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을 담은 담론
위기는 ‘사당화’서 비롯… 野 전철 답습하나
소련공산당(CPSU)은 1898년 3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이라는 당명(黨名)으로 창당돼 1991년 8월까지 존속한 정당이다. 1917년 ‘10월 혁명’에서 30여만명의 당원으로 무산계급(無産階級‧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성공해 소련의 유일집권당으로 기능했다.
혹 오해하시는 분들 계실까봐 미리 말씀드리자면 본 개담은 소련공산당 또는 소련공산당 특정 파벌‧인물을 미화하려는 따위의 의도는 절대 아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타국 역사를 다뤘을 뿐이다. 필자의 개인적 이념‧정치 성향이 얼마나 ‘옳은쪽’인지 아는 분들은 다 아신다. 그래도 혹 불편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자체 검열하시길 정중히 부탁드린다.
소련공산당에는 두 개의 파벌이 있었다. 급진파인 볼셰비키(Bolshevik)와 온건파인 멘셰비키(Menshevik)가 그것이었다.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의 볼셰비키는 소련공산당‧무산계급 독재 및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유산계급(有産階級‧부르주아) 타도 등을 주장했다. 멘셰비키의 성향은 대체로 그 반대였다.
승자는 정통 마르크스주의(Marxism)의 멘셰비키가 아닌 레닌주의(Leninism)의 볼셰비키였다. 레닌 사후(死後) 권좌에 오른 ‘강철의 대원쑤’ 이오시프 스탈린(Iosif Stalin‧생몰연도 1879~1953)은 멘셰비키 등 반대파에 대한 피의 숙청에 착수했다. 바로 1937~1938년 전개돼 공식적으로 약 ‘70만명’ 비공식적으로 ‘200만명’이 희생된 대숙청(Great Purge)이었다.
희생자 중에는 레프 트로츠키(Lev Trotsky)처럼 단지 스탈린을 반대했다는 이유만으로 ‘인민의 적’으로 몰린 ‘볼셰비키 출신자’들도 있었다. 멕시코에 망명 중이던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자객에 의해 등산용 피켈로 뒤통수가 찍혀 살해됐다. 또 그의 이름은 소련 사회에서 최악의 욕설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후대의 소련에서 “트로츠키 같은 놈”이란 욕은 당장 주먹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최고의 모욕이었다. 스탈린은 사자(死者)의 명예마저도 철저히 짓뭉갠 것이었다.
스탈린은 1당 독재를 넘어 ‘1인 독재’를 꿈꾸며 이렇듯 천인공노(天人共怒)할 학살을 저질렀다. 트로츠키주의(Trotskyism)를 정립한 트로츠키는 소련 건국의 실질적 설계자로서 한 때 유력한 레닌의 후계자였다. 1997년 우리나라에 망명한 고(故) 황장엽(黃長燁) 전 조선노동당 비서는 “노동계급이 너무 많아 의견일치가 안 된다. 한 명의 탁월한 노동계급이 독재를 해야 한다”는 식의 궤변을 스탈린이 펼쳤다고 회고했다.
대숙청의 총대를 멘 것은 소련 내무인민위원부(NKVD) 장관 니콜라이 예조프(Nikolai Yezhnov) 등 스탈린의 충견들이었다. 레닌과 함께 했던 혁명원로들은 체포돼 고문받기 직전 자결하거나 붙잡혀 처형됐다. 평당원‧비(非)당원‧소수민족들의 희생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심지어 예조프마저도 나중에는 토사구팽(兎死狗烹)되고 만다.
스탈린은 군부(軍部) 숙청에도 총력을 다했다. 제정러시아(Czarist Russia) 귀족 출신으로서 그나마 쓸 만했던 고급장교나 소련 건국과 함께 군문(軍門)에 들어온 무산계급 출신 장교 상당수가 형장의 이슬이 됐다. 살아남은 유능한 장교는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Zhukov) 등 극소수에 그쳤다. 반면 세묜 부됸니(Semyon Budyonnyi) 등 무능한 주제에 아첨에만 능한 장교들은 출세가도를 달렸다.
대숙청으로 인해 스탈린의 독재권력은 공고해진 반면 수많은 인재를 잃은 소련의 국력은 급속도로 추락했다. 결국 1941년 나치독일과의 독소전쟁(The Soviet-German War)이 발발하면서 사달은 벌어졌다.
나치 국방군‧친위대(SS)는 신형전차 티거(Tiger) 등 무지막지한 괴물들 앞세워 소련 영토로 밀고 들어왔다. 이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에 투입된 수백만 나치 대군을 지휘하는 건 에리히 폰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 등 쟁쟁한 명장(名將)들이었다. 반면 소련군 지휘부는 된장인지 뭔지 구분도 못하는 하룻강아지들이 대다수였다. 자연히 전쟁 초기의 소련군은 싸우는 족족 연전연패(連戰連敗)했다.
소련군의 한심한 수준은 앞서 선보인 바 있었다. 1939년 핀란드를 침공한 소련은 압도적인 전력(戰力) 우세에도 불구하고 졸전에 졸전을 거듭했다. 일설(一說)에 의하면 스탈린의 오랜 친구로서 그에게 유일하게 ‘반말’할 수 있었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Kliment Voroshilov)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나머지 스탈린 앞에서 접시를 와장창 내던졌다. 그리고는 “이게 다 네놈(스탈린) 때문이다. 네가 붉은군대(Red Army)의 유능한 장교들을 모조리 죽여 이 지경이 됐다!” 날뛰었다.
만약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아집 △주코프의 선방(善防) △소련의 혹독한 겨울과 나치의 동계(冬季)전투복 준비 미비 등 기적이 없었다면 소련은 독소전쟁 때 이미 패망해 냉전(Cold War)도 없었을 것이란 게 중론이다.
히틀러는 곧바로 모스크바로 향해도 모자랄 판에 “스탈린의 이름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겠다”며 쓸데없이 스탈린그라드(Stalingrad) 공격을 고집했다. 전쟁은 목표가 뚜렷해야 승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히틀러의 오기는 치명적 패착이었다.
스탈린그라드 방어에 나선 주코프는 이른바 ‘껴안기 작전’을 통해 나치에게 결정적 역전승을 거뒀다. 해당 작전은 나치의 우수한 원거리 화력(火力)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독일군을 시내로 끌어들여 백병전(白兵戰) 벌인다는 게 골자다. 소련‧독일 병사들은 서로의 가슴팍에 대검을 찔러 넣기 위해 물고 뜯고 엉키고 구르는 처절한 싸움을 벌였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독일군은 영하 수십 도의 혹독한 시베리아 한파(寒波)에 하나둘 쓰러져갔다. 보급선이 멀어진 터라 이들은 식량‧탄약‧동복 등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다. 한마디로 황천길 문턱에서 스탈린을 구한 건 ‘요행’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 욕심을 위해 많은 이들을 희생시키고 당을 위태롭게 만든 스탈린은 끝내 제 명을 다하지 못했다.
1980년 12월5일자 중앙일보 보도에 의하면 소련의 한 망명 역사가가 프랑스 파리에서 출간한 ‘스탈린 암살되다 - 베리야의 음모’는 스탈린 사망이 자연사(自然死)가 아닌 ‘암살’이라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NKVD 수장 라브렌티 베리야(Laurentii Beriya)에게 포섭된 자신의 별장 간호사에 의해 1953년 2월29일 독극물이 주사돼 비명횡사했다고 한다.
더불어민주당의 공천 잡음이 상상 이상이다. 비명계가 상당수인 것으로 알려진 평가하위 20% 통보, 비명계‧중진 현역의원을 배제한 여론조사 의혹 등 앞에 김영주 국회부의장 등은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 사당화(私黨化)를 주장하면서 탈당하거나 강력 반발 중이다. 이 대표 측은 공천학살은 사실무근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어느 쪽 입장이 맞는지는 며느리도 모른다. 이 대표 측 주장이 맞을 수도 있다. 허나 만약 김 부의장 등의 주장이 사실이라 가정할 경우 민주당이 스탈린의 소련공산당 같은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전망이 있다. 흥미로운 일이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