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가입

로그인

아이디
비밀번호
ID/PW 찾기
아직 회원이 아니신가요? 회원가입 하기

오늘은 리덩후이(李登輝) 전 대만 총통 서거 3주기

profile
박지후대세

總統李登輝先生玉照_(國民大會實錄).jpg

李登輝

(1923. 1. 15~2020. 7. 30)

 

대만 최초의 민선 총통

대만의 민주화에 큰 기여를 한 인물

일명 '민주 선생'(民主先生)

 

리덩후이 전 총통의 업적을 요약한 영상

 

1923년 본성인(명청 시기 중국 대륙에서 대만 섬으로 이주한 한족의 후손) 가정에서 태어남

1943년 일본 교토제국대 농경제학과에서 유학했고, 귀국 후 국립대만대 농경제학과를 졸업함

이 때 당시 본성인 탄압 등 국민당의 실정에 반감을 가져 1943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가 1946년 탈당함.(장징궈와 함께 유이한 중공 당원 출신 총통임.)

 

이후 대만대 농경제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1971년 국민당에 입당해 정계로 뛰어들음.

 

당시 행정원장이자, 훗날 아버지 장제스의 뒤를 이어 총통이 되는 장징궈의 눈에 띄어 정무위원을 시작으로 1978~81년까지 관선 타이페이시장을 맡았고, 1981년에 대만성 주석에 올라 3년동안 재직하다가 1984년에는 권력 2인자인 부총통 자리까지 오르는 등 요직을 맡아 승승장구함. 

 

본성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본성인들을 영입하는 등의 노력을 한 장징궈가 적극적으로 밀어줬음.

 

물론 국민당 내 대다수를 차지하는 외성인(국부천대 때 국민당을 따라 대만에 건너온 사람들)보수파는 이를 좋지 않게 봄.

 

1988년 장징궈가 세상을 떠나자, 헌법에 따라 부총통이었던 리덩후이가 총통직을 계승했고, 국민당 주석 대행을 맡았음.

원래 관례상 바로 국민당 주석직에 올라야 했지만, 보수파들의 견제를 받아 오랫동안 국민당 주석 대행직에 머물렀음.

 

리덩후이는 보수파와 타협을 시도했고, 온건 보수파인 쑹추위(宋楚瑜)의 도움을 받아 6개월만에 드디어 정식 주석에 취임함.

 

이 때 국민당 중앙위원 31명 중 절반 이상인 16명을 본성인으로 기용했지만, 보수파의 견제로 본격적인 개혁은 못 했고, 그 대신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개혁을 추진함.

 

리덩후이는 자신의 파벌인 '주류파'를 키워 보수파(비주류파)를 억제시켰고, 주류파와 비주류파의 당권 싸움(2월 정쟁) 끝에 1990년 3월, 국민대회에서 치른 간선 총통 선거에서 당선됨.

 

0lkpwJLJDg8JT-40iw4-XA5b1jhyaaQ4A5vB4NyTKEs8RHrFSSubxz4ceE_68zmT3wLQIAjt6r8MXsiRYVren9JeJX6h4MNsTLjZCdZyRI9l9yvPBPKMxHPrC8.webp.jpg

 

총통 정식 취임 이후, 민진당이 요구하는 정책들을 받아들이며 국민당의 전통적인 노선과 반대되는 여러 개혁 정책을 실시함.

 

당시 국민대회와 입법원은 국부천대 이전 중국 대륙 시절 선출됐던 의원들이 계속 해먹고 있어 '만년국회'라고 불렸고, 수십년 동안 제1대 국민대회/입법원인 채로 간간히 증원선거를 치루는 상태였음. 

장제스가 1948년 제정한 헌법 조항('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에 1대 국민대회 대표, 입법위원들은 대륙 수복 전까지 임기가 유지된다고 정해져 있기 때문. 당연히 장제스가 자신의 독재를 뒷받침하기 위해 제정한 악법이었음.

 

민주진보당을 비롯한 민주 세력들은 제1대 국민대회/입법원 해산 및 총선 실시를 요구했지만 그럴 때 마다 국민대회 대표, 입법위원들은 고액의 퇴직금 및 연금 지급을 대가로 요구함.

 

그러나 리덩후이는 민주화 세력의 요구를 받아들여 헌법을 개정해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을 폐지함. 그리고 무기한이었던 제1대 의원들의 임기를 1991년 12월 31일까지로 개정했고, 1991년 12월 21일 제2대 국민대회 선거, 1992년 12월 19일 제2대 입법위원 선거를 실시했음.

 

그리고 1994년에는 관선이었던 타이페이와 가오슝 직할시장, 대만성장을 직선제로 바꿔 완전한 지방자치 시대를 열었음.

 

그리고 같은 해에는 총통을 직선제로 선출하도록 개헌했고 총통 임기를 6년에서 4년 중임제로 변경함.

 

LRqoqJV52GJojFekxFNCFssKzTP9N5hiERd_5xzswwR6hzq0wjwwHBRcZ7TPBO2UEpVo6KTDViVKTyBc28s4-hVmZ5neSv7ZCJujVxCd5QS8qumDbmt1F-bhHm.webp.jpg

독재 정권 시절의 과거사 문제 해결 정책도 실행했는데, 1995년에 대만 총통으로서는 최초로 2.28 사건을 공식 사과함.

1993년에는 시안 사건으로 가택 연금 상태였던 장쉐량을 석방하기도 함.

 

6859120.jpg

1996년 중국이 리덩후이의 3선을 저지하기 위해 대만 해협 위기를 일으켰지만, 리덩후이는 오히려 더 당당히 맞섰고, 미국의 지지까지 얻어 미 해군 항모들이 대만 섬 주변에 출동해 배치되었음

 

Screenshot_20230729_231205_Samsung Internet.jpg

ROC_1996_Presidential_Election_Township_level_(2).svg-1.png.jpg

ih7HCBpqEe5eJYcBkVz4oMXz-HGso5sV7to-kDIYE-sAKXLepRkA0m_o-JzZYFwkvbholmtjUy4s-eZw-5K6T3wrhP6u55MkJ1jct6TeYMICoiXV7ZMMdGSPTd.webp.jpg

'중국에 당당히 맞서는 지도자'로 대중들에게 각인된 리덩후이는 민진당 지지자들의 표까지 흡수해 54.0%의 득표율로 최초의 직선 대선에서 압승함.

이로써 리덩후이는 대만 최초의 민선 총통이 되었음.

 

3번째 총통 임기가 시작되고 1년여 뒤,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고, 남아공까지 중국의 압력으로 대만과 단교하자, 대만 독립 성향을 점점 드러내기 시작함.

 

1997년 7월 20일에 "양안관계는 특수한 국가 대 국가 관계다!"라고 발언하며 '양국론(两國論)'을 주장함. 

그 동안 중공과 국민당 모두 하나의 중국을 주장한 걸 생각하면 매우 파격적인 주장이었음.

 

Z1mkiPdNF1WWjLuZ0RiiPepYDwjnHRSsbJqS9lRfpp20QR0J7Z6W3OgRMBQ_pWBwIlwkp5_S42Tr5hodQVpkIwA2v_FwChIs8_OIxhsZFLR_fQ1V_ABx6BHHt7.webp.jpg

2달 전에는 '대만의 주장(台灣的主張)'이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중국을 7개 국가로 분할해야 한다!"라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함. 당연히 중국 정부는 격노했음.

 

2000년 대선을 앞두고, 리덩후이는 자신의 계파 소속인 롄잔을 총통으로 내세웠지만, 또 다른 차기 대권주자였던 전 대만성장 쑹추위가 반발해 국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했음

 

Screenshot_20230521_122007_Samsung Internet.jpg

ROC_2000_Presidential_Election_Township_level.svg.png.jpg

 

당시 직할시는 타이페이와 가오슝 밖에 없었고, 대만 성이 그 나머지 대만 섬 지역을 다 관할했음.

그런 대만성장에서 압도적으로 당선될 정도로 경쟁력이 있던 쑹추위가 출마했으니 당연히 국민당 표가 분열됐고, 

결국 민진당 천수이볜이 어부지리로 당선돼 최초의 정권교체가 이루어졌고, 국민당의 55년 집권도 동시에 끝났음.

 

VbP2xkRF_CotkadG7hrOzcNdP3t0PTJMuooblt7e_09BYcYl-_PxrW1VgrteGVNqHM-1cw4iCricFM900GcZUiDNyOIv7BXAjolRrInFjAe0uMFI1wIw0QvJOR.webp.jpg

2000年李登輝卸任告別總統府.jpg

 

 

20200731184710-0a8c0a6d.jpg

퇴임 1주일 뒤 어느 퇴역 군인이 리덩후이에게 붉은 물감을 뿌리는 테러를 저지르기도 함.

 

photo.jpeg.jpg

169064232329470_P13314486.jpg

a25de268e038c53d4a4b5c519f871408.jpg

2001년 리덩후이계 인사들이 국민당을 탈당해, 민진당을 탈당한 급진독립파 인사와 손잡고 대만단결연맹이라는 신당을 창당했고, 리덩후이를 정신적 지도자로 세움.

리덩후이도 직접 창당식에 참석해 대만단결연맹을 지지선언함.

이에 국민당은 9월 12일, 해당 행위를 이유로 리덩후이를 국민당에서 제명시킴.

 

국민당에서 제명당한 뒤, 거리낄 것이 없어진 리덩후이는 완전히 범록연맹 쪽으로 전향했고, 민진당 대선 후보들을 지지선언함.

 

참고로 국민당이 이 때를 기점으로 급속도로 친중화됨.

 

XCtLqmjIPMG3kOo9jnC6aBct8AT5wkAlYfPInYzBy6dWhruaZE4EcpGnX4HhP4I64SO6BRzu8XcZzHsrzn9TOAFknANu5SyOidBxCSRJQCs76aMYvCruJr34gj.webp.jpg

20160803124156846021.jpg

 

 

FB_IMG_1690644861015.jpg5ic6uqiF-tZl6bN2GmkhCUA5eSiFPjt5l1PQl7I9oS72Bewiu-8lkwRIAmCJdyIXw0m4fC84POB_Ksq2EWmHFp2nCPkREDRcw-5e3C4A52RNEZ-Kl8vC-8S93j.webp.jpg

Eg03_med7360iCvxqdGGftrtCzoWVNiy4-IqdTqRvskwBq_CIMozTiEH5Du75qqJapAihIJHqZaIyOMuPB_y9cILgbiNbQIk9PKUt174XIBVXf131Vm1gg7HDZ.webp.jpg

 

한편 대만 정계의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 방일할 때 마다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음.

그래도 이 쪽은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 게 태평양 전쟁 때 징병 갔다가 전사한 형이 야스쿠니에 합사되어 있음.

 

그리고 무지성 일뽕이라고 비난할 수도 없는 게 2015년에 "대만인이 일본의 노예로 전락했던 점을 매우 비통하게 생각한다"라고 발언한 적도 있음.

 

어쨌든 이러한 친일 행보로 중국 및 대만 친중 인사들은 그를 '한간(漢奸/汉奸, 친일 매국노)'이라고 비난함.

 

rCnPNw17qTBCkqbY1ynRnI_mDwh5BagxjFr1Aio1swRTjyd3HDpBjDRhlbnlSEzUr7ItT2GtOQ539s9OZfLty4Ep525eYWnw_9HCJqbdLBg8UGEOmN6RaRBTRe.webp.jpg

qVsKDtGKJLrD1tzCvE8JzYaEfAcPX4OO_dZXyZ96K3miyxSptAr4vC8Ly0-7ibP73aXPPdqpfMuo0UTshaELUKdq2iHhIdsn10Z-8f2kO8G-1kGkOneVVm4RDN.webp.jpg

 

손녀의 결혼식에 참석한 리덩후이의 모습

 

말년에도 강연, 저술 활동을 하는 등 정력적으로 활동하다가, 2020년 2월, 우유를 빨리 마시다 폐렴 증상을 보여 병원에 입원했고, 그해 7월 30일 결국 패혈증과 다발성 장기부전으로 서거하심. 향년 97세.

 

2020._09.19_總統偕同副總統出席「李前總統登輝先生追思告別禮拜」_(50358624267).jpg

FB_IMG_1690644724472.jpg

대만 자유민주주의의 거목,

'민주선생' 리덩후이(李登輝) 전 총통

(1923~2020)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感謝李登輝總統對台灣自由民主主義的付出。

댓글
0
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