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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필자가 목격한 ‘정치판 황제단식’

오주한

‘단식장 보름빵 섭취’ 등 표리부동 정계 만연

이재명, 백이숙제 따를까 진싼팡 따를까 시선

 

고사리마저 거부한 백이숙제

 

‘단식투쟁(斷食鬪爭)’ 동서양을 막론하고 등장하는 정치판 레퍼토리다. “나는 너 때문에 굶어죽는다. 내 지지자‧동지들은 너를 살인자로 용서치 않으리라”는 메시지 전달이 금식(禁食) 목적이다. 고금(古今) 역사상 정말로 살인성인(殺身成仁)한 이들도 있었다. 허나 필자가 언론사 정치부 시절 여의도 등 다녀본 경험상 ‘배부른 금식’에 나서는 이들도 적지 않다.

 

동양의 살신성인 단식투쟁 사례는 백이숙제(伯夷叔齊)가 있다. 백이‧숙제는 고대국가인 상(商‧은)나라 말기 사람이다. 둘은 상나라 제후국인 고죽국(孤竹國) 귀족이었다.

 

고공단보(古公亶父)의 후손 무왕(武王) 희발(姬發)은 상나라 말기 폭정에 대항해 역성혁명(易姓革命) 일으켰다. 상나라 마지막 국왕 주왕(紂王) 제신(帝辛)은 백성 고혈 빨아 만든 주지육림(酒池肉林)은 기본이요, 끔찍한 살육도 저질렀다. 그는 충신 비간(比干)의 가슴팍을 갈라 심장을 도려내는가 하면, 제후 구후(九侯)의 딸을 범한 뒤 구후를 인간젓갈로 담그고 악후(鄂侯)는 인간육포로 만들었으며, 희발의 형님으로 국을 끓인 뒤 그 아비에게 자식을 먹도록 강요했다.

 

이후 고기만 보면 토할 정도로 한(恨) 맺히게 된 희발의 부친 서백창(西伯昌)은, 당대의 준걸(俊傑) 강태공(姜太公)을 초빙하는 등 상나라에 이를 갈았다. “반드시 네 형님 복수를 하라” 유훈(遺訓) 지킨 희발이 봉기하자, 상나라 노예군 상당수도 칼자루를 거꾸로 쥐었다고 한다.

 

기원전 1046년 주(周)나라를 세운 희발은 허나 상족(商族)을 완전히 멸하진 않았다. 그는 상나라 왕족 미자계(微子啓)를 제후국 송(宋)나라 제후로 봉하고 망국(亡國)백성들 모으도록 했다. 그것도 미자계를 오등작(五等爵) 중 으뜸인 공작(公爵)에 임명했다. 주나라 건국영웅인 제(齊)나라 강태공 작위가 차순위 후작(侯爵)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우대였다.

 

인신공양(人身供養) 등 주나라와 풍습이 상이(相異)했던 송나라는 비록 주나라인들 사이에서 조롱대상 됐으나, 수백년 뒤 전국시대(戰國時代)까지 무탈하게 존속됐다. 상나라는 전통적 중원(中原)국가인 반면, 고공단보 일족은 멀리 서쪽에서 온 터였다. 송나라인 비하 사자성어로는 수주대토(守株待兔)‧알묘조장(揠苗助長) 등이 있다.

 

요행(僥倖)만 바란다는 뜻의 수주대토는 “어느 날 밭에 나간 송나라 농부가 나무에 머리 박고 죽은 토끼 발견하자 그 뒤로 밭 썩는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나무만 바라봤다”는 내용이다. 서두르다 도리어 일을 그르친다는 의미의 알묘조장은 “이웃집 벼가 길게 자란 것을 본 송나라 농부가 제 논에 달려가 벼순을 뽑아 올려 길이를 맞췄다. 당연히 농사는 망했다”는 내용이다.

 

아무튼 상나라 자체는 존립(存立)됐으나, 백이숙제 형제는 “불의(不義)한 주나라에 고개 숙이지 않겠다”며 수양산(首陽山)으로 달아났다. 나아가 “주나라 곡식조차 먹지 않겠다”며 단식투쟁 나섰다. 수양산 위치는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남서쪽 등으로 추정된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백이열전(伯夷列傳)에 의하면 당초 형제는 첩첩산중에서 고사리만 캐 먹었다. 평생 쌀밥만 먹고 산 이들에게 고사리는 거친 음식이었다. 그러나 누군가 “여기도 주나라 국토니 이것도 주나라 고사리 아닙니까” 비웃자 곡기(穀氣)를 완전히 끊어버렸다. 그게 옳든 그르든 어쨌든 고국(故國)에 끝까지 충성하며 목숨으로 절개 지켰던 두 형제의 비극적 이야기는, 불식주속(不食周粟) 고사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옥중단식으로 식민지배 저항한 아이리쉬

 

서양의 살신성인 단식투쟁 사례로는 1981년 아일랜드 단식투쟁(Irish hunger strike)이 있다. 필자가 앞선 칼럼에서도 썼듯, 잉글랜드‧아일랜드는 동군연합(同君聯合)이면서도 앙숙이었다. 1845년부터 시작된 아일랜드 대기근(Great Famine)은 갈등에 불을 지폈다.

 

당시 잉글랜드는 아일랜드로부터 밀‧가축 등 각종 식(食)자원을 수탈하고 있었다. 이에 아일랜드인들은 감자만 먹고 연명했으나, 그마저도 큰 장마에 따른 감자역병이 돌자 수확량이 바닥을 쳤다. 결국 인구 800만명 중 ‘200만명’이 굶어죽는 참상이 빚어졌다.

 

1916년 부활절봉기(Easter Rising), 1918년 아일랜드 독립전쟁(Irish War of Independence) 등 피의 항쟁 끝에 아일랜드는 1921년 자주(自主)적 정부 세웠다. 1949년에는 영연방(Commonwealth)에서도 탈퇴했다.

 

허나 잉글랜드는 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남부 아일랜드는 총성 멈춘 지 오래였지만 북아일랜드는 1923년까지 아비규환(阿鼻叫喚)이 됐다. 북아일랜드 독립전쟁은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이 궤멸되면서 북아일랜드 측 패전(敗戰)으로 끝났다.

 

이후로도 비명은 멈추지 않았다. 1972년 1월31일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 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그 해 북아일랜드 데리(Derry) 지역민들은 IRA 잔존세력 무장투쟁을 반대하고, 평화적 북아일랜드 독립을 촉구하는 시위 벌였다.

 

그 와중에 IRA 측 도발 및 이에 따른 과민반응 등 원인으로 잉글랜드군‧IRA가 발포(發砲)함에 따라 학살이 전개됐다. 순식간에 14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시내는 아수라장이 됐다. 일간지 아이리쉬프레스(Irish Press) 촬영기자 콜맨 도일(Colman Doyle)이 찍은 것으로 알려진, 가죽재킷에 화려한 물방울무늬 미니스커트 입고서 미국산 AR-18 돌격소총 겨누고 있는 IRA 여성대원 사진은 유명하다.

 

사건 이후 잉글랜드정부는 IRA 및 그 동조자들을 쥐 때려잡듯 때려잡았다. 체포된 상당수는 당초 전쟁포로 대우를 받았다. 이들은 죄수복을 입지 않았으며, 강제노역에도 동원되지 않았다. 허나 1976년 이 같은 조치가 번복(飜覆)됐다. 수감자들은 죄수복 대신 모포를 두르는 모포투쟁(Blanket Protest) 나섰다. 잉글랜드 측은 배식(配食) 질을 낮추는 것으로 맞대응했다.

 

수감자들은 1980년 1차 단식투쟁, 1981년 2차 단식투쟁에 나섰다. 이들 중 바비 샌즈(Bobby Sands)는 총선에 옥중(獄中)출마해 당선됐다. 그러나 잉글랜드정부는 “테러리스트와의 타협은 없다”며 강경입장 꺾지 않았다.

 

결국 1~2차 단식 과정에서 10명 안팎이 아사(餓死)했다. 샌즈 장례식에는 10만여 군중이 몰렸다. 잉글랜드 측은 수감자들이 요구한 5개항 즉 죄수복거부권‧노역거부권‧죄수간교류권‧면회권‧감형(減刑)권 등을 암암리에 수용했다. 아일랜드 단식투쟁 사건은 2008년작 영국‧아일랜드 영화 헝거(Hunger)로 영상화됐다.

 

‘줴기밥에 똥배’ ‘단식에 보름빵’

 

백이숙제나 북아일랜드와 달리 금식(禁食) 아닌 급식(急食‧급한식사) 몰래 하는 ‘황제단식’도 있다.

 

단식 아닌 소식(小食) 사례이긴 하지만, 한반도 북부에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삼대(三代)가 있다.

 

해방 후 감시 겸 자문역의 소련군 장교들 병풍처럼 늘어세우고 평양 입성(入城)한 김일성(본명 김성주)은, “모두가 이밥(쌀밥)에 고깃국 먹게 해 주겠다” 공수표(空手票) 남발했다. 김정일은 “나는 쪽잠 자고 줴기밥(주먹밥) 먹으며 인민(人民)에 봉사한다” 선전했다. 김정은도 제 아비 따라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삼대 사진을 보면 누구나 이상함을 느낀다. 중국에서 진싼팡(金三胖‧김씨 집안 3대 뚱보)이란 조롱 나올 정도로 비대한 몸집들이다.

 

때문에 과거 필자와 만난 상당수 탈북민들은 입 모아 말했다. “쪽잠에 줴기밥이란 놈들이 똥배는 왜 저리 나왔나” 이는 북한 현지주민들도 품는 ‘의문’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김정은의 딸 김주애의 터질 듯한 볼살에 분통 터뜨리는 북한주민들이 적지 않다는 전언(傳言)이다.

 

한반도 남부의 경우, 필자가 직접 목격한 사례가 있다. 누구라고 말은 못하겠지만, 지난 지방선거 당시 국민의힘에서 공천(公薦)탈락 위기에 놓인 한 인사는 서울 여의도 국회 앞 단식투쟁 나섰다. 해당인사와 장기간 친분 있었던 필자는 당시 취재 겸 위로 겸 뙤약볕 무릅쓰고 천막으로 찾아갔었다.

 

그런데 웬걸, 해당인사는 쌩쌩하디 쌩쌩했다. 더구나 지지자들은 ‘보름빵’ 등을 갖고 대낮에 찾아왔다. “누구 때문에 공천탈락했네” 속마음 털어놓던 그 인사는 자신도 빵을 맛나게 먹고 필자에게도 한 덩이 권했다. 그 보름빵은 공교롭게도 지금까지도 필자 냉장고 안에 모셔져 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해당인사는, 경선(競選)‧본선(本選) 통과해 지금은 한 광역단체장으로 근무 중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무기한 대(對)정부 단식투쟁 나선다는 소식이다. 그는 31일 국회에서 당대표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 열고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민주주의 파괴를 막겠다”며 이같이 밝혔다. 허나 의문이다. 이 대표가 정말 사즉생에 나설지, 아니면 생즉생(生卽生)에 나설지.

 

이 대표가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인물이라 생각진 않는다. 모쪼록 이 대표는 세간(世間)을 의식해서라도 진정성 있는 행동에 나서길 바란다. 물론 이 대표 일가(一家) 둘러싼 그간의 ‘황제의전’ 의혹 생각한다면 의심이 여전히 가시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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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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