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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의사증원 없었다면 ‘대장금’도 없었다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 소견을 담은 담론

의원들, 이젠 현실 자각하고 본분 충실해야

정부도 급진적 증원으로 파국 초래치 말아야

 

“오나라, 오~나라” 배우 이영애 주연의 2003~2004년 대하드라마 대장금의 주제가 멜로디다. 2000년대생 독자들께서도 한 번쯤은 들어봤으리라 짐작한다. 해당 드라마는 최고시청률 57.8%를 기록하는 등 선풍적 인기를 끈 바 있다. 심지어 북한 김정일도 이영애에 반해 노무현 전 대통령 방북(訪北) 당시 “이영애와 만날 수 있나” 취지로 타진했다고 한다.

 

드라마의 주인공 ‘서장금’의 모티브가 된 실존인물은 조선(朝鮮) 중종(中宗‧생몰연도 1488~1544) 때의 의녀(醫女) 장금(長今‧?~?)이다.

 

장금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첫 등장한 건 중종 10년(1515년) 때 기사(記事)다. 중종실록(中宗實錄)은 “의녀 장금은 호산(護産‧왕실비빈의 출산을 돌봄)하여 공이 있었으니 당연히 큰 상을 받아야 할 것인데 아직 드러나게 상을 받지 못하였다” 기록했다.

 

중종 17년(1522년)에는 “의녀 신비(信非)와 장금에게 각각 쌀‧콩 각 10석씩을 줬다”고 했다. 중종 19년(1524년)에는 “의녀 대장금(大長今)의 의술이 그 무리 중에서 조금 나으므로 대내(大內)에 출입해 간병하니 이 전체아(全遞兒‧정규직으로서 받는 급료의 전부)를 주라”는 명이 있었다고 했다.

 

장금은 출중한 실력으로 중종의 크나큰 신임을 샀다. 1515년 2월8일 원자(元子)를 생산하고 3월2일 사망한 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 사건에 연루됐음에도 처벌받지 않았을 정도였다. 사실 당시 시대상 출산 후유증에 따른 사망은, 불행한 일이지만, 불가항력적이었다. 게다가 장금은 장경왕후가 위태로운 와중에도 왕자가 무사히 태어나게 했다.

 

장금은 중종이 승하(昇遐)할 때까지 궁궐 안팎의 많은 이들을 질병‧부상의 고통에서 구제하다가 편안한 말년을 보냈다. 잠시 귀양을 다녀왔을 가능성은 있지만 이는 임금 사망 시 어의(御醫)들이 겪는 일종의 관례였다. 귀양이라기보다는 휴가에 가까웠다. 실록 어디에도 장금이 처벌받았다거나 하는 기록은 없다.

 

그런데 장금과 같은 의녀들은 ‘의료인 증원’ 정책이 있었기에 존재 가능했다.

 

필자는 다행히 타고났는지 치과‧정기검진 빼고는 병원에 안 가는 편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게 아픈데도 치료받지 못하는 것이다. 강력한 반공(反共)정책을 추진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 지시로 1963년 의료보험법이 제정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의료보험법(건강보험법)은 일각에서 사회주의 시책이라는 비판까지 샀다. 허나 ‘국민 모두 건강할 권리’를 향한 박 전 대통령 집념을 꺾지 못했다.

 

조선 태종(太宗)~성종(成宗)도 만백성의 무병장수(無病長壽)를 위해 애썼다. 특히 의원(醫員‧의사) 증원에 주력했다.

 

교육부 산하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우리역사넷의 ‘신편한국사(新編韓國史) 조선시대편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구제제도와 그 기구 - 의료제도’에 의하면 태종 대에 최초의 의녀 제도가 실시됐다.

 

이전까지 의원은 모두 남성이었다. 그러나 많은 여성들은 중병에 걸렸음에도 죽음까지 감수하면서까지 외간남자에게 속살을 내보이는 것을 큰 치욕으로 여겼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태종은, 그간 의료시장 독점하던 기득권 의원들 반발이 거셌을 가능성이 적지 않음에도, 의녀를 채용하면서 의원을 증원했다. 우리역사넷은 “국민에 대한 의료혜택 폭을 확대함으로써 조선시대 의료제도 기반을 조성했다”고 설명했다.

 

법제처 홈페이지의 ‘이조시대(李朝時代)의 의료제도’ 논문에 따르면 태종 9년(1409)년에는 우수한 의원을 보다 많이 양성하기 위한 의약활인지법(醫藥活人之法)이 시행됐다. 필자가 법안 내용을 정확히 해석한 것인지는 모르나, 이를 통해 한산인(閑散人‧무직자) 등을 전의감(典醫監‧의료학교)에 보내도록 했다. 또 제생원(濟生院‧각 도에서 약재를 맡던 관아)‧혜민국(惠民局‧일반백성 환자를 치료하던 관아) 등이 주야(晝夜)로 의학을 습독하는 한편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고 모든 환자의 집에 즉각 왕진(往診)토록 했다.

 

신편한국사에 의하면 세종(世宗) 대에는 의서습독관제(醫書習讀官制)가 신설됐다. 이를 바탕으로 양반 자제들이 사서삼경(四書三經)은 물론 의학도 공부하도록 권장하는 한편 침구의(鍼灸醫)‧나력의(瘰癧醫)‧외과의 등 전문의를 양성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한성부(漢城府) 5부(部) 등에 월령의(月令醫‧빈민구제 의원)가 파견되고 계수관(界首官‧도의 지시를 군현에 전달하던 관아)에 다수 의원(醫院)이 설치되는 등 수도권‧지방 가리지 않고 의원들이 부족함 없게 됐다. 최소한 의원 증원 등 확실한 의료시스템이 구축됐던 1392~1743(영조 19년)년 사이 약 350년 동안의 조선 초중반기 역사에서는 역병 등에 따른 대규모 사망 기록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의대증원이 정치권‧사회의 뜨거운 감자다. 의대 정원을 십 수년째 동결한 결과 2020년 기준으로 국내 임상의사(한의사 포함) 수는 인구 1000명당 2.5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원을 기록했다(‘OECD 보건통계 2022’ 참조). 자연히 환자는 환자대로 불편하고 의사는 의사대로 격무(激務)에 시달리고 있다. 2020년 기준 의사 연평균 임금은 2억3070만원인 반면 간호사는 4745만원에 그치는 등 소득격차 폭증은 덤이다(2022년 7월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인력 실태조사’ 참조).

 

지난해 1월 복지부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의뢰해 추산한 결과에서는 2010~2018년 평균 진료량을 유지할 시 2035년 국내 의사 수는 9654명에서 최대 1만4631명까지 부족할 것으로 전망됐다. 이제는 의원들도 현실을 자각(自覺)하고 의료인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할 때다. 희생‧봉사‧장인정신을 주창(主唱)한 히포크라테스 선서(Hippocratic Oath)를 잊어선 안 된다. 정부 또한 너무 급진(急進)적인 증원을 강행해 국민건강을 볼모로 한 대규모 의사파업 사태 등을 야기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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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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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주한
    작성자
    2024.02.19

    그리고 이영애 씨.. 개인적으로 팬입니다. 대한민국 미모에선.. 아마도,, 두 번째?! 존경합니다. 대한민국 사랑하시는 그 마음도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