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대 세종
명나라는 사대주의를 내세우며 주변 국가를 강력하게 압박했다. 조선도 명의 사대 질서에서 예외일순 없었다.
그러나 조선은 대외적으로 명의 속국임을 자처했을 뿐, 실질적으로는 자주적인 국정 운영을 이끌어나갔다.
그런 와중에 여진족의 잦은 침략은 조선의 입장에서 큰 부담이었다. 여진족과 전쟁을 벌이면 명이 군대를 파병해 조선을 압박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조선은 여진족으로 인해 재산과 목숨을 잃어가는 백성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세종은 명나라의 새 황제가 주변 국가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리하려 한다는 기조를 읽고 이를 영토 개척의 기회로 여겼다.
세종은 우선 명나라 영토를 침범할 생각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1만 마리의 말을 명에 조공했다.
동시에 여진족의 침략으로 조공로 확보가 어렵다고 하소연하며, 명의 허락하에 여진족을 토벌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명에게 여진족 토벌이라는 명분을 제시하면서도 영토개척이라는 실리를 얻으려는 현명한 외교술이었다.
명도 여진족 토벌에 반대하지 않자 세종은 북방 개척을 위한 시동을 걸었다. 1432년(세종14년),세종은 평안도도절제사 최윤덕에게 황해 / 평안도에서 차출한 군사 1만 5천 명으로 여진족을 토벌하게 해 조선군은 4명만 죽는 대승을 거두었다.
조선은 그곳에서 자성군을 설치하며 빼앗은 영토를 우리의 영토로 편입했으나, 여진족의 침략은 그치지 않았다.
1437년(세종19년),세종은 평안도도절제사 이천을 보내 여진족을 재정벌하며 1443년(세종25년)에 4군을 완성했다.
두만강 방면은 태종 시절 경성으로 부(府)를 옮길 정도로 여진족의 잦은 침입을 받던 지역이었다.
세종은 여진족의 분열을 틈타 김종서를 함길도도절제사로 임명해 1434년(세종16년)부터 1449년(세종31년) 부령부 설치를 끝으로 6진을 완성했다.
4군 6진을 확보하면서 조선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선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지역으로 이주를 꺼렸다. 산이 많고 추운 날씨로 농사를 짓기 어려운 데다. 여진족의 침입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종은 굴하지 않고 사람들을 강제 이주하는 시민 정책을 펴, 결국 두만강과 압록강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와 외교술 보소 그리고 놀고 있는 땅은 쓸모가 없으니
ㅎㄷㄷ 철원도 디지게 춥던데 저기는 오죽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