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총련 친북행사 자발 참여’ 상식 타파한 野 의원
동서고금 누구도 못한 ‘공개역적질’에 벌어지는 턱
간첩‧방첩 강조한 손‧오자
손오병법(孫吳兵書)은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병서(兵書)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은 춘추시대(春秋時代) 손무(孫武‧생몰연도 기원전 545?~기원전 470?)가, 오자병법(吳子兵法)은 전국시대(戰國時代) 오기(吳起‧기원전 440~기원전 381)가 저자다.
손무는 제(齊)나라 출신이지만 오자서(伍子胥)의 추천으로 오(吳)나라에 중용됐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손오열전(列傳)에는 손무와 오왕 합려(闔閭)의 첫 만남이 묘사돼 있다.
손무는 합려 앞에서 손자병법 요체(要諦)를 상세히 설명했다. 구미가 당긴 합려는 손무의 실무능력을 테스트하고자 했다. 이에 손무는 부녀자들을 일순간에 정예병으로 만들겠다고 호언장담(豪言壯談)했다. 한 층 흥미로워진 합려는 궁녀(宮女)들을 내어줬다.
손무는 궁녀들을 두 개 분대(分隊)로 나눈 뒤 합려가 특히 총애하는 두 여인을 양 분대장으로 삼았다. 그리고는 군율(軍律)을 교육한 후 북을 쳐서 오른쪽으로 진군(進軍)토록 했다. 뜬금없이 병정놀이 동원된 궁녀들은 합려의 장난쯤으로 여기고 깔깔 웃었다.
“병사들 군기(軍紀)가 나태한 건 총대장인 내 책임이다” 스스로를 질책한 손무는, 다시금 군율을 확실히 교육한 뒤 이번엔 왼쪽으로 열 맞춰 진군토록 했다. 이번에도 궁녀들은 “별 꼴이야” 비웃기만 했다.
폭발한 손무는 “누차 교육했음에도 명령이 이행되지 않는 건 일선(一線) 지휘관들 직무유기(職務遺棄) 때문이다”며 두 분대장 목을 베어버렸다. 아연실색한 합려가 말렸으나 “전선(戰線)의 장수는 왕명(王命)을 받들지 못하는 수가 있다”며 기어이 처형했다.
황망해진 합려는 “임금을 무시하는 놈” 분노했지만 궁녀들은 순식간에 자로 잰 듯 오와 열을 맞췄다. 합려는 쓴 입맛 다시면서도 손무를 기용했다. 손무의 활약으로 오나라는 훗날 춘추오패(春秋五覇) 반열에 올랐다.
손오열전‧한비자(韓非子)‧순자(荀子) 등에 의하면 오기는 노(魯)나라를 거쳐 위(魏)나라에서 본격적으로 활약했다. 서쪽 진(秦)나라 침략방어 요충지인 서하(西河)에 부임한 그는 무졸(武卒)이라는 정예중보병을 양성했다. 이들은 갑주 입은 채 창칼‧방패‧쇠뇌‧전투식량 등 수십㎏을 지고서 하루 100리(약 39㎞) 행군할 수 있었다.
오기는 위나라에서 큰 전투만 76차례 치러 64번 승리하고 나머지 12번은 무승부를 기록했다. 이순신(李純信) 장군의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 원전(原典)도 오자병법이다.
이러한 두 희대의 명장(名將)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게 있다. 바로 간자(間者‧간첩) 활용과 대응이다.
13개 편이 현존(現存)하는 손자병법은 특히 용간(用間)이라는 한 개 편 전체를 할애해 간자의 중요성을 역설(力說)했다. 손무는 “군대를 동원해 천리(千里)를 출정하면 하루에 국고(國庫) 천금(千金)이 소비되고 승패는 하루아침에 결정된다. 따라서 (간자에 대한) 작위‧봉록 (수여) 등을 아까워해 적 정보 수집에 소홀하면 (전쟁에 패하거나 살림이 피폐해져) 나라는 위태로워진다”고 했다.
오기는 오자병법 요적(料敵)편에서 위무후(魏武侯)와의 일문일답(一問一答)을 통해 방첩(防諜) 중요성을 주장했다. 오기는 제‧진‧초(楚)‧연(燕)‧삼진(三晉) 7개 나라 내부실상을 상세히 설명한 뒤 “(이들처럼 내정을 간파당하지 않으려면) 국가안보에 있어서 무엇보다 항시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은밀하게 조용하게”
고대의 간자운용 성공사례는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때의 승려 도림(道琳‧?~?), 실패사례는 전국시대의 협객(俠客) 형가(荊軻‧?~기원전 227)가 있다.
어느날 백제의 수도 위례성(慰禮城‧또는 한성‧오늘날의 서울)에 도림이 홀연히 나타났다. 백제 개로왕(蓋鹵王)이 박혁(博奕‧바둑과 장기)을 좋아한다는 소식 접한 도림은, 그 길로 도성(都城)으로 가 개로왕을 접견하고서 뛰어난 학식(學識)‧인품 및 박혁실력으로 그 마음을 사로잡았다.
일국(一國)의 왕을 저리 쉽게 만났다는 점에서 도림은 이미 당대의 이름 난 고승(高僧)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서기 5세기경 삼한(三韓)은 불교문화를 급속도로 발전시키던 중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고구려는 서기 372년 6월 전진(前秦) 황제 부견(苻堅)이 보낸 승려 순도(順道)를 통해 불교를 국교(國敎)로 공인(公認)했다. 백제는 384년, 신라는 527년 이차돈(異次頓)의 순교(殉敎)를 거쳐 불교를 국교화(化)했다.
이렇듯 개로왕 최측근이 된 도림은 사실 고구려가 보낸 간자였다. 도림은 어느 순간부터 개로왕에게 대규모 토목공사(土木工事)를 건의해 백제 국력(國力)을 급속도로 소진시켰다. 재정이 바닥난 백제는 백성들이 굶고 개병제(皆兵制‧징병제)조차 제대로 운용되지 못할 지경 됐다.
고구려는 이 틈을 노려 475년 한성을 쳐서 함락했다. 수도를 잃은 백제는 웅진(熊津‧지금의 충남 공주)으로 천도(遷都)하는 신세가 됐다. 속은 것을 안 개로왕은 달아났으나 변심(變心)한 이들에게 잡혀 목숨 잃었다. ‘한국사(史) 첫 간첩’ 도림은 이 난리통에 한성을 유유히 빠져나가 장수왕에게 “작전 완료” 거수경례하며 보고했다고 한다.
형가는 ‘진시황(秦始皇) 암살공작 시도’ 및 비장함 넘치는 역수가(易水歌)로 유명하다. 역수가 가사는 “바람은 쓸쓸하고 강물은 차구나. 장사(壯士)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다.
기원전 3세기 시황제(始皇帝) 영정(嬴政)은 천하통일을 목전(目前)에 두고 있었다. 삼진을 멸하고서 조(趙)나라 잔당(殘黨)마저 평정한 그는 초나라와의 대결전 앞두고서 연나라부터 손보려던 참이었다. 급해진 연나라 태자 단(丹)은 전광(田光)이란 자를 찾아가 영정 암살을 모의했다. 전광은 적임자로 형가를 추천했다.
사마천의 사기 자객열전(刺客列傳)에 따르면 형가는 본시 ‘백수건달’이었다. 시전(市廛) 거리에서 신원미상의 개백정, 현악기 일종인 축(筑) 연주가 고점리(高漸離)와 함께 허구한날 어울리며 술 마시고 소일하는 게 삶의 전부였다.
허나 품은 뜻은 깊었던 듯하다. 마치 훗날의 한(漢) 대장군 한신(韓信)처럼 비루한 무리들은 가까이하지 않았다. 한 칼잡이와 언쟁(言爭)이 붙어 그 칼잡이가 노려보자 말없이 자리를 떴으며, 한 건달과 장기를 두다가 시비가 붙어 상대가 노려보자 군말 없이 등 돌렸다. 그러나 전광은 형가를 “평범한 이가 아니다” 평가하며 언젠가 큰일을 하리라 여겼다.
시황제가 어디 이웃동네 이장님도 아니고 가까이 접근하는 건 불가능했다. 알현(謁見)을 위해선 상응하는 선물이 있어야 했다. 이에 형가는 연나라에 망명 중이던 항장(降將) 번오기(樊於期)를 찾아가 “내 지금 영정 목 따러 가는데 그러자면 당신 목이 필요하다” 요구했다. 진에 남은 일가(一家)가 멸족(滅族) 당했던 번오기는 기꺼이 “당장 가져가라”며 제 목을 늘어뜨렸다.
형가는 자신을 보조할 인물로 13세 나이 때 이미 손에 피 묻혔던 천근역사(千斤力士) 진무양(秦舞陽)과 무명(無名)의 장사를 지명했다. 진나라행(行) 당일, 진무양은 현장에 등장했으나 무명소졸은 겁먹었는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태자 단의 재촉에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형가는 친구 고점리의 축 연주에 맞춰 역수가를 불렀다. 듣는 이들은 처음엔 눈물 흘리며 통곡했으나 노래가 거듭될수록 머리털은 곤두서고 눈엔 핏발이 서렸다고 한다.
이윽고 형가‧진무양은 진나라 수도 함양(咸陽)에 입성했다. 번오기의 목 등을 선물 받은 영정은 기쁜 마음으로 형가 일행을 맞았다. 그런데 풍채(風采)만 그럴싸했던 진무양이 일을 그르쳤다. 동네에선 힘자랑하며 한가락 했던 그는, 막상 백관(百官)들 늘어선 왕궁에서 임금과 대면하자 비 오듯 식은땀 흘리며 부들부들 떨었다. 평생 암살위협 시달린 영정은 직감적으로 의심하며 형가만 제 앞에 다가올 것을 명했다.
당초 계획은 진무양이 억센 힘으로 영정을 붙들면 형가가 숨겨온 흉기로 거사(巨事)를 마무리한다는 것이었다. 일이 틀어진 형가는 홀로 비수(匕首)를 꺼내 휘둘렀으나 될 턱이 없었다. 놀라 허둥지둥 대며 칼집에서 검을 못 꺼낸 영정은 비수를 피해 달아나기만 했으나, 주변 외침에 정신 차리고 장검(長劍) 뽑아 형가를 베었다. 쓰러진 형가는 달려든 근위군(近衛軍) 창칼에 싸늘한 시신이 됐다.
“공개적으로 자랑스럽게”
도림‧형가 등 역사상 간자들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은밀함’이다. “나 간첩이요” “나 적국과 내통한다” 광고해서 간자질이 성공할 리 만무하다. 기다리는 건 멍석말이다. 이건 상식(common sense) 중의 상식이다. 손자병법도 용간편에서 “다섯 가지 유형의 간자를 함께 활용하면, 적은 이를 눈치 채지 못하니 곧 신기(神紀)로서 군주의 보배가 된다” 강조했다.
그런데 2023년 대한민국만큼은 희대의 진풍경(珍風景) 벌어지고 있다. 대놓고 북한 관변(官邊)조직 즉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행사에 참석해 ‘독재자 3대 찬양’ ‘대한민국 능멸(凌蔑)’ 연설 경청하는 광경 빚어지고 있다.
제 보좌관이 북한공작원과 해외접선(接線)했다는 의혹도 사는 더불어민주당 출신 무소속 의원 A씨가 주인공이다. 심지어 A씨는 조총련 측 초청이 없었는데도 ‘자발적으로’ 이 친북(親北)행사에 참석했다고 한다. A씨 배우자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은 이력이 있다. 일본인 등 납북(拉北), 육영수(陸英修‧1925~1974) 여사 암살세력인 조총련은 1970년 우리 대법원에서 ‘반(反)국가단체’로 확정 판결된 바 있다.
동서고금(東西古今) 막론 그 어떤 병법가‧정보기관도 발상(發想)치 못한 ‘역적질 자랑 환장파티’ 역(逆)발상 실태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도무지 갈피가 안 잡힌다. 무슨 자칭 혁신가라는 모 인사의 “못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안하니까 못하는 거다”도 아니고.
무(無)소유 주장하며 자랑스럽게 초호화자택 공개해 풀(full)소유 논란 자초한 모 광인(光人)처럼, 저렇게 대놓고 커밍아웃 해도 아무런 처벌이 없다는 게 더 웃프다. 아마 이게 지구촌 어느 딴 나라 얘기였다면 배꼽탈출을 면치 못했겠지만, 절망스럽게도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구시대적 불체포특권, 제1야당의 ‘우리식구끼리’ 따위나 횡행하는 세상이 애석하고도 또 애석하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저런 걸 의원으로 만들어 주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더 문제입니다.
윗물이 저러니 말단 초선비례도 저러하겠지요. 내막이 어찌어찌한지는 들은 얘기 많습니다만. 야당이 아니라 정말..지부 2중대라는 욕 먹어도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가는 길이야 다르겠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중심에 둔 야당 일부 극소수 양심적 분들이 보다 분발하시길 빌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