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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몽대월전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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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영도위원회 청꿈실세

원몽대월전쟁.jpg

 

임오(壬午) 4년[원 지원 19년] 봄 2월, 점성(占城)에서 포파마각(布婆麻各) 1백 명을 보내어 흰코끼리를 진상하였다.

 

여름 4월, 진유애 등의 사신들이 돌아왔다.

 

6월, 판수(判首) 진애 등 죄인 무리를 다스렸는데, 애는 천장에서 호갑병(󰏴甲兵)으로 발배되었고, 여순은 송병(宋兵)들과 무리지었다.

 

가을 8월, 양강수신(諒江守臣) 양울(梁蔚)이 역으로 아뢰었는데, 원 우승상(右丞相) 사도(唆都)가 병사 50만을 거느리고 와서 소리 질러 말하길 길을 빌려 점성을 치겠다고 하였는데, 실은 쳐들어오려는 것이었다.

 

그때 악어가 노강(瀘江)에 이르렀다. 황제가 형부상서(刑部尚書) 완전(阮詮)에게 명하길 글을 강 한가운데로 던지라 하였다. 악어는 저절로 갔다. 황제는 이 일을 한유(韓愈)와 같다고 하여 '한전(韓詮)'이라고 사성하였다. 또 국어로 부시(賦詩)를 지음에 능하였다. 우리나라의 부시에 국어를 많이 쓰게 된 것은 실로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겨울 10월, 황제는 평탄(平灘)에 거둥하여 진사만(陳舍灣)에 주필(駐蹕)하고, 왕후백관을 모아 공격과 방어를 의논하고 요해처의 방어를 분담할 계책을 세웠다.

 

인혜왕(仁惠王) 진경여(陳󰆑餘)는 부도장군(副都将軍)에 임명되었다.

 

먼저 원인들이 쳐 들어오자 인혜왕 진경여는 틈을 타서 습격하였는데, 상황이 그 지략을 칭찬하시어 천자의남(天子義男)으로 세웠다. 그 뒤, 산을 쳐서 오랑캐들에게 대첩을 거두니 표기대장군(骠騎大将軍)에 임명하였다. 표기장군은 황자가 아니면 될 수 없었다. 경여는 천자의남인고로 임명하라는 명이 있었다. 이어 녹이 두터이 차차 올라가며 자색 옷과 높은 지위를 누리고 강한 권력이 주어지매 판수(判守)에 임명되었다. 더불어 천서공주(天瑞公主)와 사통하였다.

 

당시 흥무왕(興武王) 헌(𪩘)은 국준의 아들이었는데, 천서공주에게 장가를 들었고 또한 전공이 있었다. 황상은 국준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사인을 보내 서호(西湖)에서 경여에게 장형을 내리되 큰 고통을 주어 죽음에 이르게 하지는 말라고 주의하였다. 이윽고 조서를 빼앗기고 관작이 몰수되어 그 자산이 한 줌도 남지 않았다. 지령주(至灵州)는 본래 상상(上相) 진부설(陳傅説)의 것으로 경여가 지키고 있는 지 오래되었다. 경여는 지령으로 퇴거하였고 천한 노비들과 숯 파는 일을 하였다. 

 

당시 황상의 배가 평탄에 닿을 때 조수가 물러가고 바람이 세찼으며, 목탄을 실은 큰 배가 있었고, 그 주사(舟師)는 초립을 쓰고 짧은 겉옷을 입고 있었다. 황상이 이를 가리켜 시신(侍臣)에게 일러 왈, "저건 인혜왕이 아니지 않느냐?"

 

즉시 명하여 작은 배를 보내어 대탄항구(大灘港口)로 쫓아가게 하였다. 군교(軍校) 왈, "주사여, 황명으로 그대를 부르노라."

 

경여 왈, "이 늙은이는 장사꾼이외다, 어찌 일하다 부름에 알현하겠습니까."

 

군교가 실제로 들은 말을 가지고 돌아왔다. 황상 왈, "맞도다 인혜여, 상민은 반드시 이 말을 알지 못하느니라." 또 내시에게 명하여 불렀다. 경여는 짧은 겉옷을 입고 초립을 썼다. 황상 왈, "남아(男兒)가 여기까지 이르기에는 극한이었으리라." 조서로 죄를 면해주었다. 경여는 배에 올라 절하여 사례하였다. 황상은 어복(御服)을 주어 왕 아래에 버금가는 자리를 내어주니 공후 위였으며, 공사(公事)를 논의하는 바가 동일하매 많은 입술이 모였다.

 

10월에 이르니 경여는 부장군에 복직되었다. 그러나 결국 이전의 허물은 고칠 수 없었다. 또 그때, 황제는 회문후(𢙇文侯) 국찬(國瓚)과 회인왕(𢙇仁王) 건(𡺅)이 아직 모두 어리니 의정에 참여하는 것을 불허하였다. 국찬은 속으로 스스로 부끄러움과 분함을 품고 손으로 오렌지를 쥐어 부스러진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고 퇴각하여 집종과 친족들을 데리고 나머지 사람 천 명을 얻어 무기와 전함을 준비하고 "破強敵報皇恩(강적들을 쳐부수고 황은에 보답하자)"라는 제목의 6자를 깃발에 새겼다. 이후 적들과 대진하여 몸소 군사들 앞에 서니 적들은 이를 보고 대피하였으며, 마땅히 선봉으로 나서는 자가 감히 없었다. 졸(卒)에 이르자 황제는 깊이 애석해하여 친히 문제(文祭)를 지냈고, 가증(加贈)하여 왕작에 봉하였다.

 

태위(太尉) 광계는 상상태사(上相太師)로 임명되었고, 정공원(仃拱垣)은 봉지(奉旨)에 따라 한림학사로 임명되었다.

 

[출처]

1) http://www.nomfoundation.org/nom-project/history-of-greater-vietnam/Fulltext/40-Nhan-Tong-Hoang-De?uiLang=vn

2) https://bienniensu.com/tran-nhan-tong/

3) https://zh.wikisource.org/wiki/%E5%A4%A7%E8%B6%8A%E5%8F%B2%E8%A8%98%E5%85%A8%E6%9B%B8/%E6%9C%AC%E7%B4%80%E5%8D%B7%E4%B9%8B%E4%BA%94#%E4%BB%81%E5%AE%97%E7%9A%87%E5%B8%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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