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 담은 담론
믿던 아군에 쓰러진 트리플크라운 골칫덩이
측천무후(則天武后‧생몰연도 서기 624~705)는 많은 사람이 알다시피 대륙의 유일한 여성황제다. 본명은 무조(武曌), 시호는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로서 무측천(武則天) 등 다양한 이명(異名)으로도 불린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전근대 대륙역사상 거의 유일하게 ‘관료’로서 활동한 여성측근이 측천무후 주변에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바로 상관완아(上官婉兒‧664~710)다.
상관완아는 학식(學識)이 뛰어났고 외모도 청초했다. 그의 입궁(入宮) 계기는 기록마다 다르다. 2014년 1월 연합뉴스 보도에 의하면 동월(同月)에 처음 공개된 상관완아 무덤 비문(碑文)에서는 “당고종(唐高宗)의 후궁으로 입궁했다”는 내용이 확인됐다. 반면 자치통감(資治通鑑)‧신당서(新唐書) 등 기존 기록들은 상관완아가 측천무후 눈에 띄어서라거나 노비로서 궁에 들어갔다고 기술했다.
노비입궁설에 따르면 상관완아는 조정대신이었던 상관의(上官儀)의 손녀였다. 상관의는 고종의 명으로 수렴청정(垂簾聽政) 중이던 측천무후 제거를 도모하다가 역격당해 일족이 멸족됐다. 당시 젖먹이인데다가 시대상 여자로서 상관씨 대(代)를 이을 수 없었던 상관완아는 모친 정씨(鄭氏)와 함께 겨우 살아남아 궁중노비가 됐다.
상관완아의 이름은 그 영특함으로 금새 궁내에 퍼졌다. 그가 13세가 되던 무렵 측천무후는 상관완아를 불러 재능을 확인했다. 그리곤 곧장 면천(免賤)한 뒤 제 곁에 머물도록 했다.
얼마나 측천무후가 상관완아를 아꼈냐면 원래는 처형하고도 남을 불경죄(不敬罪)도 가볍게 처벌했을 정도였다.
상관완아와 만난 측천무후는 “(네 일족을 멸한) 나를 원망하느냐”라고 물었다. 이에 상관완아는 “원망하면 불충(不忠)이고 원망 안 하면 불효입니다”라고 답했다. 이는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겠나’는 의미로서 고대~중세 시대상 최고권력자 시해(弑害) 기미만 보여도 죽음을 비껴갈 수 없었다.
좌우는 상관완아 주륙(誅戮)을 청했으나 측천무후는 경형(黥刑‧죄명을 얼굴에 문신으로 새겨 넣음)만 내렸다. 그것도 상관완아 미모를 염려해 거의 작은 점 크기로 글자를 써넣게 했다. 어쩌면 상관완아의 태도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덕분에 문신은 도리어 ‘매력점’ 효과를 발휘해 상관완아 미색(美色)을 한 층 돋보이게 했다. 배우 고소영 코에 자연적으로 있는 매력점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아예 점 크기의 매화(梅花)를 그려 넣었다는 설도 있다. 도성 여인들 사이에서는 상관완아를 따라 화장하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고 한다.
이후 상관완아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690년 측천무후가 당나라를 일시적으로 무너뜨리고 무주(武周)를 건국하자 벼슬을 받고 측천무후 ‘문고리’가 됐다. 측천무후의 황명(皇命)은 상관완아에 의해 조칙(詔勅)으로 작성돼 천하에 하달됐다. 무소불위 권력의 ‘소(小) 황제’ 상관완아는 건괵재상(巾幗宰相)‧내사인(内舍人) 등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건괵은 여성들이 머리를 꾸미기 위해 썼던 쓰개를 뜻한다.
염문(艷聞)도 뿌리고 다녔다. 궁궐 안팎에는 상관완아가 측천무후의 조카 무삼사(武三思)와 연인관계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측천무후의 아들로서 후일 황위에 오르는 당중종(唐中宗)과도 뜨거운 관계라는 풍문이 있었으며 실제로 훗날 상관완아는 중종의 후궁이 된다. 덕분에 문무백관들 정변(政變)으로 무주가 단 1대만에 끝나고 당나라가 다시 재건된 후에도 무관의 상관완아는 조정을 쥐고 흔들었다.
그런데 권세가 하늘을 찌르고 사해(四海)를 뒤덮던 상관완아의 최후는 대단히 허망했다.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아군’에게 목숨 잃고 말았다.
710년 중종은 중독으로 의심되는 사인(死因)으로 붕어(崩御)했다. 그러자 그의 본처 위황후(韋皇后)는 자신도 측천무후처럼 되고자 하는 야망에 자신이 옥좌(玉座)에 앉으려 했다. 또 막내딸 안락공주(安樂公主)에게는 황태녀(皇太女)라는 전무후무한 감투를 씌우려 했다.
‘측천무후 시즌2’가 시작되려 하자 당나라는 발칵 뒤집혔다. 황족(皇族)인 임치왕(臨淄王) 이융기(李隆基)는 고종‧측천무후의 딸 태평공주(太平公主)와 연합해 위황후를 제거했다. 위황후와 권력을 다퉜던 상관완아도 이융기 등에게 힘을 보탰다.
그런데 궁궐에 난입해 위황후 세력에게 창칼 휘두르던 이융기의 병사들은 실수였는지 의도적이었는지 상관완아의 목도 쳐버렸다. 다른 기록은 아예 “이융기가 상관완아를 위황후‧안락공주와 함께 처형했다”고 기술했다.
이융기로서는 역적 측천무후와 가까웠고, 당 재건 후에도 비선(秘線)처럼 국정(國政)에 깊이 개입하고 권력욕에나 불타오르며, 쓸데없이 인조(人造) 미모나 뽐내고 화보 찍으면서 이상한 추문(醜聞)이나 뿌리고 다니는 이 트리플크라운 골칫덩어리가 세력에 하등 도움 안 된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융기는 남들 눈을 의식해서인지 상관완아의 시(詩) 등 작품들을 모아 20권의 문집(文集)으로 편찬하긴 했다. 상관완아는 그래도 후궁으로서 당 황가(皇家)의 일원이었다. 덕분에 수백년 뒤 청(淸)나라에서 출간된 전당시(全唐詩)에도 상관완아의 시 32수가 실렸다. 그러나 이융기는 상관완아의 생애는 그리 심혈 기울여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던 듯하다. 위황후‧태평공주 등 당대의 타 인물들과 달리 상관완아의 삶이 사서(史書)마다 다른 것도 이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한 영부인 특검법이 내달 이후 국회 본회의에서 재표결에 부쳐질 것으로 전망된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특검법 자체는 정쟁(政爭)용‧총선용이라면서도 특별감찰관‧제2부속실 설치 필요성을 내비치는 등 고심하는 분위기다. 적잖은 국민이 영부인 특검을 원하는 상황(상세사항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에서 한 위원장으로서도 마냥 영부인 논란을 방치하긴 힘들 것이다.
특검법이 총선용일 가능성은 높다. 필자도 동의한다. 그러나 왜 저토록 적잖은 국민이 영부인을 부정적 시각으로 예의주시하는지 자성(自省)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영부인 자신의 성찰(省察)이 필요하다.
영부인은 15일 기준으로 약 한 달 동안 두문불출(杜門不出) 중이다. 만에 하나 영부인이 내조만 하겠다는 당초 본인 약조를 뒤집고서 각종 논란을 야기했던 것처럼 또다시 대외행보 재개해 어떠한 물의를 일으킨다면, 그 때는 선당후사(先黨後私)의 상당수 국민의힘 인사들도 상관완아에 대한 이융기의 감정을 느끼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때로는 죽은 듯이 있어야 사는 법이다. 더 이상 명품백이니 특검이니 영부인을 둘러싼 나라망신은 없길 바란다.
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지당하신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