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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페이지 조선사> 052 공부에만 전념토록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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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정

제4대 세종

 

조선은 무가 아닌 문으로 통치하는 국가였다. 특히 세종은 학문을 사랑하고 장려했던 군주로서 인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1426년(세종8년), 세종은 권채 / 신석견 / 남수문에게 

"내가 너희에게 집현관을 제수(임금이 직접 벼슬을 내림)한 것은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으므로 글을 읽혀서 실제 효과가 있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각각 직무로 인해 독서에 전념할 겨를이 없으니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글을 읽어 성과를 나타내어 내 뜻에 맞게 하고, 글 읽는 규범에 대해서는 변계량의 지도를 받으라."라고 지시하면서 비로서 집현전 관료들의 사가독서제가 시작되었다.

 

즉 사가독서(賜暇讀書)란 젊은 문신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였다.

 

세종은 집에서도 책 읽기가 쉽지 않다는 의견이 나오자, 빈 사찰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독서당을 건립했다. 하지만 1456년(세조2년), 세조가 집현전을 폐지하면서 사가독서제는 사라졌다.

 

그러나 학문을 장려하던 성종은 세조가 폐지한 사가독서제를 부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1483년(성종14년), 용산의 빈 사찰을 수리해 독서당이라는 편액을 내리고 이를 활용토록 했다. 

 

사가독서제는 연산군 때 또 다시 잠시 폐지되기는 했어도 중종 이후 부활해 계속 운영되었다.

 

젊은 관료가 사가독서에 선발된다는 것은 능력을 인정받아 고속 승진할 기회를 얻었음을 의미했다. 

 

왕은 선발된 관료에게 직접 술을 건네며 공부에 전념할 것을 당부했다. 제도적으로도 사가독서에 선출된 관료는 당상관급으로 대우받았으며, 학문을 총괄하는 대제학은 사가독서제를 거친 관료 중에서 선발했다.

 

그러나 1592년, 선조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정치 /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국가 형편으로 인해 사가독서제는 운영되지 못했다. 

 

1608년(광해1년), 대제학 유근의 청으로 한강 별영을 사가독서의 장소로 삼았으나, 결국 그곳 또한 제 기능을 하지는 못했다. 

 

사가독서제는 이후 영조 때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정조가 규장각을 설립해 사가독서제를 흡수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사가독서제는 1426년부터 1773년까지 1명에서 최대 12명까지 48회에 걸쳐 320명을 선발했따. 

 

사가독서는 조선이 학문과 인재를 숭상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으며, 사가독서로 능력을 키운 관료들은 조선을 이끌어가는 주역으로 성장했다.

 

-그니까 윗대리가라고 안 주 하지 말고 공부해라고 썩을 것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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