 머잖아 장한을 공격하자 장한은 ‘제일검’ 명성이 무색하게 삽시간에 무너졌다. 장한은 장기간에 걸쳐 농성(籠城)했으나 한군(漢軍)이 수공(水攻)을 펼치자 옹나라의 도성 폐구(廢丘)는 삽시간에 물바다가 됐다.
떠나간 민심은 장한을 돕지 않았다. 한신은 ‘제일검’에 도취됐던 장한이 난생 처음 겪는 명장 중의 명장이었다. 항우에게로 도주해도 패전의 책임을 지고 처형될 게 뻔하고, 한왕에게 투항해도 옛 죄로 인해 목이 달아날 게 뻔한 장한은 결국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지난 정부 시절 많은 인사들이 살기(殺氣) 가득한 ‘보수괴멸(壞滅)’ 구호 앞에 검찰로 끌려갔다. VIP에게 직접 고소당했다가 2심 재판 끝에 영어(囹圄)의 몸까지는 피했으나, 약 7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리지만, 필자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검찰에서 승승장구하던 한 전 위원장은 돌연 국민의힘 측으로 오더니 급기야 당대표인 비대위원장 자리를 꿰찼다. 필자를 포함해 지난 정부에서 핍박 받은 이들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그럼에도 필자는 20년 가까이 한나라당~국민의힘을 향한 필자의 개인적 정치성향과 양당균형 등의 대승적 차원에서 부족한 필봉(筆鋒)을 개담으로 휘둘러 한 전 위원장을 독려하고 때로는 건설적 비판을 가했다. 그런데 일반 민심(民心)마저도 한 전 위원장을 저버렸다. 22대 총선의 국민의힘 성적은 ‘108석’이 전부다. 개헌저지선을 지켜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하는 지경의 성적표가 나왔다.
국민 앞에 엎드리지도 않고 ‘셀카’ 장면만 남겼던 한 전 위원장. 그는 이제 항장(降將)을 넘어 패장(敗將)까지 돼 ‘남의 집’을 속된 말로 말아먹었다는 꼬리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한 전 위원장은 정계은퇴에는 선을 긋는 듯한 발언을 했다고 한다.
장한은 한 전 위원장과 같은 최고사령탑이 아닌 변방의 일개 번왕(藩王)이었음에도 책임을 통감하고서, 또 제 처지를 정확히 꿰뚫어보고서 책임을 졌다. 물론 장한처럼 극단적 선택을 하라는 말은 결단코 아니지만, 오해 없길 바라며, 한 전 위원장도 더 이상 권력에 미련 갖지 말고 거취를 결심해야 한다. 냉정히 말해 한 전 위원장이 국민의힘에서 더 이상 수행할 역할은 거의 없다. 때로는 죽은 듯해야 사는 법이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