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분간 못하다 안록산에게 목숨 잃은 양귀비
강서구청장 후보 두고 설왕설래…기우 그치길
아첨의 달인
안록산(安祿山‧안녹산‧생몰연도 서기 703?~757)은 당(唐)나라 때 안사의 난(安史之亂) 일으킨 간신‧권신이다. 침어낙안(沈魚落雁)‧경국지색(傾國之色)으로 유명한 양귀비(楊貴妃‧양옥환‧719~756)는 현종(玄宗)의 ‘며느리이자 후궁’으로서 나라를 기울게 만든 인물이다.
안록산은 ‘아부’의 화신(化身)이었다. 그는 이란계 백인혈통 지닌 색목인(色目人)이었음에도 타고난 아첨능력으로 무소불위(無所不爲) 권세를 누렸다. 안사의 난 때 안록산은 평로(平盧)‧범양(范陽)‧하동(河東) 3개 절도사(節度使)를 겸하는 지위에까지 이르렀다. 그가 다스린 병력은 제국 전체의 거의 3분의 1에 달했다.
안록산이 날 때부터 당나라인이었던 건 아니다. 상술했듯 이란계 소그드인(Sogdia)과 돌궐족(突厥族) 무녀(巫女) 아들인 안록산은 본명이 로우샨(Rowshan)이었다고 한다. 그는 돌궐 제2제국 2대 지도자인 카파간 카간(Qapayan qayan‧묵철가한)이 716년 사망하자 일족 손에 이끌려 당나라로 망명했다.
만리장성(萬里長城) 넘자마자 안록산은 재빠르게 간지(奸智) 발휘했다. 6개 국어에 능했던 그는 장사로 부를 축적하는 한편 유주절도사(幽州節度使) 장수규(張守珪‧684~740)의 신임을 사 측근이 됐다.
두 사람의 만남 계기부터가 기가 막힌다. 732년 안록산은 양떼를 훔치다가 장수규에게 딱 걸려 죽게 생겼다. 그러자 안록산은 “해족(奚族)과 거란(契丹)을 멸하고 싶지 않으시거든 제 목을 치시와요” 애처롭게 부르짖었다. 이후 안록산은 장수규의 발을 씻길 정도로 ‘혼이 담긴 아부’에 나섰다. 장수규는 안록산을 양자(養子)로 삼았다.
안록산은 의부(義父)를 매개체로 중앙조정에도 줄 댔다. 실무는 썩 유능하지 못했던 안록산은 해족‧거란과의 전투에서 패해 유주를 잃어버릴 뻔한 죄로 죽음을 목전(目前)에 두게 됐다. 허나 장수규는 괄주자사(括州刺史) 좌천이라는 중징계 받은 반면, 안록산은 무려 ‘현종’의 ‘특별사면’으로 법망을 빠져나갔다.
철저히 묻힌 과거
안록산이 변방 일개 절도사를 헌신짝 버리듯 내버리고 새 주군(主君)으로 삼은 이가 양귀비였다. 현종을 알현(謁見)해 742년 평로절도사에 제수(除授)된 안록산은 양귀비에게 접근했다. 그리고는 16살이나 어린 그녀를 ‘수양어머니’로 모시고서 갖은 재롱‧아양 다 떨었다.
안록산은 매일 아침 입조(入朝) 전에 반드시 양귀비를 찾아가 문안인사 올렸다. 얼마나 문턱 닳도록 드나들었는지, 진위여부는 불분명하지만, 궁궐에선 “두 사람이 간통(姦通) 관계다”는 추문이 암암리에 퍼졌다고 한다. 안록산의 험상궂은 인상 두고 “절세미인이 저런 추남(醜男) 좋아할 리 있나”라는 반론도 있지만, 의외로 언론에 공개되는 다수 비선(秘線)들 중에는 선남선녀(善男善女)와는 거리 먼 외모가 적지 않다.
안록산은 호선무(胡旋舞)라는 춤을 신나고도 날렵하게 추기도 했다. 체중 약 150~200㎏의 비대한 안록산은 마치 오늘날 일본 스모(相撲) 선수들처럼 측근 이저아(李猪兒) 도움 없이는 옷조차 입지 못했다. 무릎 꿇고 앉은 이저아는 제 주인의 불룩한 배를 머리로 받친 뒤 허리띠를 맸다고 한다.
허나 안록산은 양귀비‧현종 앞에서는 돌변했다. 호선무는 머리에 접시를 올려두고 끊임없이 빙빙 돌거나 둥그런 큰 공 위에 올라가 발로 굴리는 방식이다. 안록산은 “네 배에는 대체 뭐가 들었는고?”라는 현종 물음에 “단지 충심(忠心)만이 있을 뿐이옵니다” 재치 있게 답해 양귀비‧현종 박장대소(拍掌大笑)도 이끌어냈다. 양귀비는 안록산을 홀딱 벗겨 목욕시킨 뒤 유아복 입혀 가마에 태우고 돌아다니게끔 하기도 했다고 한다.
현종은 양귀비의 말이라면 뭐를 된장이라 해도 믿었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772~846)가 장한가(長恨歌)에서 “정사(政事)는 돌보지 않고 밤낮으로 환락에만 빠졌다”는 식으로 표현했을 정도였다. 결국 안록산은 유주를 말아먹을 뻔했던 과거는 깡그리 잊힌 채 양귀비 베갯머리송사 접수한 현종에게 재차 중용(重用)됐다. 안록산의 작위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하게도 3개 절도사 겸직이었다.
호랑이새끼에게 목숨 잃은 양귀비
그 지위까지 오르자 안록산은 본색 드러냈다. 그는 또 다른 간신이자 양귀비의 집안오빠 양국충(楊國忠)이 제 대신 황제 사랑을 독차지하자 “역적을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거병(擧兵)했다. 언제 아낌을 받았냐는 듯 수틀리자 제 주인을 향해 이빨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 안사의 난(기간 755~763)에서 당나라는 결딴 직전까지 갔다.
양귀비는 자신이 길렀던 호랑이새끼 때문에 756년 비참하게 눈 감았다. 피난 가는 황족(皇族)들 호위하던 병사들은 안록산을 탓하는 대신 양귀비에게 “너 때문에 이 지경이 된 거다” 폭동 직전까지 갔다.
이전에 재상 장구령(張九齡) 등 수많은 이들이 “안록산을 경계하라” 바른말 했던 사실을 병사들은 잘 알고 있었다. 충언(忠言)한 자들 중에는 심지어 안록산의 사촌 안사순(安思順‧695?~756)도 있었다. 현종 명을 받은 고력사(高力士)는 요부(妖婦)를 목매달아 죽였다. 그 때 양귀비의 나이 불과 37세였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인선(人選)이 찬반여론 일으키고 있다. A씨는 자신에 의해 막대한 혈세(血稅) 투입되는 보궐선거 실시에도 초고속 특별사면‧복권 후 재차 후보로 선출됐다. 헌정사(憲政史)에 보기 드문 이 사례 두고, 당사자들은 부인 중이지만, 이른바 ‘용산 사모님(누구라고 특정하진 않는다)’ 입김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여야 막론 제기된다.
설상가상 A씨는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라이벌 후보에게 7.6%p 차이로 뒤진다는 결과까지 나왔다(상세사항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강서구는 라이벌 후보 측 텃밭으로 분류된다. 게다가 A씨는 강서구에 이렇다 할 연고(緣故)도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설사 A씨가 당선된다 해도 과연 끝까지 ‘사모님’ 및 그 배우자에게 충성할 것이냐는 물음표도 나온다. 해당 후보가 지금의 소속정당‧사모님 등과 연 맺게 된 건 사모님처럼 어쩔 수 없는 선택 아니었냐는 것이다. A씨는 전임(前任) 정부 시절 민간업자들로부터 수백만원 상당의 향응(饗應)‧접대 받았다는 주장에 휩싸인 바 있다.
물론 A씨를 둘러싼 모든 의혹들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A씨가 기적적으로 당선되고 사모님 등과의 의리를 지킬 수도 있다. 반면 기우(杞憂)가 사라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부디 꼴 사나운 후자(後者)가 아닌 전자(前者), 양귀비‧안록산이 아닌 배가 가라앉더라도 운명을 함께 맞는 교우이신(交友以信)이길 바란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