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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담] 성희롱과 손배소의 여야 ‘인재들’

오주한

말 그대로 지극히 개인적인 소견을 담은 담론

안하무인 울지경덕이 식겁한 이세민의 한마디

 

누구나 알다시피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옛 말이 있다. 진짜 현자(賢者)들은 양날의 검과도 같은 권력의 위험성을 알기에 스스로 삼가 조심한다는 뜻이다. 반면 못난 사람일수록 쥐꼬리만한 권세에도 쉽게 취해 세상 알기를 우습게 알고 경거망동한다. 이는 해당 인물이 속한 집단에 대한 민심(民心)의 이반으로도 번지게 된다. 때문에 후자(後者)에게는 언제나 강력한 통제가 따라붙어야 한다.

 

능연각훈신(凌煙閣勳臣)은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을 도운 공신 24인을 뜻한다. 서기 643년 이세민의 칙명(勅命)으로 24인의 초상화는 능연각에 걸렸다.

 

황제가 그토록 신임한 인물들이니 훈신들의 권세가 얼마나 하늘 찔렀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후대에도 동아시아 선비들 사이에서 “당신 초상화는 반드시 능연각에 걸리게 될 것”이라는 덕담은 ‘넌 꼭 입신양명(立身揚名)할 것이다’는 의미의 관용구로 쓰였다.

 

그런데 훈신들 중에는 위징(魏徵)과 같은 ‘익은 벼’도 있었고 ‘썩은 벼’도 있었다. 후자의 대표적 인물 중 하나가 울지경덕(蔚遲敬德‧생몰연도 585~658)이었다. 그의 본명은 울지공(蔚遲恭)으로 경덕은 자(字)이다. 다르게는 위지경덕(尉遲敬德)으로 불리기도 한다.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과는 선비족(鮮卑族) 등 같은 퉁구스계(Tungus) 출신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천하에 비견할 자 없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던 울지경덕은 특히 삭(矟)이라는 장창을 잘 쓰고 상대가 내지르는 창을 잘 피했다. 삭은 기병창(騎兵槍)의 일종으로서 서양기사의 렌스(lance)와 용도가 비슷했다. 오늘날로 치면 울지경덕은 위빙‧더킹 등 신들린 회피술로 상대 주먹을 피하고서 긴 린치의 핵펀치 한 방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헤비급 복서와 비슷했던 셈이다. 선비족은 붉은 수염에 파란 눈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며 실제 다수의 중세 그림에서도 외모는 대단히 이국적으로 그려졌다. 지금도 서양‧중동 역사(力士)들 피지컬은 유명하다.

 

울지경덕의 활약은 능연각공신이라는 명성에 뒤처지지 않았다. 사농공상(士農工商) 중 사회적 하위계급인 대장장이 출신이었던 그는 수(隋)나라 말기 정부군에 입대했다. 이후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군벌 유무주(劉武周) 휘하 편장(偏將)이 됐다. 그 때 이미 용명(勇名) 떨쳤던 울지경덕은 이세민의 투항 권유를 승낙하고 능연각공신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었다. 이세민은 몸소 주연을 베풀 정도로 매우 기뻐했다. 전장(戰場)의 울지경덕은 무패였다.

 

울지경덕의 무용(武勇)을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하루는 울지경덕의 명성이 과장된 것 아닌가 의심한 이세민의 동생 이원길(李元吉)은 시합을 청했다. 마상투창(馬上投槍)의 달인이었던 이원길도 창 잘 쓰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인물이었다. 이세민이 친히 관전하는 가운데 이원길은 말 타고 내달리며 한 창에 꿰어버리겠다는 듯 창을 내질렀다. 그러나 울지경덕은 날아드는 창을 세 번이나 빼앗았다. 질려버린 이원길은 끝내 패배를 인정했다.

 

이원길은 626년 7월 이세민이 일으킨 왕자의 난, 즉 현무문의 변(玄武門之變)에서 맏형 이건성(李建成)과 함께 목숨 잃었다. 이 반란에서도 울지경덕은 사력을 다해 이세민을 보필했다. 이세민 집권 후 울지경덕의 벼슬은 경주도행군총관(涇州道行軍總管), 우무후대장군(右武侯大將軍), 양주(襄州)‧부주(鄜州) 도독, 악국공(鄂國公) 등에 이르렀다. 사후 추증(追贈) 된 시호(諡號)는 충무(忠武)였다. 시신은 이세민 황릉(皇陵)인 소릉(昭陵) 곁에 묻혔다.

 

그런 울지경덕은 하늘 찌르는 권세 믿고 한 때 안하무인으로 폭주하다가 하마터면 목숨 잃을 뻔했다.

 

알려지는 바에 의하면 울지경덕은 어느 날 이세민이 주최한 연회에 참석했다. 그런데 황족(皇族)인 임성왕(任城王) 이도종(李道宗)이 상석(上席)에 앉은 걸 보자 심사가 꼬였다. 울지경덕은 대뜸 “넌 무슨 공이 있기에 내 윗자리에 앉았나” 망언 일삼았다. 이도종이 발끈하자 울지경덕은 솥뚜껑 같은 주먹으로 이도종을 ‘폭행’하는 대형사고를 쳐버렸다. 얻어맞은 이도종은 하마터면 실명(失明)할 뻔 했다.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웬만하면 훈신들을 두둔하던 이세민도 있을 수 없는 망동에 폭발했다. 진노한 이세민은 다음과 같이 일갈(一喝)했다.

 

“한고조(漢高祖)의 공신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늘 이해하지 못했는데 한신(韓信)‧팽월(彭越)이 왜 죽었는지 이제야 알겠도다”

 

이 말인 즉슨 정도(正度)를 어지럽히는 울지경덕을 한신처럼 목 베고 팽월처럼 오체분시(五體分屍)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울지경덕의 권세도 결국은 이세민이라는 후광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고 제 아무리 천근역사(千斤力士)라 해도 창칼과 화살의 비는 피할 수 없는 법, 그제야 식겁한 울지경덕은 벌벌 떨며 죄를 뉘우치고 개심(改心)했다.

 

여야 영입인재 혹은 총선출마자들 상당수가 망발(妄發)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실례로 야당 대표 대변인‧변호인 등을 지낸 한 인물은 자당(自黨) 여성 수행비서에 대한 “너네 같이 잤냐” 등 성희롱 의혹에 휩싸였다. 여당 사령탑 팬클럽 회원 출신으로 알려진 한 영입인재는 각종 의혹이 제기되자 대뜸 1억원 규모의 손해배상소송을 언론기자에게 제기했다. 그 사이에 관련 자료를 공개하고 국민에게 적극 해명하거나 언론중재위원회에 중재를 요청하는 등의 과정은 없었다.

 

여야 모두 공천(公薦)이 아닌 사천(私薦)을 정 하려 한다면, 권력에 취해 늘어진 공신들에 대한 강력한 통제부터 선행돼야 한다. 논란의 인물들로 인해 국민으로부터 욕먹는 건 그들이 속한 정당이다. 정치에 대한 불신은 국익(國益)에 하등 도움 될 게 없다. 여야 수뇌부는 불신의 정치를 자초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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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한 前 여의도연구원 미디어소위 부위원장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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