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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이재명 피습사건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들 담은 담론

업보는 업보를 부르는 법…극단정치 사라지길

 

<암살시도에 격분한 히틀러>

 

2008년 개봉한 헐리웃영화 ‘작전명 발키리(Valkyrie)’는 1944년 7월20일 벌어진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암살미수 사건, 일명 7‧20음모(Attentat vom 20. Juli)를 영상화한 작품이다.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을 일으킨 주체는 ‘검은 오케스트라(Schwarze Kapelle)’라는 나치‧국방군 내 비밀결사체였다. 이 단체 역사는 나치집권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이라는 나치 당명(黨名)에서도 보듯 나치 주축은 기존 귀족‧부르주아가 아닌 신흥세력이었다. ‘보헤미아의 상병’ 히틀러도 밑바닥 출신이었다. 졸부라는 배경에 극단성향까지 겹쳐 나치는 기성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독일 국군(國軍)인 국방군만 해도 히틀러 사병(私兵)인 슈츠슈타펠(Schutzstaffel‧SS)에게 멸시받곤 했다.

 

때문에 숙청에서 살아남아 숨죽이고 살던 귀족‧부르주아 계급, 히틀러에게 가족을 잃은 이들은 검은 오케스트라를 결성하고서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나치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에게 패하고 1944년 6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자 거사(擧事)에 착수했다.

 

암살계획은 대략 이러했다. 육군 보충군 참모인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Claus von Stauffenberg‧생몰연도 1907~1944) 대령이 문명세계와 단절되다시피 한 첩첩산중의 히틀러 회의실에 폭탄가방을 두고 나온다. 그 사이 육군 통신대장 에리히 펠기벨(Erich Fellgiebel)이 회의실과 외부를 잇는 모든 통신망을 차단한다.

 

히틀러 사망이 확인되면 유사시 계엄령 선포 후 보충군이 SS 등을 지휘해 내부반란을 진압한다는 내용으로 법제화(法制化) 된 발키리 작전을 발동한다. 히틀러와의 직통전화가 끊겨 우왕좌왕하는 SS 등은 “총통께서 쿠데타 세력에게 살해됐다” “너희 중 일부가 쿠데타 세력이다”는 식으로 속인다. 이 발키리 작전으로 나치 수뇌부 잔당(殘黨)들을 쓸어버리면서 동시에 새로운 정부를 조직한 뒤 연합국과 정전(停戰) 또는 종전(終戰)협상을 한다.

 

구상은 그럴 듯했다. 귀족인 슈타우펜베르크는 북아프리카 전역(戰域)에서 연합국 공습에 의해 왼쪽 눈, 오른팔을 잃어 장애인이 되는 등 히틀러에게 큰 원한 품은 인물이었다. ‘늑대굴’이란 별칭의 히틀러 회의실은 사방 대부분이 밀폐돼 야외에서 폭탄이 터질 때보다 폭압(爆壓)이 클 수밖에 없었기에 히틀러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에 프리드리히 프롬(Friedrich Fromm) 보충군 총사령관도 협력을 약속했다.

 

그러나 일은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폭탄은 터졌으나 하필 그날따라 회의실 창문이 열려 폭발 충격 상당수가 외부로 흘러나갔다. 때문에 몇몇이 죽거나 중상 입는 와중에도 히틀러는 약간의 부상만 입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누군가가 건드린 탓에 폭탄가방 위치가 바뀌어 파편 대다수가 히틀러 몸통이 아닌 두꺼운 테이블에 박힌 것도 암살실패 원인이었다. 히틀러 생존소식은 펠기벨에 의해 검은 오케스트라 수뇌부에게 전달됐다.

 

히틀러 명줄이 길더라도 첩첩산중 회의실과 외부를 잇는 통신선이 차단됐고, 베를린 상황이 어떤지 모르는 히틀러로서는 무작정 돌아오기도 어려웠기에 발키리 작전 발동을 밀어붙이면 승산은 있었다는 게 오늘날 중론이다. 보충군을 보내 신속히 나치‧SS 등 수뇌부를 “총통 암살세력” “당과 조국의 배신자들”로 몰아 처단하면서 총통부(總統府)‧제국의사당 등을 접수해 새 정부 수립을 선포하면 히틀러에게 반감 가진 야전군(野戰軍)사령관, 일반시민들이 일제히 호응할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히틀러는 독 안에 든 쥐가 되거나 적어도 히틀러와 내전(內戰)을 벌일만한 세력은 갖출 수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신할 수 없었던 베를린의 검은 오케스트라 수뇌부는 슈타우펜베르크가 돌아와 그에게 직접 물어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고 이게 패착(敗着)이 됐다. 검은 오케스트라가 시간만 보내는 사이 히틀러는 통신망을 복구하고 베를린행(行) 전화기 다이얼을 돌렸다. 애초부터 기회주의자였던 프롬은 총통 생존을 확인하자마자 변절(變節)했다.

 

급기야 히틀러가 “반란분자들에게 처절히 복수하라”는 육성(肉聲) 라디오 연설을 내보내자 대세는 굳어졌다. 검은 오케스트라는 대부분 붙잡혀 처형됐다. 베를린에서의 봉기와 함께 프랑스 파리에서 거사 일으켰던 현지 주둔군 사령관 카를 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Carl Heinrich von Stülpnagel)도 체념하고서 8월30일 사형대에 섰다. ‘사막의 여우’ 에르빈 롬멜(Erwin Rommel)도 “네가 죽으면 가족은 살려주겠다”는 제안에 청산가리를 입에 털어 넣었다.

 

<삼두(三頭) 암살하려 했던 히틀러>

 

히틀러는 무자비한 보복에 나섰다. 검은 오케스트라와 연관이 있든 없든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자들은 모조리 잡아들여 인민재판소에 세웠다. ‘피의 판사’라는 악명(惡名)으로 불렸던 롤란트 프라이슬러(Roland Freisler)는 수천 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군인이라 해도 총살형이 아닌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것도 단 번에 목뼈를 부러뜨려 편히 죽이는 게 아닌 피아노 줄에 매달아 천천히 잔인하게 살해했다. 연좌제(緣坐制)도 적용됐다. 히틀러 목숨을 앗으려 한 당사자인 슈타우펜베르크는 그 형과 사촌 등이 줄줄이 끌려가 처형됐다.

 

검은 오케스트라의 반란을 고변(告變)했던 프롬도 불고지죄(不告知罪) 등이 적용돼 나치 패망을 몇 달 앞둔 1945년 3월15일 총살됐다. 그는 죽기 전에 “이럴 줄 알았으면 배신하지 않는 거였는데” 후회했다고 한다. 사후(事後) 미쳐 날뛰는 히틀러 앞에 국방군 장성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치테러 피해자 행세를 한 히틀러도 미국‧영국‧소련 삼두(三頭)를 암살하려 했던 것으로 뒤늦게 드러났다. 2015년 미국 저널리스트이자 역사학자 빌 옌(Bill Yenne)이 출간한 ‘작전명 롱 점프(Operation Long Jump) : 스탈린‧루스벨트‧처칠 그리고 사상 최대의 암살음모’를 통해서다. 해당 서적은 연합뉴스‧조선일보 등 국내 다수 언론보도에서도 다뤄졌다.

 

책에 따르면 히틀러는 1943년 11월28일~12월1일 테헤란 회담(Tehran Conference)에 모인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공산당 서기장을 한꺼번에 제거하려 했다.

 

이를 위해 히틀러는 SS 장교 오토 스코르체니(Otto Skorzeny)가 이끄는 암살부대를 이란 테헤란 안가(安家)에 잠입시켰다. 키 190여㎝, 체중 100여㎏의 거구인 스코르체니는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구출 등 다수의 비밀공작을 성공리에 수행한 인물이었다. 암살팀에는 사후 소련의 반(反)스탈린 세력 소행쯤으로 꾸미기 위한 소련군 출신들도 포함됐다.

 

그러나 미‧영‧소도 바보는 아니었다. 암살팀 보급을 맡았던 스위스 사업가 에른스트 메르세르(Ernst Mercer)는 사실 영국‧나치의 이중스파이였다. 게다가 소련에서 망명한 암살요원 일부는 실은 소련 첩보부대 소속이었다. 결국 미‧영‧소는 이들을 통해 음모를 알아채고 방비했으며 암살팀 상당수는 소련 거짓망명자들에 의해 자다가 혹은 뒤에서 역암살됐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오늘(2일) 부산 방문 중 괴한으로부터 흉기피습을 당했다고 한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 말라”는 격언(格言)처럼 여야를 막론하고 안타까워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그 어떤 변명으로도 테러는 정당화될 수 없다. 필자도 이 대표의 쾌차(快差)를 바란다.

 

정치권 일부에 의하면 용의자는 이전부터 이 대표 주변을 어슬렁거렸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용의자는 애초부터 범행을 계획했을 가능성이 있다.

 

용의자가 체포 직후 묵비권을 행사했기에 정확한 범죄동기(動機)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단 하나 분명한 건 복수는 복수를 부르고 피는 피를 부른다는 것이다. 그 회전목마는 영원히 회전할 수밖에 없다. 주변인물 몇 명이 극단적 선택 등을 하거나 교통사고를 겪어 논란에 휩싸였으나 무고함을 주장했던 이 대표마저 공교롭게도 오늘 흉기피습을 당했듯, 용의자는 언젠가 그 업보(業報)를 지게 될 수밖에 없다.

 

단호히 말하건대, 더 이상의 테러는 안 된다. 검찰이 이 대표 피습사건 특별수사팀을 꾸린 바, 엄정수사를 통해 진상을 밝혀내고 몸서리쳐지는 선혈(鮮血)정치‧업보정치가 더 이상 발 붙이지 못하도록 엄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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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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